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우울제 복용해도 우울증이 좋아지지 않는다면?

김병수정신건강의학과 김병수 원장 2024. 1. 5. 0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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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수의 우울증 클리닉
클립아트코리아 제공
항우울제를 복용했는데도 우울증이 좋아지지 않는다면 이유가 뭘까? 이건 우울증 환자 탓도 아니고, 치료 실패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항우울제가 제 역할을 못하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의사의 지시에 따라 충분한 기간 동안 꾸준히, 제대로 복용했는지 확인한다. 항우울제가 효과가 있는지 알기 위해서는 2주 정도의 기간이 필요하다. 이보다 치료 반응이 빨리 나오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 이 정도의 시간이 흘러야 항우울제가 환자에게 잘 맞는지 판단할 수 있다. 우울 증상 때문에 괴로워하는 환자는 약을 먹으면 기분이 바로 좋아질 거라 기대하겠지만, 이런 현상은 일어나지 않는다. 정신과 치료에 기다림은 필수다.

최누리(가명)씨는 재발성 우울증 환자다. 재발할 때마다 항우울제를 복용하면 기분과 의욕이 호전됐다. 그런데 그녀는 증상이 좋아지면 곧바로 약을 끊어버렸다. 꾸준히 유지해서 재발을 막아야 하는데 자의로 복용을 멈춘 것이다. 의사가 약을 왜 계속 챙겨 먹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정신과 약을 먹는 건 내가 나약하다는 뜻인 것 같고, 약에 의존하기 싫어서 그랬어요”라고 답했다.

항우울제를 처방받은 환자의 30%는 치료 시작 한 달 안에 임의로 끊어버리며, 3개월이 되면 절반의 환자가 스스로 약물 복용을 중단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상황을 일컬어 ‘약물 순응도가 낮다’고 일컫는다.

우울증이 다 나은 것 같아도 계속 복용해야 하는 이유는 증상이 좋아지는 것과 뇌가 ‘회복’되는 시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증상이 좋아져서 치료가 다 된 것 같아도 뇌가 충분히 회복되려면 더 긴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속 치료가 필수다. 우울증을 여러 번 앓았던 과거력이 있다면 약물 치료를 더 길게 유지해서 재발을 방지한다. 증상이 호전된 후 좋아진 상태가 쭉 이어지게 하는 것을 ‘지속치료’라고 하며, 그 이후에도 계속 항우울제를 복용하는 것을 두고 재발 방지를 위한 ‘유지치료’라고 한다.

약물 순응도를 높이기 위한 습관을 계발하면 좋다. 약 복용 시간을 알려주는 알람을 사용하거나 약상자를 잘 보이는 곳에 두어서 투약을 잊지 않게 한다. 되도록 같은 상황(식사, 텔레비전 시청, 수면 시, 근무의 시작 혹은 마감 시)에 복용할 수 있도록 습관을 들인다. 치료 일지를 쓴다. 어떤 약을, 어느 정도의 용량으로 먹고 있는지 이에 따른 기분과 의욕의 변화는 어떠한지 일기처럼 기록해 보는 것이다. 잘 기록해서 진료 시간에 활용하면 치료에 도움이 된다.

항우울제 용량이 충분치 않아서 효과가 제대로 나타나지 않는 경우도 흔하다. 2주 정도 복용했는데 기대하는 반응이 안 나오면 증량한다. 증상이 호전되는 것에 맞춰 점진적으로 용량을 늘리는데, 필요하면 최대 사용 범위까지 올리기도 한다. 우울증 환자나 보호자는 용량이 높아지는 것을 두려워하기도 하는데, 그럴 필요는 없다. 같은 항우울제라도 환자마다 잘 맞는 용량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부작용이 괴로워서 투약을 그만두거나 용량을 줄여 먹는 환자도 있다. 치료 효과가 뚜렷한데도 부작용 때문에 약 복용을 포기하기도 한다. 입 마름, 변비, 졸음, 흐릿한 시각, 체중증가, 체중감소, 현기증, 성기능 문제 등이 흔한 부작용이다. 투약시간을 변경하여 불면이나 졸음을 줄일 수 있다. 음식과 약물을 같이 복용하면 메스꺼움 같은 부작용을 줄일 수 있다. 항우울제로 인한 경미한 부작용들 (예를 들어 두통, 미식거림, 어지러움)은 대부분 복용을 계속하는 동안 1~2주 안에 저절로 사라진다. 그런데 심각한 부작용, 예를 들어 고열, 반점, 황달, 호흡 곤란, 심장 문제(부정맥, 빈맥)와 환청, 환시, 자살 사고 등이 악화되면 즉시 주치의에게 알리고 투약 중단을 고려해야 한다.

여러 연구 결과들을 종합하면 항우울제를 사용했을 때 치료 반응을 보일 확률은 50~70% 정도다. 여기서 치료 반응이라는 용어의 뜻은 처음 있던 우울 증상이 50% 이상 개선되는 것을 말한다. 항우울제 치료 효과는 분명하지만 모든 환자에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적정 용량을 충분히 쓰고, 환자가 잘 복용했는데도 효과가 없는 사례를 일컬어 비반응(non-response)이라고 한다. 이런 상황이라도 환자와 보호자는 정신과 치료에 대한 희망을 버려선 안 된다. 항우울제를 증량하거나, 다른 약제를 추가하는 등의 다른 시도로 얼마든지 호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치료 효과가 있어서 꾸준히 잘 복용하고 있었는데도 어느 때부터 증상이 악화되는 사례도 가끔 있다. 증상의 브레이크스루(symptomatic breakthrough)라고 부른다. 환자는 항우울제에 내성이 생겨서 그런 것 아니냐, 고 의심하기도 하는데 그렇지는 않다. 항우울제는 내성이 생기지 않는다. 아무리 약을 잘 복용해도 여러 가지 이유로 우울증상이 악화될 수 있으므로 이런 경우에는 의사와 상의해서 항우울제 용량을 높이거나, 다른 항우울제와 함께 투여하거나, 아예 다른 계열로 변경해 볼 수도 있다. 

항우울제를 한 가지만 쓰는 게 아니라 두 가지 이상을 조합해서 치료하는 사례는 실제 임상에서 흔하다. 미국에서 시행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정신과 치료를 받는 환자의 59.8%가 2개 이상의 정신과 약을 처방 받으며, 3분의 1 정도는 세 가지 이상을 처방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약제 복용(polypharmacy)라고 한다. 우리나라 현실도 이와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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