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신·앨리스 현…잊혀진 여성 독립운동가의 삶이 연극 무대로
광복 80년이 다 되어가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여성 독립운동가는 유관순(1902~1920) 열사 한 명뿐이다. 학교에 다닐 때 국사 교과서에서 유관순 열사밖에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남성 독립운동가 못지않게 수많은 여성 독립운동가가 있었다.
여성 독립운동가는 독립운동 초기엔 남성을 보좌하는 역할에 머물렀지만 3.1운동을 계기로 남성 못지않은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됐다. 신교육을 받은 여성이 증가한 데다 일제의 탄압으로 항일의식이 커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2023년까지 독립운동을 인정받은 독립유공자 1만7915명 가운데 여성은 3.68%인 660명에 불과하다. 1962년 남자현·김마리아·안경신·유관순·이애라 등 5명의 서훈부터 시작돼 1960년대 10명, 1970년대 3명, 1980년대 1명으로 극히 소수만 인정받았다. 그러다가 광복 50주년을 기해 그 수가 늘어나 1990년대 147명, 2000년대 44명, 2010년대 267명, 2020년대 188명이 인정받았다.
여성 독립유공자가 적은 이유는 기록 부족과 함께 그동안 남성 중심적인 보훈 정책 때문에 여성의 역할이 과소평가된 탓이다. 그나마 2010년대 이후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관심이 증가한 데는 광복 70주년이던 2015년 개봉한 영화 ‘암살’의 역할이 컸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이하 예술위) ‘2023 창작산실-올해의 신작’에서 공교롭게도 여성 독립운동가를 모델로 한 연극 2편이 나란히 올라간다. 임신한 몸으로 평안남도 도청 폭탄 투척 의거에 가담한 안경신(1888~?)을 다룬 ‘언덕의 바리’와 제1호 하와이 출생 한국인으로 남한에서 추방되고 북한에서 간첩으로 몰려죽은 앨리스 현(1903~1956)을 그린 ‘아들에게 (부제:미옥, 앨리스 현)’다.
오는 6~14일 서울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무대에 오르는 프로젝트 내친김에와 극단 동이 공동제작한 ‘언덕의 바리’는 고연옥 작가-김정 연출가 콤비의 네 번째 작품이다. 두 사람은 지난 2017년 연극 ‘손님들’로 그해 국내 연극상을 휩쓴 이후 ‘처의 감각’(2018년) ‘인간이든 신이든’(2021년)에서 잇따라 합을 맞추며 밀도를 더해왔다.
이번 작품의 주인공 안경신은 평안남도 대동 출신으로 1919년 평양에서 3.1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가 구금됐다. 이후 대한애국부인회 소속으로 상하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전달하다가 중국으로 망명했다. 임시정부 직할 대한광복군총영에 소속된 그는 1920년 7~8월 중 미국의원 시찰단 방문 시 세계 여론에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호소하기 위해 국내 폭탄 거사에 참가했다. 안경신 등 광복군총영 대원들과 평양 지역 의용대원들은 1920년 8월 3일 밤 평남도청 건물 일부를 파괴했다.
놀라운 것은 의거 당시 폭탄을 운반한 안경신이 홑몸이 아닌 임신 상태였다는 것이다. 8개월 만에 일본 경찰에 체포된 안경신은 해산한지 얼마 안 된 상태로 아기와 함께 투옥됐다. 안타깝게도 아기는 시각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 그리고 10년 형기 중 7년을 채우고 가출소한 이후 안경신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았다.
