셔츠 단추 풀더니 의자 위 올라갔다…'여의도 사투리' 익히는 한동훈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빠르게 여의도 정치에 녹아들고 있다.
한 위원장은 3일 오후 대한노인회를 찾아 “비대위 출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마음을 아프게 해드린 점은 전부 제 책임”이라며 “앞으로 당 구성원 모두 마음을 가다듬고 언행을 신중하게 하겠다. 어르신들께 정말 더 잘하겠다”고 말했다. 최근 자진 사퇴한 민경우 전 비대위원의 ‘노인 비하’ 발언에 대한 사과였다.
앞서 한 위원장은 노인 비하 논란이 불거지자 비대위 출범 당일인 지난달 29일 김호일 노인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사과했다. 김호일 노인회장은 “(노인 비하 논란을 일으켰던) 민주당 김은경 전 혁신위원장은 3~4일 만에 (사과하러) 왔는데, 한 위원장은 신속하게 대응했다”며 “국민의힘이 희망이 좀 있겠다는 느낌이 든다”고 화답했다. 당내에선 “한 위원장이 정치 참여 이후 사실상 처음으로 맞닥뜨린 위기 상황을 민첩한 대응으로 재빨리 돌파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전날 피습당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에 대한 한 위원장의 태도도 눈에 띈다. 이날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신년인사회에 참석한 한 위원장은 “우리 국민의힘은 모든 폭력을 강력하게 반대할 뿐 아니라 진영과 상관없이 피해자의 편에 서서 행동하는 사람들”이라며 “우리 국민의힘과 지지자들 모두 같은 마음으로 이재명 대표의 쾌유를 기원한다”고 말했다. 전날엔 이 대표 피습 소식이 전해지자 예정에 없던 기자간담회를 자처했고, 당 지지자들 사이의 잇따른 음모론엔 “제가 피습당했을 때처럼 생각해 달라”며 자제를 요청했다.
국민의힘 관계자는 “한 위원장이 그간 ‘반(反) 이재명’ 식의 대야 강경발언을 쏟아낸 탓에 야당과의 관계 설정에 대한 우려가 컸던 게 사실”이라며 “최근 민주당을 방문했을 때도 한 위원장이 ‘고개만 까딱’하지 않을까 우려했는데, 정중하게 인사하는 모습에 다들 적잖이 놀랐다”고 말했다.
전날 첫 지방 일정에 나선 한 위원장의 언행도 화제였다. 한 위원장은 대구 엑스코에서 열린 대구ㆍ경북(TK) 지역 당 신년인사회에 참석해 “대구는 저의 정치적 출생지 같은 곳”이라고 말했다. '정치적 출생지'란 표현은 전형적인 정치인의 언어다. “한 위원장이 빠르게 여의도 사투리를 익혀가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보수 텃밭으로 꼽히는 대구를 정치적 고향으로 규정한 것을 두고선 여러 포석이 깔린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한 위원장은 “‘국민의힘이 대구ㆍ경북에 정체되거나 매몰되면 안 된다’는 말이 많은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며 “대구ㆍ경북은 우리 당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사람들이 정말 어려울 때 끝까지 우리를 지켜준 기둥”이란 말도 했다.
김병민 전 최고위원은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보수의 심장이라고 하는 대구 지역의 당 지지율조차 녹록지 않았다”며 “한 위원장이 보수 결집을 위한 선언적 메시지를 낸 것으로, 대구 지역에 있는 많은 당원에게 울림이 있는 메시지였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영남지역의 초선 의원은 “박근혜 전 대통령 특검에 참여한 이력에다, 충북 청주ㆍ서울에서 나고 자란 탓에 보수 텃밭의 기반이 약하다는 게 한 위원장의 약점으로 꼽혀왔다”며 “이를 일정 부분 만회할 수 있는 메시지였다”고 평가했다.
행동도 달라졌다. 한 위원장은 대구ㆍ경북 신년인사회 내빈 소개 당시 갑자기 의자에 올라가 청중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인파가 몰린 탓에 뒤에 선 당원들에게 자신의 얼굴이 보이지 않을 것을 고려한 행동으로 보였다. 옆에 선 김형동 비서실장이 잠시 놀란 듯 입을 벌리는 모습이 방송 카메라에 포착되기도 했다. 앉은 자리에서 매고 있던 붉은 넥타이를 푼 뒤 셔츠 윗단추를 하나 풀었다.
앞서 같은 날 오전에 참석한 대전시당 신년인사회에선 “제가 50년 살아오면서 제일 안 해본 게 건배 제의”라며 “저는 술을 안 한다. 그런데 오늘은 건배를 하겠다. 제가 ‘대전ㆍ충남ㆍ세종’을 외치면 ‘승리합시다’라고 해달라”고 말했다. 그러고선 쑥스러운 듯 “이렇게 하는 거 맞아요? 평생 안 해봐서”라고 덧붙였다. 한 위원장을 오래 알고 지낸 복수의 법조인들은 한목소리로 “평소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라고 했다. 행사에 참석했던 인사는 “대중 친화력이 떨어질 것이란 당내 우려가 일순간 불식된 장면”으로 평가했다.
이같은 한 위원장의 행보와 달리 국민의힘은 폐쇄성이 짙은 ‘서초동 스타일’로 변모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보안을 강조하는 모습이 눈에 띈다. 한 위원장 취임 이후 새로 인선한 장동혁 사무총장(판사)과 김형동 비서실장(변호사)은 모두 보안을 중시하는 법조인 출신이다. 또 비대위원장실 사무를 총괄하는 서승혜 국장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문위원 등을 지냈다.
국민의힘의 대 언론관계도 경직되는 모습이다. 지난달 26일 한 위원장 취임식 당시 국민의힘은 취재진 좌석을 시야가 가려지는 방송사 카메라 뒤로 물리고, 질문자를 사전 선정해 빈축을 샀다. 한 위원장의 현장 일정 땐 당직자들이 나서 취재진의 질의응답 시도를 최소화하곤 했다.
당내에선 한 위원장이 검찰 출신으로 보안을 중시하는 데다, 총선을 앞두고 민감한 내부 정보가 새어나가는 것을 차단하려는 기류가 반영됐다는 분석이다. 다만 “당의 폐쇄성 심화가 총선을 앞둔 여당의 대국민 소통을 저해할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편 한 위원장은 3일 비대위 회의에서 “선진국 수준에 맞지 않는, 시민의 전반적인 생활에 뿌리내린 불합리한 격차를 해소해야 현실의 삶이 나아진다고 생각한다”며 “이번 총선에선 다양한 영역의 불합리한 격차를 해소하고 없애는 데 집중하겠다”고 말했다. 전날 “경기에서 서울로 출퇴근하느라 힘든 교통, 문화 격차, 파출소 빈도 차이로 나오는 치안ㆍ안전 격차 등 생활 곳곳에 불합리한 격차가 많다”고 한 데 이어 이틀 연속 ‘격차 해소’를 강조한 것이다. 박근혜 정부의 ‘경제민주화’를 연상케 하는 키워드로, 중도층을 겨냥한 발언으로 풀이된다.
한 위원장은 “국민의 선택을 받기 위한 핵심은 좋은 사람들이 우리 당으로 모이게 하는 것”이라며 “내가 직접 인재영입위원장을 맡겠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인재영입위는 한동훈ㆍ이철규 공동위원장 체제로 운영된다. 신의진 당무 감사위원장, 황정근 중앙당 윤리위원장은 유임됐다.
김기정 기자 kim.ki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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