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찾아주지 않은 민 의병대장 전적비를 찾아주시다니…."
[박도 기자]
▲ 강원도 횡성군 강림면 월현리 주천강변에 있는 ‘의병대장 민긍호 전적비’ |
ⓒ 박도 |
자랑스러운 조상
현재 세계에는 200여 개의 나라가 있다고 한다. 그 가운데 우리 대한민국은 반 만 년의 찬란한 문화와 역사를 지닌 나라다. 이렇게 자랑스러운 나라로 그동안 존속해 온 그 까닭은 아득한 옛날부터 우리 조상들의 투철한 애국심의 발로 때문이었다. 곧 나라가 이민족으로부터 침략을 당했을 때, 이 땅의 백성들은 분연히 일어나 외적들을 물리치며 나라의 정통성을 대대손손 이어왔다.
나라가 이민족에게 국권을 빼앗기는 굴욕을 당했다가 마침내 해방이 됐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침략국에 대항하여 싸우다가 목숨을 바친 선열과 그 유가족을 보살피는 일일 것이다.
요즘 나는 인생을 마무리하면서 과연 이 나라와 사회에 무엇을 이바지하였는가?에 대한 반성으로 부끄러워 하다가 그래도 2020부터 4년 동안 해마다 민화협-롯데장학재단이 벌인 독립유공자후손 장학사업에 심사위원으로 활동한 일을 생각하면 조금은 뿌듯하다.
그동안 이 장학사업은 독립유공자 후손 150여 명에게 국내 장학재단에서 지급하는 장학금 가운데 최고의 금액인 1인당 연 600만 원의 장학금을 지급해 온 바, 국내외 장학금 수혜자들은 면학에 큰 도움이 됐다고 이구동성으로 감사한 마음을 전해왔다.
▲ 원주시 명륜동 치악체육관 옆에 세워진 ‘민긍호 의병장 기념상’ |
ⓒ 박도 |
민긍호 의병장전적비를 찾아가다
마침 장학금 지원서 서류 심시를 하는 중, 내가 귀촌하여 살고 있는 강원도 횡성, 원주 지역의 민긍호 독립유공자 후손의 자기 소개서를 읽다가 느꺼운 마음이 들었다. 그분은 구한말 조국의 운명이 풍전등화로 위태할 때 침략자 일군과 100여 차례 교전하다가 순국하신 민긍호 의병장으로 그 어른의 전적지 및 묘지, 그리고 기념 동상을 찾아 나섰다.
지난해 6월 초순, 이전에 내가 살았던 횡성군 안흥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횡성군 강림면 월현리 주천강가에 세워진 구한말 민긍호 의병대장 전적비를 찾아 갔다. 횡성읍에서 그곳으로 가는 군내버스를 타고 가는데, 도중 안흥마을을 거쳐 강림마을을 지나자 버스 안의 손님은 나 혼자만 남았다. 버스기사가 물었다.
"어르신, 어디까지 가십니까?"
"민긍호 의병장 전적비를 찾아갑니다."
"거기는 무슨 일로 가십니까?"
"참배를 겸해 현지 답사를 하고자 찾아갑니다."
"아, 네에. 참으로 장하신 일을 하십니다."
버스는 주천강을 따라 한참 달리더니 강가 어느 한적한 곳에 멈췄다.
"바로 여깁니다."
버스기사가 차를 세우고 가르쳐 주는 곳을 보자 한적한 길섶에 큰 돌덩이가 세워져 있었다. 그곳에서 내리자 때마침 뻐꾸기 소리가 구성지게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감사합니다."
관동창의대장 민긍호(閔肯鎬)는 186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897년 진위대에 입대하여 1900년에는 원주 진위대 고성분견대 정교(正校, 현 상사)로, 1901년에는 특무정교로 근무하였다. […] 민긍호 의병대는 강원도 · 충청도 · 경기도 일대에서 활약하던 이강년, 윤기영 등을 비롯한 여러 의병장들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고, 약 1천여 명을 지휘하며 횡성 · 충주 · 원주 · 여주 등지에서 100여 차례 일본군과 전투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1907년 관동창의대장으로 2천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서울 탈환작전에 참가, 삼산리전투와 처현동전투, 죽전리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1907년 겨울, 일본군은 의병대 토벌을 강화하였다. 이에 민긍호 의병대장은 의병대의 희생을 줄이기 위하여 50~60명 씩 분산시켜 일본군 공격에 대항하였다. 1908년 2월 27일 오전 11시, 강림 박달치 부근에서 일본군을 격퇴하고 그날 밤 월현리에서 숙영하였는데, 일본군경은 이 정보를 탐지, 포위 공격하였다.민긍호 의병대는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곧 탄환이 떨어져 전세가 기울었다.
그러자 민긍호 대장은 부하들을 보호하고자 일본군경에게 스스로 체포되어, 원주 일본군 수비대로 압송되는 도중, 강림5리 창말마을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그날 밤 의병대 부하 60명이 민긍호 대장을 구출하기 위해서 박달치 인근에 주둔한 일본군경을 습격한 뒤, "민긍호 대장님은 어디 있는지 그곳에서 소리를 지르라" 크게 외쳤다. 그 소리를 듣고 민 대장이 포박된 채 탈출을 시도하자 일본군은 그 자리에게 민 의병장을 사살하였다. 1908년 2월 29일, 그의 나이 43세로 장렬히 순국했다. - [찬(撰) 박찬언 제자(題字) 이병렬]
민긍호 의병장 전적비 참배를 마치자 녹음에 깃든 주천강 언저리가 더없이 아름다웠다. 마침 주천강 건너 마을의 밤나무 꽃이 흐드러지게 만개하여 그 향기가 나그네를 유혹했다. 그곳으로 건너가서 밤나무 향기를 맡으며 카메라 셔터를 한참 누르는데 마을의 한 노인장이 다가왔다.
"어떻게 이 마을에 왔소?"
"민 의병장 전적비 참배 답사하고 돌아가는 길입니다."
"아무도 찾아주지 않은 민 의병대장 전적비를 찾아주시다니, 참 고마운 선생이오. 내 집에 가서 찬 물이라도 한 잔 들고 가시오."
"감사합니다. 곧 버스가 올 시간입니다."
내가 돌다리를 건너 강 언덕으로 오르자 조금 전 군내버스가 종점에서 잠시 머문 뒤 그곳에 곧장 도착했다. 텅 빈 버스를 타고 원주로 돌아왔다.
원주시내로 돌아온 뒤 시내 봉산동에 소재한 민 의병장 묘소와 명륜동 치악체육관 옆 민 의병장 기념상을 둘러본 뒤 치악산 밑 내 글방으로 돌아왔다. 참으로 흐뭇하고 감동스러운 하루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민족화해> 제126호 (2024년 1, 2월호에도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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