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만에 낯설어진... 발칙하고 자유롭던 그 시절의 로맨스

김성호 2024. 1. 5.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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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의 씨네만세 626] <쩨쩨한 로맨스>

[김성호 기자]

전성기를 맞은 한국영화계라지만 몇몇 장르에 한해서는 불모지나 다름없다. 자본이 많이 드는 사극이며 정통 드라마 장르에선 세계 어느 나라와 비견해도 모자라지 않은 작품이 꾸준히 나오고 있지만, SF와 호러, 섹스코미디 등에선 해외 영화계가 주목하는 작품을 찾아볼 수 없는 게 현실이다. 특히 뒤의 두 장르의 경우엔 아이디어만 따른다면 적은 예산으로 상업적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점에서 아쉬울 밖에 없는 대목이다.

한때는 그렇지 않았다. 영화를 비롯해 문화 전반이 지금보다 자유로웠다는 평가를 받는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수많은 섹스코미디 작품이 개봉해 관객과 만났으니 말이다. 심지어는 <색즉시공>이며 <몽정기> 같이 시리즈로 연달아 나온 작품까지 있었으니, 섹스코미디가 한국 영화계의 주요 장르 가운데 하나로 떠오를 수 있다는 기대까지 받았다.

그러나 이어진 현실은 기대와는 달랐다. 성을 상품화하고 편견을 강화한다는 둥의 이유로 섹스코미디 작품에 수많은 비판이 따랐던 것이다. 일각에선 정서적으로 불편하다며 이런 영화가 자유롭게 제작되는 풍토를 비난하기도 했다. 코미디의 특성상 특정 대상을 희화화하게 마련인데, 성을 주제로 누구, 혹은 무엇을 희화화하는 일이 당시 한국적 정서에 맞지 않았다는 평가도 이어졌다. 그렇게 섹스코미디 장르는 주류 문화에서 멀찍이 뒤떨어지게 되었다.
 
▲ 쩨쩨한 로맨스 포스터
ⓒ 롯데엔터테인먼트
 
한국 섹스코미디가 살아 있던 시절

이 같은 사라짐을 누군가는 자연스런 도태, 나아가 바람직한 소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누구는 한 장르의 소실이 영화산업의 경쟁력을 저해하고 문화적 다양성을 훼손한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미국은 물론 독일과 프랑스, 이탈리아 등 영화를 비롯한 문화 부문에서 선진국의 위상을 가진 나라들이 섹스코미디를 굳건한 장르로 확보하고 있다는 점은 한국에서 입지가 줄어든 이 장르를 전과 달리 바라보도록 이끈다.

<쩨쩨한 로맨스>는 한국 섹스코미디 장르가 나름의 입지를 구축하고 있던 시절인 2010년 제작된 작품이다. 이 작품 이후 <탐정: 더 비기닝> <해적: 도깨비 깃발> 등 장르를 선회한 김정훈 감독의 장편 데뷔작으로, 개봉 당시 200만 명이 넘는 관객이 들 만큼 화제를 모았다.

주인공은 성인만화를 그리는 정배(이선균 분)다. 아버지를 따라 정통 화가를 지망했으나 꿈을 이루지 못하고 만화가로 전향한 그다. 그러나 그가 내놓은 작품은 기대만큼 인정을 받지 못하고 사실상 백수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는 중이다.
 
▲ 쩨쩨한 로맨스 스틸컷
ⓒ 롯데엔터테인먼트
 
아버지의 그림을 찾기 위해 성인만화 그린 작가

그런 그에겐 목표가 하나 있다. 유명 화백이지만 가정을 돌보지 못하고 죽은 아버지의 유작이 팔려나가지 않도록 막는 것이다. 다름 아닌 어머니가 생전 갓 낳은 자신을 안고 있던 모습을 그린 초상으로, 소장한 갤러리가 수천만 원의 빚을 핑계로 이 그림을 매각하겠다 나선 때문이다. 그림이 일반에 팔려나가면 다시는 되찾을 수 없을 게 뻔한 노릇이다. 정배는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 그림을 지키겠다 다짐한다.

