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프 계획 중이라면 주목. 보디 프로필 촬영에 대한 다른 관점
팬데믹 기간에 인생 운동이라 믿었던 줌바를 잃은 뒤, 폴댄스를 시작했다. 부상과 개인 사정으로 쉬었던 시기를 빼면 운동한 기간만 벌써 2년이 넘었다. 다른 회원들과 비교했을 때 유난히 변화와 성장이 더뎠던 1년이 지나고 그나마 초·중급 동작을 따라갈 수 있게 됐을 즈음, 프로필을 찍어보자는 제안을 받았다. 어려운 폴 포즈를 보여주는 데 방점이 찍혀 있기는 하지만, 포즈를 만들어낸 몸의 라인을 보여주는 게 목적이라는 점에서 폴 프로필은 보디 프로필의 변형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찍지 않았지만, 고민은 해봤다.
고민했던 이유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고 싶다. 운동을 꾸준히 하면서 몸이 변했고, 그 몸이 마음에 들었다. 그 시기의 몸, 특히 그 모양을 눈에 보이게 남겨두고 싶었다. 보디 프로필이든 폴 프로필이든 결국은 운동으로 ‘만든’ 몸을 눈으로 볼 수 있는 이미지로 박제하고, 무엇보다 전시하고자 하는 개인의 욕망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 욕망이 보디 프로필이라는 산업을 굴러가게 한다.
운동을 통한 자기 관리가 필수 덕목으로 자리 잡은 시기에 보디 프로필 유행도 시작됐으니, 벌써 4~5년 이상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보디 프로필의 기초 장르라고 할 수 있는 헬스와 PT(퍼스널 트레이닝)의 세계에서 운동과 ‘몸매 사진’은 패키지가 된 지 오래며, 필라테스와 요가, 폴댄스, 그 외 사진 촬영이 가능한 모든 운동에 프로필 사진 찍기가 옵션으로 따라온다. 현대인이 운동하는 첫 번째 이유가 건강이라면, 인스타그램을 위시한 SNS 시대에 사진 촬영을 기반으로 한 인증의 욕구는 두 번째 이유쯤 되는 것 같다. 바야흐로 ‘오운완(오늘 운동 완료)’의 시대가 아닌가. 눈에 보이는 변화와 성취를 인증하고 기록하는 문화, 그 끝에 보디 프로필이 있다. 기본이 되는 운동에 반드시 따라와야 하는 식단, 촬영에 동원되는 스튜디오와 소품, 의상까지 묶음 판매가 가능한 보디 프로필은 몸을 준비하고 돈을 내밀면 누구나 화보를 찍을 수 있는 시대에 맞춤으로 나타난, 생각보다 더 거대한 산업이다.
단기간에 몸을 ‘만드는’ 이 산업 안에서 인생 사진을 얻어내고 싶은 개인이 어떻게 자발적으로 착취당하는지, 몸의 기능과 건강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그 과정을 거칠 경우 어떤 심각한 후유증이 찾아오는지는 이미 수많은 기사와 눈물의 후기가 알려주고 있으니 잠시 ‘건너뛰기’ 버튼을 눌러야겠다. 여기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런데도 왜 여전히 누군가에게는 보디 프로필이 버킷 리스트가 되고 새해 목표가 되는가 하는 것이다. 심지어 최초의 지향점인 건강한 육체에 반하는 방향으로 산업이 굴러가고 있으며, 어렴풋하게나마 그걸 알고 있을 텐데도 말이다. 그건 앞서 말한 대로 욕망 때문이다. 돈과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라도 눈에 보이는 성취를 획득하고 싶고,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우선하는 걸 비난할 수는 없다.
예전의 나는 왜 폴 프로필이 찍고 싶었을까? 고민이라는 단어로 뭉뚱그려 숨겨둔 당시의 상황과 감정을 더 솔직히 말하겠다. 그때 나는 지금보다 몸무게가 6kg 덜 나갔다. 폴을 잡고 몸을 끌어 올리면, 평생 가진 적 없는 등 근육이 보였다. 20대 때도 가져본 적 없는 근육이 있는 몸이 아까웠다. 비로소 눈에 보이는 근육을 갖게 된 나의 몸을 사진으로 찍어 나 자신과 타인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마흔 살에 가까워지는 시기에 이룬 나름의 성취가 아닌가? 커리어적으로 쉽지 않은 시기를 지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내 시간과 노력이 허투루 낭비되지 않았다는, 눈에 보이는 증거물을 갖고 싶었다. 그래서 고민했다.
