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화가의 모델이란 이유로... 교회가 한 소녀에게 벌인 짓
[김성호 기자]
역사와 관해 가장 유명한 격언은 역시 이것이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역사가 에드워드 카의 문장 말이다. 카가 쓴 역사철학 서적 <역사란 무엇인가>에 등장하는 문장으로, 원문을 옮기자면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 사이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다(History is a continuous process of interaction between the historian and his facts, an unending dialogue between the present and the past)'라는 글이 되겠다.
요컨대 역사는 과거 일어난 사실에 멈춰 있지 않는다. 현재를 살아가는 역사가, 즉 역사를 다루는 이의 손에서 새롭게 해석된다. 한때는 영예로웠던 사실이 오욕의 역사로 전락하기도 하고, 또 한때는 참담한 비극이 명예로운 과거로 재평가되기도 한다.
과거의 사실을 끄집어내어 오늘의 시각으로 다루는 것이 역사라면, 영화 또한 역사를 향유하는 한 가지 방법일 테다. 수많은 사극이 폭넓게 사랑받는 것도, 역사에 새로운 시각을 입혀낸 작품이 끊이지 않고 만들어지는 것도 영화와 역사의 남다른 상관관계를 보여준다.
▲ 고야의 유령 포스터 |
ⓒ 부귀영화 |
영화와 역사의 절묘한 교감
그런 그가 18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는 스페인의 격동의 시기를 한 편의 영화로 만드니, 그 작품이 바로 <고야의 유령>이다. 아는 사람은 알겠으나 프란시스코 고야라 하면 파블로 피카소와 함께 스페인 역사가 자랑하는 대표적 화가다. 낭만주의 화가이자 판화가이며 궁정화가이고 기록화가로 다채로운 작품을 남겼다. 특히 궁정화가의 정체성을 가졌음에도 고전 화풍에서 탈피해 스페인 근세의 다양한 현실을 작품 가운데 담아내니, 그것이 그대로 당시 세태를 알 수 있는 하나의 사료가 되었다 해도 무방할 정도다.
고야가 살아간 시대는 스페인의 격동기다. 대항해시대 무적함대를 거느리며 전 유럽을 호령한 전성기가 저물고 시대는 영국과 프랑스가 주도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베리아 반도 안에 갇힌 스페인은 영국과 프랑스가 주도하는 기술발전에 크게 뒤처졌고, 왕정과 종교라는 구시대의 유물을 붙들고 현상을 유지하기 급급했다.
이 시기 거듭된 전란과 가중한 세금으로 프랑스에선 대혁명이 일어나 루이 16세가 단두대에서 목이 잘렸고, 또 얼마 뒤 권력을 잡은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은 자유를 구실로 스페인은 물론 유럽 전역을 휩쓸기에 이른 것이다. 특히 프랑스 군대는 왕정과 종교의 구태의연함에 반기를 들고 민중에게 나름의 지지를 끌어 모았는데, 당대 스페인이 꼭 그와 같은 구태의연하고 쇠락한 국가였다.
영화는 왕실의 무관심과 교회의 무도함에 의해 망가지는 개인의 삶을 그린다. 영화는 스페인 가톨릭 교회의 회의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당시 스페인 서점가에는 종교와 권력의 무도함을 풍자하는 책자와 그림책이 인기리에 팔려나가고 있었다. 몇몇 신부는 이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풍자하는 그림을 그린 화가 고야를 재판에 회부해야 하는 게 아니냐고 주장한다. 이때 그들을 가로막는 이가 있으니 바로 로렌조 신부(하비에르 바르뎀 분)다.
▲ 고야의 유령 스틸컷 |
ⓒ 부귀영화 |
로렌조는 고야가 스페인 최고의 화가임을 들어 그를 처벌해선 안 된다고 말한다. 대신 그가 그린 그림에 나온 사람들, 신을 모르고 저항하는 이들을 찾아 본보기를 보여야 한다고 말이다. 기실 이베리아 반도는 소위 마녀사냥이라 불리는 종교에 적대하는 이들의 본보기식 처벌이 횡행해온 곳으로, 18세기 후반이라고는 해도 그 폐해가 완전히 사라졌다고는 할 수 없는 시기다. 그러나 로렌조는 과거 행해졌고 이제는 줄어든 고문이며 화형을 부활시켜 신이 존재함의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고 강변한다.
결국 그의 말은 받아들여지고, 그는 시중에서 신을 믿지 않는 이들을 가려내는 작업에 착수한다. 그로부터 그의 부하들은 은밀하게 술집과 저잣거리를 드나들며 유태인과 신교도를 색출하기 시작한다.
그때 그의 눈에 든 사람이 하나 있다. 다름 아닌 부유한 상인 토마스(호세 루이스 고메즈 분)의 딸, 이녜스(나탈리 포트만 분)다. 어여쁜 용모를 지닌 그녀는 고야가 그리는 그림들의 모델이 되어 때로는 성당 벽화의 천사이고, 초상화의 주인공이 되고는 하였는데, 그 모습을 로렌조는 아니꼽게 본 것이다. 특히 화가의 모델은 창녀들이 한다거나, 저잣거리의 그림을 그리는 건 악마의 재주라는 둥의 편견이 로렌조를 부추긴다.
