홍기선, 얄라셩...'서울의 봄'으로 시작된 한국 영화운동의 역사

성하훈 2024. 1. 5.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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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취재의 산물 <영화, 번혁운동이 되다> <충무로, 새로운 물결> 출간에 부쳐

연재 '책이 나왔습니다'는 저자가 된 시민기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저자 혹은 편집자도 시민기자로 가입만 하면 누구나 출간 후기를 쓸 수 있습니다. <편집자말>

[성하훈 기자]

 유작이 된 <일급기밀>(2018) 촬영 당시 홍기선 감독
ⓒ 미인픽쳐스 제공
 
1980년 5월 15일 민주화를 요구하며 서울역 앞에 집결한 서울시내 대학생들의 대규모 시위 현장에는 8mm 카메라로 촬영하던 홍기선(감독, 2016년 작고)이 있었다. '서울의 봄'을 기대하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신군부의 계엄 조치와 광주에서의 자행된 피의 살육을 통해 민주화에 대한 기대는 물거품이 된다.

당시 서울대 공대생이었던 홍기선은 신군부에 의해 '서울의 봄'이 무너진 이후, 카메라를 들고 사회문제를 다루는 영화를 만드는 데 몰두했다. 생전 그는 당시 현장에 있었던 책임감을 되새기며 잘못된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는 말을 종종 했다고 한다.

'서울의 봄'이 무너지고 1980년 5월 광주에서 자행된 양민학살 소식에 뒤숭숭해졌을 무렵 영화운동이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학생운동이 격렬해지면서 부당한 권력에 맞서려 했던 청년학생들의 몸짓은 다양한 문화적 활동을 사회운동의 성격으로 끌어올렸고, 영화도 그 자리를 차지했다.

김지하의 시처럼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숨죽여 흐느끼며 민주주의를 쓰듯', 주류영화의 밖에서 작은 영화(지금의 독립영화)를 만들었고, 영화를 통한 세상의 변화를 염원했다. 결과적으로 이때의 출발은 이후 새로운 한국영화를 만들어냈고, 미개한 변방의 영화로 취급되던 한국영화는 마침내 세계 영화의 중심에 우뚝 서게 된다.

관객에게 외면받던 한국영화의 변신의 기원
 
 한국영화운동사 1 <영화, 변혁운동이 되다>, 한국영화운동사 2 <충무로, 새로운 물결>
ⓒ 푸른사상사
 
<영화, 변혁운동이 되다>, <충무로, 새로운 물결> 두 권의 책으로 출간된 한국영화운동사는 저질 취급을 받고 관객에게 외면받았던 영화가 어떻게 세계적인 수준으로 올라갔는지에 대한 과정을 추적한 책이다. 박찬욱 봉준호 등으로 대표되고 있고, K-문화로 내세울 수 있는 K-영화 출발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간다.

1970~1980년대만 하더라도 한국영화는 외화 수입을 위한 방편으로 만들던 날림 수준의 작품들이 적지 않았다. 관객들이 외국영화를 더 많이 찾다 보니 돈이 되는 외국영화를 수입해야 했는데, 당시에는 필수로 규정된 편수의 한국영화를 만들어야 수입 허가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70년대 후반 일찍이 영화에 관심을 가졌던 청년들은 이런 한국영화의 현실에 답답함을 느꼈다. 이들이 선택한 것은 프랑스문화원과 독일문화원을 다니면서 해외 예술영화를 접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영화적 수준을 높여 가면서 새로운 한국영화를 꿈꿨다.

1979년 출발해 1980년 정식 서클이 된 서울대 얄라셩은 대학영화운동의 발전에 기점 역할을 했다. 대학의 영화 서클이라는 것이 거의 영화 감상만을 중심으로 하던 때, 직접 제작도 하면서 사회적 문제들을 영화의 소재로 활용했던 것이다.

대학을 졸업한 얄라셩 출신들은 서울영화집단을 만들어 계속 창작 활동의 꿈을 이어나가면서 새로운 영화에 대한 갈증을 해소해 나갔다. 이 영향으로 1983년 이후 서울 소재 대학의 영화서클이 대거 생겨난다.

이를 지도하고 영화에 대해 가르쳤던 게 전양준(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 이정국(감독. 세종대 교수) 등이었고, 고려대 정병각(감독), 연세대 변재란(서울국제여성영화제 조직위원장) 이수정, 이화여대 김수진(제작자), 이유진(작고. 프로듀서), 서강대 박찬욱(감독) 김소영(김정 감독), 경희대 안동규(제작자) 곽재용(감독) 이효인(전 한국영상자료원장), 외국어대 장기철(감독) 김태균(감독) 등을 중심으로 대학영화서클이 활성화 된다.

독재에 저항하며 검열 깨뜨려

1980년대 전두환 군사독재가 권력을 장악해 민주주의를 억누르던 시절 이들은 영화를 통한 세상의 변화를 추구했다. 이 과정에서 억지로 뒤집어씌운 혐의로 구속되고 재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탄압을 받는 과정에서도 사회문제를 다룬 영화제작의 끈을 놓지 않았다. 1980년대말부터 1990년대 초반 등장한 <오! 꿈의 나라> <파업전야> <닫힌 교문을 열며> <어머니, 당신이 아들> 등의 재야 영화를 기존 충무로 영화와는 다른 작품들이었다. 이를 통해 일제 강점기 이후 창작의 자유를 옥죄던 검열제도를 무너뜨리게 된다.
 
 노동영화 <파업전야> 촬영 현장
ⓒ 장산곶매 제공
 
충무로로 활동 영역을 확장한 이들은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주역들이었다. 영화를 체계적으로 공부한 이들은 외국 유학 경험을 쌓으며 충무로의 오랜 도제식 관습을 무너뜨렸고, 스크린쿼터의 효용성을 제대로 살려내면서 한국영화의 문화적 우수성을 지켜냈다.

민간 시네마테크와 영화강좌를 개설해 영화청년들의 꿈을 키울 수 있게 했다. 이 혜택을 받은 게 봉준호, 최동훈, 정윤철 등 한국영화의 중심에 있는 감독들이었다. 부산영화제를 필두로 한 국제영화제가 움트기 시작한 것도 영화운동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해외에서는 한국영화의 괄목할 만한 성장에 놀라면서 언제부터 한국영화가 이렇게 세계적인 수준으로 성장했냐고 궁금해하기도 한다. 이 두 권은 그 세세한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보수정권 시절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블랙리스트로 탄압할 때 이를 이겨낸 힘은 오랜 세월 영화운동을 바탕으로 성장해 온 한국영화의 독특한 체질 덕분이었다.

1980년~1990년대 대학생 시절 영화를 향한 애정으로 이론을 공부하고 현장을 체험한 세대들은 지금 한국영화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영화 후진국 수준에서 짧은 시간 안에 영화 선진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게 된 바탕에 한국영화운동이 자리하는 것이다.

한국영화운동사는 2015년부터 취재에 들어가 1979년 서울대 얄라셩이 태동으로부터 40년이 되던 2019년부터 '한국영화운동 40년'이란 기획으로 <오마이뉴스>에 연재를 시작했다. 2023년 1월까지 3년 1개월 동안 34회의 연재를 마무리했고 전체 내용을 다시 다듬고 추가 취재를 통해 8년 만에 두 권의 책으로 나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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