고연옥 극작가는 ‘사진 한 장 없는 독립운동가’ 안경신의 삶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가 안경신처럼 힘든 상황에서도 싸움을 포기하지 않은 민중의 삶과 죽음으로부터 비롯됐다고 생각해서다. 다만 희곡을 처음 쓸 때 없었던 것으로 알려진 안경신의 사진이 1927년 조선일보에 실려 있는 것이 2021년 대학원생의 석사논문으로 밝혀졌고, 이런 사실을 지난해 공연 연습 시작 직후 알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사진 한 장 없었던 것 자체가 지금 안경신을 이야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번 작품은 독립운동가로서 안경신의 영웅적인 모습 대신 나약한 인간적 모습에 초점을 둔다.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 안경신의 삶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며 고난을 헤쳐가는 신화 속 바리데기(바리 공주)와 일맥상통한다. 3일 서울 대학로 예술가의집에서 만난 김정 연출가는 “대본을 처음 받았을 때 ‘안경신이 출소한 뒤 장님이 된 아들과 만나 세상에서 사라졌다’는 지점이 흥미로웠다. 사라진 안경신은 사회 속으로 녹아들어 굉장히 많은 수로 흩어져 우리에게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본다”면서 “이번 작품은 고연옥 선생님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주인공을 동시대 문제적 인물로 해석하고 재탄생시켰다”고 설명했다.
오는 13~21일 서울 아르코예술극장에서 공연되는 ‘아들에게(부제: 미옥, 앨리스 현)’는 극단 미인에서 구두리가 쓰고 김수희가 연출했다. 구두리는 김수희가 지난해부터 극작가로 활동할 때 사용하는 필명이다. 이 작품은 지난 2021년 극단 미인이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 중장기창작지원사업으로 제작한 낭독공연 ‘미옥, 앨리스 현’을 수정보완한 것이다.
작품의 주인공 앨리스 현(한국 이름 현미옥)은 상하이 임시정부 설립에 기여했으며 주미 전권대사로 활동한 독립운동가 현순(1880~1968) 목사의 맏딸이다. 하와이에서 태어난 최초의 코리안 아메리칸인 앨리스 현은 이화여대를 다니다가 1920년 아버지가 있던 상하이로 떠났다. 상하이에서 그는 아버지를 통해 좌익 독립운동가인 박헌영과 친하게 지냈다.
재일 유학생과의 짧은 결혼 생활 이후 하와이로 돌아간 그는 아들 웰링턴 정을 낳고 대학에서 공부했다. 미국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펼치던 그는 해방 이후 귀국해 미군 통역관으로도 일했다. 하지만 조선공산당을 이끄는 박헌영 등과 자주 만난 탓에 공산주의자로 찍혀 미국으로 추방됐다. 미국에서 박헌영이 북한 부수상 겸 외무상이 됐다는 보도를 본 그는 1949년 아들이 의사로 일하던 체코를 거쳐 북한으로 들어갔다. 북한이 혁명의 이념을 실현할 조국이라고 생각해 자신의 의지로 찾아간 것이다.
하지만 김일성이 박헌영 등 남로당 계열을 숙청하면서 그 역시 ‘미국의 스파이’로 몰려 처형됐다. 북한에서 박헌영을 공화국 전복 혐의로 사형 판결을 내릴 때 그에게 상하이 시절 박헌영의 첫 애인이라고 썼기 때문에 그는 오랫동안 ‘한국판 마타하리’로 불렸다. 다만 최근 연구는 그와 박헌영이 사랑하는 사이였다는 기존 관점에 의문을 제기한다.
3일 예술가의 집에서 만난 김수희 연출가는 “극단 미인이 예술위 중장기 지원을 받았을 때 연구 주제 가운데 하나가 여성이었다. 여성 독립운동가들에 대해 공부하던 중 앨리스 현을 우연히 발견했다”면서 “남북한과 미국의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경계인이었던 그의 삶이 너무나 흥미로웠다”며 극작 배경을 밝혔다.
연극 ‘아들에게’는 끝없이 자신의 의지로 수많은 길을 떠났던 앨리스 현을 기자가 인터뷰하는 형식으로 이뤄져 있다. 앨리스 현의 삶을 들여다보며 그를 열정적으로 움직이게 만들었던 동력을 살펴본다. 여전히 논란이 되는 그와 박헌영의 관계에 대해 김수희 연출가는 “그 부분이 정말 묘하다. 극 중에서 둘이 만나는 장면들이 여러 차례 나오는데, 둘의 관계에 대한 판단은 관객에게 맡기겠다”고 밝혔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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