그렇게 이녜스 앞으로 한 장의 문서가 날아든다. 다름 아닌 종교재판소 소환장으로, 이걸 받아 성당에 들어서면 제 발로 나오는 이가 많지 않다던 무서운 서류다. 자연히 토마스의 집안도 발칵 뒤집어지지만 지엄한 법이 있으니 이녜스를 보낼 밖에 다른 방도가 없다.
▲ 고야의 유령 스틸컷 |
ⓒ 부귀영화 |
그러나 이녜스는 돌아오지 않고, 집안사람들의 걱정도 커져만 간다. 그럴 밖에 없는 것이 종교재판소가 이녜스를 불러 하는 심문이란 건 처음부터 짜맞춰진 각본에 따라 그녀의 죄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던 터다. 시작부터 고문을 당한 이녜스는 제가 은밀히 유대교리를 따라왔음을 고백하게 되고 그 자백으로 유죄의 몸이 되고 만다.
영화의 백미 중 하나는 딸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던 토마스가 로렌조의 초상을 그리던 고야를 통해 로렌조를 집으로 초청해 맞는 순간이다. 겉으로는 화기애애하지만 속으로는 애가 타는 이녜스의 가족들 앞에서 로렌조는 그녀가 제 죄상을 자백했음을, 유일한 증거는 심문을 통해 얻은 그 자백임을 말한다. 그러나 심문이 고문임을 당대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일, 어린 여자아이에게 고문을 통해 이교도라는 자백을 받았다니 로렌조를 제외한 그 자리의 모든 이들이 분노케 되는 것이다.
바로 이때, 산전수전 다 겪은 사업가 토마스가 결단을 내린다. 고문 앞에선 누구나 제 생각과 다른 답을 내놓을 수 있다며 로렌조와 논쟁을 시작하고, 어떠한 경우에도 신이 거짓을 말하지 않도록 지켜주리라는 로렌조의 주장을 깨부수려 시도하는 것이다. 그 방법은 다름아닌 고문이다. 그는 로렌조를 묶어 고문하기 시작하고, 마침내 로렌조가 원숭이라는 모욕적인 서류에 서명을 받아낸 뒤 그를 풀어준다. 그리고는 그에게 큰돈을 들려서 교회로 돌아가 딸을 풀어주라고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서명 받은 서류를 온 세상에 알리겠단 협박이 뒤따른다.
그러나 교회는 그리 만만하지 않다. 로렌조 신부 하나야 협박으로 돌려세울 수 있었으나 그가 가져간 돈만 받을 뿐 자백한 죄인을 풀어주면 교회가 저들의 잘못을 시인하는 꼴이 된다며 석방을 거절한 것이다. 이에 로렌조가 서명한 서류를 공개해 망신을 주었으나 교회는 도리어 로렌조까지 신을 버린 죄인으로 뒤쫓기 시작한다.
▲ 고야의 유령 스틸컷 |
ⓒ 부귀영화 |
영화는 신의 이름으로 인간을 해하는 당대 교회의 만행을 고발한다. 그 안에는 로렌조와 같은 광신자가 끝없이 양산되는 구조가 있고, 제 잘못을 시인하지 않기 위하여 더 큰 잘못을 거듭하는 교회와 같은 존재도 있다. 심지어는 모든 사실을 보고받고도 분란을 피하기 위해 조치하지 않는 국왕이 있으며, 그리하여 어두운 감옥에서 고문을 받고 겁탈을 당해 미쳐가는 죄 없는 어린 여자아이를 누구도 돌볼 수 없게 되고 만다.
이야기는 그로부터 30년의 세월을 훌쩍 건너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침탈하고 종교재판소를 폐지하는 모습을, 또 영국군이 다시 스페인을 수복하여 종교재판소를 재건하고 과거의 질서를 복원하는 과정을 관찰자인 고야의 시선으로 그린다. 자유를 표방하지만 실은 총칼을 든 침탈자일 뿐인 나폴레옹과 그를 물리쳤으나 새로운 질서를 세우지 못하는 영국 사이에서 고야는 인간과 권력을 추종하는 이를 혐오하게 될 뿐이다.
모두가 아는 것처럼 이녜스의 불행은 그저 이녜스의 불행만이 아니다. 권력을 쥔 자들이 저를 위하여 공권력을 사유화하고, 수사권을 제 마음대로 휘둘러 죄 없는 이들까지 죄인으로 만드는 모습을 우리는 불과 70여 년의 역사 가운데 수없이 목격했던 것이다. 거기엔 간첩이며 중범죄자로 조작된 힘없는 양민들이 수도 없이 있어서 대중은 한국의 법치가 유전무죄요 무전유죄라는 조롱까지 만들어냈던 일이다.
누군가는 역사가 반복된다 하고, 또 누구는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며 진보하는 것이라 말한다. 그 사이 어딘가에 진실이 있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의 역할 또한 명백할 밖에 없다. 진보를 향해 끝없이 사회를 밀어 올리는 개인, 끝끝내 흐려지지 않았던 고야의 시선처럼 할 수 있는 한 매서운 눈초리로 세상과 권력을 감시하는 일이 우리의 몫이 아닐까.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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