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기는 나무젓가락”…증오 퍼나르는 음모론
대낮에 공개된 장소에서 제1야당 대표가 괴한에게 흉기로 피습당한 사건을 놓고 온라인에선 ‘자작극’이라는 음모론과 가짜뉴스가 극성을 부렸다. 여론을 왜곡하고 민주주의를 위태롭게 하는 행태이자 극단적 정치 문화가 낳은 병리 현상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3일 온라인을 달군 건 ‘나무젓가락 흉기설’이었다. 직장인 커뮤니티 애플리케이션인 ‘블라인드’에서 모 회사 직원은 “이재명(대표) 영상을 슬로(느린 속도)로 보면 민주당원이 왼손에 칼, 오른손에 종이로 만 나무젓가락을 들고 오른손으로 찌른다”며 “자작극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다른 회사 직원도 “범인의 오른손에는 칼이 아닌 무언가 짧은 물건이 들려 있고 나무젓가락으로 추정된다”며 음모론에 동조했다.
범행에 쓰인 흉기가 이 대표 팬클럽이 사용하는 깃발 모양 응원 도구인 ‘잼잼 응원봉’의 깃대 부분이라는 주장도 제기됐다. 한 네티즌은 ‘디씨인사이드’ 갤러리에 올린 ‘아니 누가 자작극이래’라는 글에 응원 도구 사진을 올리며 “그냥 범행 도구가 ‘잼잼 응원봉’이라는데 왜 (민주당이) 영상 다 내리고 모자이크하고 고소·고발·협박까지 하느냐”고 적었다.
자작극 주장까지…“보고 싶은 것만 보는 사회적 병리현상”
음모론과 가짜뉴스가 급속히 확산하자 부산경찰청 수사본부는 이날 브리핑에서 범행 도구를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김모씨가 범행에 사용한 흉기는 길이 18㎝(날 13㎝)의 등산용 칼”이라며 “김씨는 칼자루를 빼고 테이프로 감았고, 칼날은 A4 용지 등으로 감싼 뒤 이 대표를 습격하는 데 사용했다”고 말했다. 경찰은 특히 ‘나무젓가락 흉기설’에 대해서는 “사실이 아니다”며 “A4 용지로 감쌌기 때문에 나무젓가락 등으로 오인했을 수는 있다”고 덧붙였다.
경찰 발표에도 ‘나무젓가락 흉기설’을 비롯해 민주당 자작극이란 주장은 보수 성향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퍼져 나갔다. ‘일간베스트’ 게시판에는 ‘이재명 자작극 증거 확실’이란 제목으로 “휴지로 지혈하는데, 휴지에는 피 한 방울 번지지 않는다. 이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나”라는 주장이 올라왔다.
자작극 주장은 조롱을 낳았다. 네이버 카페 ‘부동산스터디’에는 “(속보) 민주당 젓가락 판매금지법 발의”라는 글이 올라왔고, 뉴스 댓글 창에는 이 대표의 상처 크기를 언급하며 “1㎝ 열상 가지고 쇼 제대로 한다”거나, 이 대표 사법리스크를 언급하며 “법원 선고 앞두고, 하여간 잔XXX 굴리는 것은 인정해 주마”라는 글들이 줄줄이 달렸다.
허위 사실을 확대 재생산한 건 보수 성향 유튜브였다. ‘신의한수’는 3일 “민주당, 왜 굳이 이재명 사고 내용에 대해 영상을 지워 달라고 요구하고 있을까. 무엇이 그렇게 겁이 나서 법적 조치까지 운운하고 있을까”라며 나무젓가락과 응원 도구를 범행 도구로 의심하는 내용을 방송했다. “그 정도의 세기로 칼을 찔렀다고 하면 이거는 관통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 아니겠느냐. 하지만 결과는 뭐였다? 1㎝의 열상이었다”는 주장도 폈다. ‘이봉규TV’는 사건 발생 직후 “한동훈 지지율이 오른 뒤 피습 사건이다. ‘자작나무’(자작극을 의미) 사건일 수 있다”는 내용을 송출했다. ‘진성호방송’은 “이재명 습격범, 이거였어?” “이재명 수술 뭘 감추나, 서울대병원 이런 짓을?” 같은 섬네일로 호기심을 자극했다.
홍익표 민주당 원내대표는 “정치적 자작극이라느니 하는 허위 사실 유포는 명백한 2차 테러”라며 “당 차원에서 대책 기구를 만들어 법적·정치적 대응을 하겠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가짜뉴스는 여론을 왜곡하고 민주주의를 위태롭게 하는 사회적 병폐라고 비판했다. 프로파일러 출신 배상훈 전 우석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각자의 정파적 선호에 따라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일종의 사회적 병리 현상”이라며 “가짜뉴스를 해명하느라 수사기관이 에너지를 낭비하는 게 과연 정상적인 일이냐”고 지적했다. 김형준 배재대 석좌교수는 “우리 정치 문화가 진영논리에 입각해 양극단으로 쪼개져서 상대를 힘으로 누르거나 퇴출하는 방식으로 퇴보해 왔다”며 “그런 정치인을 지켜보는 국민도 극단적 대립을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받아들이고, 서로서로 증오의 대상으로 인식하다 보니 정치 테러의 심각성마저 인식하지 못하게 됐다”고 말했다.
정용환 기자 jeong.yonghwan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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