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기의 시시각각] '대한민국의 봄'은 언제 오려나
#1 "올해는 쇼와(昭和) 99년. 사요나라! 오래된 좋은 일본." 일본 최대 귄위지 닛케이의 1월 1일 신년기획 제목이다. 쇼와는 1926년 12월부터 89년 1월까지 일본에서 사용된 연호다. 일본이 세계 제2위의 경제 대국으로 뛰어올랐던 시기다. 사회에 활력이 넘쳤다. 전 세계 주식펀드가 지표로 삼는 MSCI 지수의 일본 기업 비중은 무려 27.28%에 달했다(현재는 5.5%).
그리고 버블 붕괴와 함께 찾아온 '잃어버린 33년'. 이후 연호는 헤이세이·레이와로 바뀌었지만, 일본은 쇼와에서 헤어나오질 못했다. 나라 밖으로 나가 개척하고 도전하기보단 여전히 나이와 기수를 따지고 내부적인 '부분 개량, 부분 개선'에 만족했다. 이른바 '저수지 문화'다. 그사이 일본의 경제력을 상징하는 국민 1인당 GDP(국내총생산)는 3만4000달러, 세계 32위로 고꾸라졌다. 닛케이가 신년기획에서 2024년을 '쇼와 99년'이라 꼬집은 이유다.
'쇼와 99년'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
하지만 중요한 건 최근의 변신이다. 일본, 일본인이 '진짜 위기'라는 걸 자각하기 시작했다. 33년 디플레의 끝이 보인다. 고질적 저축문화는 투자문화로 바뀌었다. 미·중 대립으로 경제안보가 부상하자 생산 및 연구개발 거점으로서의 가치가 급상승했다. 사회 곳곳에 '경험보다 기술'이란 의식이 자리잡았다. 뒤늦은 각성일지 모른다. 다만 치안·인프라·관광력·시민 의식 같은 대체 불가의 저력이 여기에 더해지면 그 파괴력은 대단할 것이다. '일본 부활'은 그저 웃고 무시해 넘길 망상이 아니다. 언론도, 국민도 "이제 그만 '쇼와' 좀 때려치자고요!"라고 외친다. 모두가 바꾸려고 눈에 쌍심지를 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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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은 '사요나라 쇼와' 외치는데
우린 '카르텔 척결'이 최우선인가
거칠고 분열하는 나라로 놔둘건가
」
#2 자,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신문을 봐도, TV를 틀어도 한국의 신년 어젠다는 오로지 정치 일색이다. 저출산·고령화 심화, 거세지는 지정·지경학적 위협, 경제 규모에 걸맞지 않는 시민 의식 향상 방안, 기후변화 위기 대응을 위한 정책 등 진짜 우리 사회에 긴급한 과제는 뒷전이다. 정치인뿐 아니라 국민도 마찬가지다. 다가오는 4월 총선에, 김건희 특검에 대한민국의 사활이 걸려 있는 듯 국민의 의식과 양식이 마비된 느낌이다. 지금 우리가 뭘 걱정해야 하고, 뭘 시급히 해결해야 하는지에 대한 국민적 공감을 이뤄내고 다 함께 그 해결을 위해 힘을 쏟는 게 진정한 국력이자 민도인데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1일 윤석열 대통령의 신년사는 실망스러웠다. 여당, 야당이야 늘 치고받고 싸우는 게 일이니 그렇다 치자. 하지만 적어도 대통령은 2024년 대한민국의 비전의 일면이라도 제시해 줘야 했다. 아무리 여러 번 신년사를 읽어봐도 저출산 대책, 노동·교육·연금 3대 개혁 같은 핵심 과제의 알맹이는 찾아볼 수가 없다. 그저 여러 곳에 등장하는 '자기들만의 이권과 이념에 기반을 둔 패거리 카르텔 척결'이란 표현만이 머리에 남는다. 카르텔을 바로잡겠다는 당위성이야 누가 부인하겠는가. 하지만 솔직히 법조·연예계·재계·스포츠계 우리 사회 어디든, 아니 어느 나라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게 없을 수 있나. 뭘 어떻게 어디까지 손을 보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과연 그게 팽팽 돌아가는 글로벌 경쟁 속에 우리의 최우선 과제일까. 대통령의 언어로서의 품격도 그렇지만, 적어도 국민은 카르텔보다는 통합, 척결보다는 포용의 메시지를 새해 첫날 원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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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대한민국, 이대론 안 된다
서로가 서로를 증오하고, 상대방을 선의의 경쟁자가 아닌 타도할 적으로 인식하는 나라는 덩치는 커져도 평생 개도국 취급을 받는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 피습 사건을 보며 박근혜 '커터칼', 송영길 '망치 가격'을 떠올린다. 나라가 분열하면 국민은 거칠어진다. 음모론·배후론이 쏟아진다. 주요 언론도 유투버마냥 이를 그대로 옮긴다. 부끄럽다. 이제 모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이제 우리 그만 '쌍팔년'에서 벗어나자고요!"라고 외치기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대한민국의 봄'은 언제 오려나.
김현기 순회특파원 겸 도쿄총국장 kim.hyunk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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