그럼에도 결국 프로필을 찍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이 욕망과 불화하는 또 다른 내가 브레이크를 걸었기 때문이다. 내 안에는 사회적 기준으로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몸의 상태와 개인적 성취를 박제하고자 하는 욕망도 있지만, 동시에 몸을 전시하는 일이 나와 타인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아는 지성도 있다. 무엇보다 페미니스트 여성으로서의 자존심이, 몸의 모양을 과시하는 사진의 전시를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10대 여성을 대상으로 강연할 때 러네이 엥겔른의 책 〈거울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를 꼭 소개한다. 거울 앞에서 몸과 얼굴을 조각 내 품평하는 여성의 이야기는 걸 그룹 멤버들의 마른 몸을 온갖 영상에서 다각도로 비추는 동안 수많은 소녀가 ‘뼈말라’를 꿈꾸며 음식을 먹지 않는다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이미지의 힘은 얼마나 강한가. 걸 그룹, 배우, 모델, 인플루언서, 방송인의 이미지에 끊임없이 노출되면, 이들의 몸과 닮은 형태가 사회가 규정하는 아름다움이 된다. 보디 프로필이 주는 메시지 또한 보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 메시지란 바로 운동으로 만들어낸 건강한 몸이야말로 사진으로 찍어둘 만한, 드러내 보여줄 수 있는 아름다운 몸이라는 메시지다. 얼핏 보면 틀린 것 없어 보이는 이 메시지 속에는 몸 관리로 표상되는 자기 개발이 개인의 노력과 투자로 가능하다는 환상과 더불어, 특정한 형태나 무게의 몸만 아름답다는 끈질긴 편견까지 숨어 있다. 굶는 다이어트가 단백질 중심의 식단으로 바뀌었다고 해도, 새로운 기준의 아름다운 몸을 향한 욕망은 그대로 남아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몸을 평가하는 또 하나의 수치만 늘어났을 뿐이다. 고민을 안 해봤다면 모를까, 여기까지 생각해 말하고 있으면서도 등 근육을 자랑하자고 헐벗은 이미지 몇 장을 인스타그램에 더 얹을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당신의 벗은 몸을 보고 싶지 않다”고 질색하는 이들처럼 보디 프로필을 찍는 개인을 비난하거나 배척하고 싶지 않다. 그들이 왜 보디 프로필을 찍는지, 눈에 보이는 변화의 기록이 개인에게 어떤 성취감을 주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기준에서 젊고 아름다운 몸을 기록해둔다는 것이 각기 다른 의미라는 것 역시 안다. 다만 덜컥 프로필 반에 등록하고 스튜디오를 예약하기 전에 고민의 시간을 가져볼 것을 제안하고 싶다. 운동한 몸 자랑하려고 사진 좀 찍겠다는데 뭘 그렇게 생각할 게 많은지 따지고 싶다면 보디 프로필 그깟 거, 그냥 찍으면 된다. 하지만 왜 몸 사진을 남겨두고 싶은 건지 작은 의문이라도 들었다면, 이제 질문해볼 차례다. “모든 몸은 아름답다”는 구호 아래, 내게 아름다운 나의 몸을 기록하는 게 무슨 문제인가 싶다면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지, 몸이 왜 굳이 아름다워야 하는지 자신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 나에게 몸은 무엇이고 어떤 의미이며, 나와 몸의 관계는 어떤가? 보디 프로필의 유행이 스러져간 이후에도 이 질문은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지만 나 역시도 여전히 내 몸과 불화하고 있고, 복잡한 욕망을 가지치기하며 살고 있다. 여성으로 사는 나는 매일, 거울 앞에 설 때마다, 옷을 사고 또 입을 때마다, 누군가 내 몸에 대해 한마디를 얹을 때마다, 운동을 할 때마다 몸을 의식한다. 이전에는 주로 몸의 무게와 모양을 의식했다면, 운동이 생활의 일부로 자리 잡은 뒤에는 몸이 건강한지, 컨디션과 기능은 어떤지를 먼저 살피려 하지만 쉽지는 않다. 사회적 기준의 아름다운 육체 모양에 내 몸이 얼마나 부합하는지 비교하면서 다시 내 몸과 불화하게 되는 순간은 시시때때로 찾아온다.
그럴 때마다 ‘몸은 그저 몸이다’ 되뇌며 생각한다. 몸은 몸일 뿐 아름다울 필요도 없고, 어떤 의미에서는 사랑할 필요도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 언젠가는 인정하길 바란다. 나중에라도 몸을 그저 몸으로만 바라보는 날이 찾아올까? 모르겠다. 늙고 병들어가며 몸은 더욱 생생해질 텐데, 평범한 속인인 내가 그런 열반의 경지까지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대신 내 몸과의 거창할 것 없는 화해를 시도한다. 내 마음이나 생각과는 또 다른 욕망을 가진 나의 몸이 일상의 도구로서 적당히 기능한다면 그럭저럭 만족하며 손을 내민다. 나의 몸은 마음만큼이나 취약하고, 둘 다 단련하면 단단하고 강해진다. 이 과정과 변화를 기록하기에 보디 프로필보다는 아무래도 글이 낫다.
Writer_윤이나
모든 장르의 글을 쓴다. 〈미쓰윤의 알바일지〉 〈우리가 서로에게 미래가 될 테니까〉 〈라면: 지금 물 올리러 갑니다〉 〈해피 엔딩 이후에도 우리는 산다〉 와 드라마 〈알 수도 있는 사람〉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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