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르포]메가트렌드 시대‥韓, 아세안과 결합해야
AI 허브 육성 의지 밝혀
아세안 국가, 지정학적·공급망 차원 중요성 확대
시장 기반 충분해 성장 저력 발산
한국에도 지속 가능성 위한 최후의 보류
동남아 편견 버려야
말레이시아 여당 정치인 류친통 의원(투자부 차관)은 새해 첫날 산업계 최고 관계자들이 집결한 신산업 마스터플랜(NIMP 2030) 회의 자리에서 "반도체 산업은 우리 조국의 새로운 석유(new oil)"라고 선언했다.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는 주로 반도체 조립과 패키징 등 후공정 분야에서 오랜 기간 실력을 갈고닦아왔는데, 이제는 디자인과 설계 등 첨단 분야에도 본격적인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말레이시아는 영국 식민지였던 덕에 영어 소통이 비교적 원활한 이점이 있다. 데이터 및 생산관리가 수월해 다국적 기업들이 선호하고, 값싸고 편안한 환경을 원하는 고학력 인재들이 몰리고 있어 상당한 성장이 기대된다.
지난달엔 미국의 반도체 거물인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가 연이어 동남아를 방문했다. 그는 베트남에서는 "이곳을 (대만에 이은) 제2의 거점으로 삼겠다"는 담대한 구상을 선보이기도 했다. 말레이시아 방문에서는 잠재적 인공지능(AI) 허브로 육성하기 위해 협력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고 했고 싱가포르에서도 AI 육성을 위한 협력을 거론했다. 이는 시진핑의 중국이 구조개혁 늪에 빠진 동안 전 세계가 새로운 공급망으로 동남아를 주목하고 있다는 증거다.
◇‘동남아 편견’ 버릴 때‥ 젊은 인구의 힘= 동남아시아는 한국인에게 여전히 ‘저개발’과 ‘비민주화’라는 두 개의 결정적 약점을 지닌 만년 개발도상국으로 각인됐다. 한국 기업은 오랜 기간 저렴한 인건비와 풍부한 천연자원을 목표로 동남아 진출을 시도했을 뿐 기업의 미래 발전을 위한 투자라는 인식이 부족했다.
동남아의 오랜 부패와 빈부 격차는 경제 발전의 걸림돌이 되어왔다. 하지만 이 같은 아세안(동남아시아국가연합)에 대한 고정 관념도 서서히 변곡점을 지나고 있다. 아세안이 가진 남다른 장점이 한국에선 쉽게 얻기 힘든 독특하고 고유한 영역에 놓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한국이 아세안의 장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제기된다. 특히 전 세계를 추동하는 거대하고 혁신적인 변화, 즉 ‘메가트렌드’에 한국과 아세안이 결합해야 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특히 인구 통계적, 대도시화, 지속가능성, 성장 중심 등의 흐름에 주목해야 한다.
인구 문제, 즉 급속한 고령화와 신생아수 감소는 한국의 최대 위협이다. 이대로 가다간 대학과 같은 고등교육기관과 지방 상업지구의 몰락을 피하기 어렵다. 이와 반대로 인구가 7억명을 향해 나아가는 동남아 지역은 여전히 젊고 활력이 넘친다. 물론 어느 정도의 고령화는 피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태국은 이 지역에서 인구 고령화가 가장 심한 국가인데 2036년까지 최대 30%가 70대 이상의 노인이 될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이다.
베트남과 인도네시아는 인구 가운데 절반 가까이가 서른 살 이하로 미래 성장성이 더 기대된다. 과거 이러한 인구는 빈곤과 직결되었다면 이제는 고도로 무선통신과 AI 기술이 더해진 스마트 환경의 세례를 받고, 나아가 지정학적 이점까지 극대화해 해외 투자에서도 뚜렷한 성과를 이끌어 낸다. 과거엔 한국으로 결혼이민 혹은 노동자 파견에 그쳤다면, 장기적으로는 고학력 엘리트에 대한 장기거주(영주권)의 문화를 확산시켜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는 배경이다.
◇빠른 대도시화… 확고한 ‘지속가능성’= 동남아는 대개 대도시 중심 사회다. 전 세계 해외 관광객 1위 방콕을 필두로, 자카르타, 호찌민, 쿠알라룸푸르, 싱가포르, 마닐라 등 인구 1000만명의 대도시가 있다. 아세안은 2030년까지 이 같은 메가시티가 모두 43개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빠른 도시화로 인해 기술과 기반시설을 더 많이 필요로 한다.
이로 인해 예상되는 신산업과 무궁무진한 투자 기회가 뒤따를 것이란 게 분석기관들의 한결같은 예측이다. 5G 기반의 통신네트워크는 물론 지속가능한 대중교통 시스템, 식수와 하수처리 시스템, 도시 농업 등이 대표적이다. 뿐만 아니라 도서관, 박물관, 스마트시티 등 대도시에 필수적인 생활 문화 인프라 역시 한국이 가진 장점을 활용할 분야다. 동남아 대부분의 국가가 ‘한류’로 촉발된 한국에 대한 관심 덕분에 우리가 겪은 대도시화의 노하우와 기술을 수출하기에 가장 적합한 지역이 될 수 있다.
땅이 크고 자연의 힘이 거대한 동남아는 최첨단과 낙후성이 동시에 존재한다. 그로 인해 오히려 한국인이 둔감하기 쉬운 ‘기후변화’ 주제에 있어서는 진지하고 구체적인 규제와 실천 방안을 강구 중이다. 아세안 회원국 모두가 기후 변화의 위험과 적극적 행동의 필요성을 공감했다는 얘기다. 과거 천연자원을 외국에 빼앗겼던 아픈 경험과 동시에 바다로 인접한 해양 국가들이 많은 자연환경이 영향을 끼쳤다고 분석한다. 또 기업 단위에선 세계적 트렌드인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에 특히 관심이 뜨겁다.
싱가포르는 글로벌 탄소배출권 시장에 선제적인 투자로 ‘탄소 거래’ 시장의 강자가 되었으며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는 해양 환경 보호에 세계적인 관심을 촉구하고 나섰다. 베트남은 중국보다 더 빠르게 자국의 오토바이를 전기차로 바꿀 계획을 뚝심 있게 밀고 나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뼛속 깊은 지속가능성은 아세안의 핵심 경쟁 우위"라고 진단한다. 이러한 자연의 힘을 갖춘 아세안과 힘을 합쳐야 한국의 미래경쟁력도 확보된다는 얘기다.
◇2024년은 회복기= 지난해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금리 인상과 중국 경제 부진으로 아시아 경제는 큰 타격을 입었다. 특히 싱가포르, 베트남, 말레이시아, 태국과 같은 수출중심 국가들에 후폭풍이 있었다. 아세안 각국은 부동산 경기가 크게 후퇴하는 등 타격을 입었고 예상 경제 성장률을 크게 낮춰야 했다. 아시아개발은행(ADB)은 올해 동남아시아의 국내총생산(GDP)이 지난해 9월 전망치인 4.6%보다 낮은 4.3% 성장할 것으로 예상했다. 아직은 회복하는 와중이라는 얘기다. 그래도 전 세계에서 이 정도의 성장 수치를 가진 지역은 아세안이 유일한 상황이다. 장기 저성장의 늪에 빠진 한국은 아세안이라는 동아줄을 잡아야 한다. 지속가능성을 위한 최후의 보루인 셈이다.
정호재 고려대 아세안센터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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