다짐은 다짐인데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 제대로 된 직업을 가져본 적 없는 정배가 수천만 원을 마련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런 그가 눈을 돌린 건 다름 아닌 성인만화 공모전, 미국과 일본 등 세계 각국이 억대 현상금을 내걸고 여는 공모전에서 우승을 차지해 빚을 갚겠단 게 그의 계산이다. 그러나 출판사 편집국 문턱조차 넘지 못하는 그의 작품으론 역부족인 걸 실감한 정배다. 그가 스토리 작가를 모집하기까지는 이러한 사연이 자리한다.

정배 앞에 나타난 스토리 작가는 다름 아닌 다림(최강희 분)이다. 성인잡지에 섹스칼럼을 쓰다 격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쫓겨난 다림은 궁핍한 지갑 사정으로 정배의 스토리작가가 되겠다 찾아온다. 만화며 창작과 관련해선 내세울 이력이 없는 그녀지만 농익은 섹스칼럼을 써내던 솜씨로 순진무구한 정배를 구워삶고 스토리 작가 자리를 꿰찬다.

이후 둘은 서로 팀을 이뤄 여성 킬러를 주인공으로 삼은 성인만화를 만들어간다. 개연성보단 상상의 나래를 거침없이 뻗어나가는 다림의 이야기가 정배에겐 거북할 때도 적지 않지만, 만화를 보는 이들마다 빵빵 터지니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질펀하면서도 기발하고 유쾌하지만 뜨거운 이들의 만화처럼 정배와 다림의 현실 속 이야기도 좌충우돌로 흘러간다.
 
▲ 쩨쩨한 로맨스 스틸컷
ⓒ 롯데엔터테인먼트
 
몰락한 장르의 현실 속 돌아보는 그 시절

<쩨쩨한 로맨스>를 보고 있자면 한국 영화가 지난 10여 년간 다양성과 표현의 측면에선 퇴보하고 있음을 깨달을 밖에 없다. 이 영화가 담고 있는 몇몇 소재가 오늘의 영화계에선 담기지 못하리란 걸 직감하게 되기 때문이다. 때로는 누군가에게 불편을 자아내서, 또 때로는 바람직한 연애관념으로부터 벗어나 있어서, 또 때로는 적나라한 성묘사가 지나치게 느껴져서, 그밖에 온갖 이유로 오늘의 영화 가운데선 거절 당할 법한 설정이 적잖다. 200만 관객이 들고 섹스코미디로 제법 호평을 받은 이 작품이 불과 10여 년 만에 얼마나 낯선 무엇이 되었는지를 살피는 것도 저도 모르게 이 시대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관객에게 색다른 자극이 될 테다.

<쩨쩨한 로맨스>는 지난 한 주간 각종 OTT 서비스에서 때아닌 주목을 받고 있다. 예기치 않은 죽음을 맞은 배우 이선균과 그의 작품을 찾아 추모하려는 이들의 선택 때문일 테다.

2010년 초 그는 MBC 드라마 <파스타>의 대성공으로 국민적 인기를 구가하는 배우로 자리매김했고, 그 여세를 몰아 <쩨쩨한 로맨스>를 성공시키며 충무로의 주연급 배우로 거듭났다. 특히 이선균 영화인생의 기점 중 하나로, 생동감 넘치면서도 안정된 연기를 볼 수 있는 이 작품은 그의 연기를 이해하는 데 있어 빠뜨릴 수 없는 영화라 하겠다. 로맨스와 로맨틱코미디 장르에서 확고한 캐릭터를 구축하며 폭넓은 사랑을 받은 이선균의 초기작 가운데서도 그 연기의 색깔이며 매력이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어떤 귀한 것은 잃고 나서야 그 가치를 알게 된다. 어쩌면 이 배우도 그러한지 모르겠다. 한국 영화계는 너무나 소중한 배우 하나를 잃고 만 것이다.
 
▲ 쩨쩨한 로맨스 스틸컷
ⓒ 롯데엔터테인먼트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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