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보다 이상향 따라... 더 뚜렷하게 살기로 결심했다

우연주 2024. 1. 4.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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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김승옥 작가의 <무진기행> 소설이 내게 남긴 뜻밖의 효과

[우연주 기자]

▲ 무진기행 표지 무진기행 표지
ⓒ 민음사
 

직장에 치일 땐 책을 오래 읽기가 힘들다. 그래서 짧은 단편을 고르게 된다. 김승옥의 <무진기행>도 그런 이유에서 골랐는데, 예상외로 읽고 나서 너무 행복했다. 돌이켜보니 <무진기행>은 고등학생 때 언어영역 공부하면서 그렇게 많이 접했지만, 한 번도 완전하게 읽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거의 이십여 년이 다 되어서야 처음 읽어본 것이었다. 우리나라에도 좋은 현대 소설이 많은데 너무 외국소설만 가까이 한 것 같아 부끄러워졌다. 앞으로 더 많이 찾아 읽어야겠다.

'무진'은 실제로는 없는 지명이다. 김승옥 작가의 고향인 전남 순천을 모델로 한 곳이라고 한다. 네이버 국어사전에 안개는 지표면 가까이에 아주 작은 물방울이 부옇게 떠 있는 현상을 뜻한다고 나와있다. 무진은 바다가 근처에 있지만 항구로 발전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고 그렇다고 농사를 짓고 살 수 있게 평야가 발달한 곳도 아니다. 그저 무진의 명산물이라면 '안개'라고 하는 정도이다. 작가는 왜 무진이라는 곳을 안개가 뿌연 곳으로 설정했을까? 이 소설을 두 번 읽고 생각해 보니, 아마 우리의 인생이 안개처럼 뚜렷하지 않고 희미하다는 것을 말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소설 속 주인공 윤희중은 동거하던 여자와 헤어지고 돈 많고 배경 좋은 과부와 결혼해서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다. 승진을 앞두고 장인어른과 아내가 잠시 고향에 다녀오라고 해서 버스를 타고 달려 무진에 와서 옛사람들을 만난다. 교편을 잡고 있는 '박'이라고는 하는 무진중학교 후배와 고등고시에 패스해서 세무서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동창생 '조', '하인숙'이라는 음악 교사를 차례차례 만난다.

하인숙을 좋아하는 박, 하인숙을 결혼 상대 중 한 명으로 생각하는 조, 잠깐 사랑에 빠지고 마는 윤희중과 하인숙. 1964년에 발표된 소설에, 현대에나 있을 법한 결혼과 사랑을 둘러싼 온갖 잡음과 속물적인 이야기가 오고 가는 것에 놀랐다. 문학 속에서도 우리 삶이 반복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개 속 남성(자료사진).
ⓒ 픽사베이
 
하인숙과 하룻밤을 보낸 윤희중은 결국 서울로 데려가겠다는 약속을 저버리고 무진을 떠난다. 그는 무진을 떠나는 버스 차창 밖으로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적혀 있는 팻말을 본다. 윤희중을 믿었던 하인숙에 대한 안타까움이 느껴지기도 하고 잠깐 바람을 핀 윤희중이 다소 역겹기도 하고 결혼을 사랑으로 하는 게 아닌 속물적으로 계산하는 조에 씁쓸하기도 하다.

나아가 작가는 이런 뚜렷하지 않은 삶과 사랑의 실체들을, 무진을 둘러싼 안개로 덮어버리려고 했던 게 아닌가 싶다. 아마 윤희중은 서울로 돌아가서 아내와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을 살아가며 성공을 향해 나아가며 과거는 잊어버릴 것이다. 하인숙에게 썼던 편지를 찢어버렸듯이...

이상과 현실, 당신이 둘 중 택해야 한다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삶의 고뇌와 허무 속에서 지루한 일상을 살아가는 게 아닐까. 윤희중은 가슴 떨리던 사랑을 포기하고 결국 현실을 택했다, 그게 정말 사랑이었는지도 의문이지만. 소설이 김승옥 작가의 자전적 경험이 바탕이 된 것인지 문득 궁금해졌다. 나도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용솟음쳤다. 만약 나라면, 이상과 현실 속에서 현실을 택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상을 부여잡으며 현실도 아주 사랑이 충만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이야기를 써볼 것 같다.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결혼 후 이야기 같은.

꿈이 너무 큰 것일까? 이러한 점이 소설 속 윤희중과 나의 공통점 같다. 공상을 정말 많이 한다는 점 말이다. 나는 내 작가적 재능이 풍부하다고 느끼고, 그래서 더 작가가 하고 싶다. 작가가 고향인 순천을 배경으로 <무진기행>을 쓴 것처럼 나는 내가 20대 중반에 살았던 경북 영양을 배경으로 써보고 싶다. 소설 속의 개구리울음소리와 쏟아지는 밤하늘의 별 같은 청각적, 시각적 묘사를 보며 딱 그때가 떠올랐다. 

<무진기행>은 안개를 소재로 해 이상과 꿈이 안개에 갇혀버리는 쓸쓸한 이미지를 연상시키지만, 내게는 오히려 반대의 효과를 냈다. 뿌연 안개와는 달리 앞으로 좀 더 밝고 뚜렷한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해 준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현실에 치여 사랑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내 인생을 현실에 저당 잡히지 않을 것이라는 결심으로 이어졌다. 오랜만에 아주 즐거웠다, 이제 작가의 다른 소설도 읽어볼 참이다. 

덧붙이는 글 | 브런치 https://brunch.co.kr/@lizzie0220/659 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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