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훈의 음식과 약] 식후에 과일을 먹어도 된다

2024. 1. 4. 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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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훈 약사·푸드라이터

식후에 과일을 먹어도 된다. 과일을 나중에 먹는다고 하여 뱃속에서 썩지 않는다. 수백 년 전 유럽 사람들은 이 문제를 두고 논쟁했다. 중세 전기에는 소화가 어려운 음식을 먼저 먹어야 한다는 주장이 우세했지만 중세 후기에는 가벼운 음식을 먼저 먹어야 부패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위에서 음식에 섞여서 내려간다는 해부학적 지식을 얻은 뒤에도 그런 믿음은 변하지 않았다. 중세 유럽의 의사들은 과일을 식전에 먹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복숭아, 포도, 멜론 같은 달콤한 과일을 식후에 먹으면 위장에 둥둥 떠서 썩을까봐 두려워했다. 하지만 위장 속에서 음식이 부패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위에서 분비되는 위액에는 강한 산성의 염산이 들어있다. 위와 식도는 사람의 소화기관 중에서도 세균이 가장 적은 곳이다.

언제 먹든 과일은 사람 장내에서 부패하지 않는다. [중앙포토]

20세기 초까지도 뱃속에서 음식이 부패하여 독소를 만들어낸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이번에는 위가 아니라 장이 문제라고 여겼다. 대장에서 음식물이 썩으면서 독소를 만들어내어 자가중독을 일으킨다는 이론이었다. 기다란 대장이 문제이니 장의 일부를 잘라내면 된다고 보는 의사들도 있었다. 영국의 저명한 외과의 윌리엄 아버스노트 레인 경은 실제로 변비와 자가중독을 치료한다며 수십 건의 대장 절제술을 집도했다. 불필요하며 위험한 조치였다. 레인의 자가중독 이론은 1920년대에 이미 학계에서 근거 없는 것으로 간주됐다.

과일을 먹고 배에 가스 찬 느낌이 드는 게 장내 부패가 일어나는 증거가 아니냐고? 장내 미생물이 소화관에서 흡수되지 않고 남은 음식 성분을 이용하는 것은 부패가 아니라 발효라고 부른다. 과일에 풍부한 과당, 올리고당, 당알코올과 같은 물질은 장내 미생물의 먹이, 말하자면 프리바이오틱스이다. 사과, 배, 망고, 체리 같은 과일, 양파, 마늘, 대파 같은 채소에는 이들 물질이 많이 들어있다. 그래서 장 건강에 유익하다고 볼 수 있지만 동시에 과민성 대장 증후군이 있는 사람의 경우 배가 아프고 가스가 차는 증상을 심하게 만들 수도 있다. 식후에 과일을 먹으면 위장 속 내용물에 이들 성분이 희석되어 속이 덜 불편할 수 있다. 반대로 식전에 소량의 과일을 먹을 때 불편감이 덜하다는 사람도 있다. 과민성 대장 증후군이 있는 경우 어떤 음식이든 조금씩 자주 먹으면 증상 완화에 도움이 된다. 언제 과일을 먹든 사람의 장내에서 과일이 부패하거나 그로 인해 독소가 생기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16세기 프랑스의 사상가 몽테뉴는 『수상록』에서 사람들은 자기가 바라는 것에 쉽게 속아 넘어가기 때문에 사실이 아니어도 믿는 경향이 있다고 썼다. 과학이 놀랍게 발전한 21세기에도 이런 경향만큼은 그대로이다. 부디 올해는 내가 믿고 있는 게 정말 과학에 근거한 사실인지 확인해보는 한 해가 되기를.

정재훈 약사·푸드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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