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명학 연구에 생애 바친 정제두

김삼웅 2024. 1. 5. 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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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의 인물 100선 54] 정제두

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김삼웅 기자]

그 당시 주자학은 관학(官學)으로 온 천하가 주자학 일색이어서 세상에 나가 조금이라도 입에 풀칠을 하려면 주자학으로 가야 했다. 그것이 시대에 맞지 않는 줄을 알면서도 그 시대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관학인 주자학의 솜옷을 벗을 수가 없었다. 솜옷을 벗으려면 그 사회에서 매장을 당하든지 쫓겨나든지 죽을 것을 각오해야 했다.

마음 약한 그 당시의 귀족계급이 그 사회에 반항할 용기가 있을 리가 없다. 그런데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별처럼 사회와 죽음을 무릅쓰고 진리에만 매달린 한 사람이 있었으니 하곡 정제두가 바로 그 사람이다.(김용호, <정제두>, <길을 찾은 사람들>)

조선의 주자학은 퇴계가 으뜸이고 조선의 양명학은 하곡이 으뜸이라 하였다. 하곡은 정제두의 호다. 주자학이 관학을 넘어 국교처럼 굳어지고, 이에 조금이라도 이견을 말하면 사문난적으로 처단되던 시대에 그가 저항의 횃불을 들었다.

정제두(鄭齊斗,1649~1736)는 정몽주의 11대 손으로 강화도에서 태어났다. 종형이 영조의 부마 안평위였고 부인이 서인의 거두 윤선거의 종질이다. 당시 집권세력인 서인 명가출신이다.

그는 10살 무렵부터 송시열과 송준길의 문인인 이찬한·이상익 등에게 글을 배웠다. 두 사람은 주자학의 학통을 잇고 있어서 정제두 역시 주자학의 세례를 받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24살에 급제를 위한 공부를 버리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어머니의 양해를 받고서였다.

훌륭한 선대들의 가문 출신으로 두뇌가 우수한 젊은이가 세속적 출세의 길을 마다한 데는 아픈 가족사가 있었다. "20세에 겪은 아버지·할아버지·큰아버지·큰집 맏형의 큰 조카의 연이은 사망, 23살 때 겪었던 부인과 어린 아들의 사망, 그리고 자신마저 병들었던 불행과 무관하지 않다."(김교빈, <하곡 정제두>, <한국인물 유학사 3>)

그는 유학을 공부하면서 주자학이 조선사회에 끼치고 있는 병폐를 직시하였다. 그리고 대안으로 양명학을 택해 깊이 빠져들었다. 양명학이 조선에 들어온 것은 중종~명종 무렵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양명학을 받아들인 사람 가운데 한 명인 장유(張維, 1587~1638)는 <유곡안필>에서 이렇게 썼다.

중국의 학술에는 갈래가 많아서 정학(正學) 즉 유교ㅍ선학(禪學), 단학(丹學)이 있고, 또 정주학(程主學)을 배우는 자가 있으며, 육씨(陸氏)를 배우는 자도 있어, (학문하는) 길이 한 가지가 아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유식·무식을 논할 것 없이 책을 끼고 읽은 사람이라면 모두 정주를 욀 뿐이고, 다른 학문이 있다는 것은 듣지 못했다.(정인보, <양명학연론>)

정제두는 '다른 학문' 즉 양명학을 탐구하였다. 그가 읽은 왕양명의 저서 <전습록(傳習錄)>은 닳고 닳았다. 여러 해 뒤 그의 학명이 알려지면서 조정의 손길이 왔다.
공조좌랑, 평택현감, 사헌부집의, 강원도 관찰사, 중추부 사헌, 한성좌윤 등에 임명되었으나 한 번도 부임하지 않았다.

경종이 즉위하면서 대사헌, 이조판서, 성균관 제주에 임명했으나 모두 거부하고, 오로지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그동안 서울에서 살다가 안산으로 거처를 옮기고, 60살 무렵에 강화도로 들어갔다.

그의 저술은 대부분 41세 이후에 나온 것들이다. 안산생활기에 <학변(學辯)>과 <존언(存言)>의 대체적인 틀을 만들었으며, 강화생활기에 <심경집의(心經集義)>, <경학집록(經學集錄)>, <중용설> 등을 저술하였다. 그 가운데 <학변>과 <존엄>은 정제두 철학의 양명학적 성격을 잘 드러낸 저술들로서 그의 철학체계가 잘 온축되어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의 학문이 청년기의 문제제기를 통해 주자학에서 양명학으로 전환하였고, 중년기 이론체계의 수립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 냈으며, 노년기의 경학 연구를 바탕으로 자신의 관점을 가지고 사서(四書)를 비롯한 주요 경전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갔음을 알 수 있다.(윤남한, <조선시대의 양명학연구>)

그렇다고 순수학문에만 빠진 것은 아니었다. 영조가 즉위하여 우참찬으로 모시고자 했으나 이번에도 거절하자 신하를 보내 의견을 물었다. 정제두는 <탕평책>을 써서 보냈다.

오늘날 나라에 당론의 폐단이 이처럼 극심하니 이러고서 환란이 어찌 일어나지 않으리이까. 전하가 늘 탕평에 힘쓰시는 성의에 대해서는 흠양치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만약에 탕평을 하고자 하실 것 같으면 중심된 원칙을 세워야 할 것이오니 대개 공자의 시중(時中)의 도를 취하기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오나 오직 정(精)하게 하고 한결같이 하늘 중도(中道)를 이루면 천하의 대본(大本)이겠지만 편벽되게 하여 중도를 잃으면 잘못될 것이옵니다.

제갈양이 말한 바 어진 신하를 친근하게 하고 소인배를 멀리하는 것을 법으로 삼아야만 탕평하는 방법이 될 줄 아옵니다.(김흥호, 앞의 책)

그의 철학 양명학은 정후일·이광사·이광려·이광신·이건창·이건승·정원하 등 강화학파의 맥으로 이어지고, 근대에는 정인보·박은식 등이 전수하였다. 그의 유저 중 호연지기에 관한 대목이다.

호연(浩然)이란 이 기(氣)의 위대함이 긴 장이나 큰 물 같이 넓고 막힘이 없음을 말한다. 지극히 크다함은 부족함이 없음을 말하니, 부끄러움이 없기 때문에 그러하다. 지극히 굳세다함은 굽히거나 동요함이 없는 것을 말하니, 바르고 곧기 때문에 그러하다.……이 기는 스스로 돌이켜보아서 곧으면 잇게 한다.(김교빈, 앞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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