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커플 사이에도 갑을 있다, 소녀시대 수영 열연한 ‘와이프’

홍지유 2024. 1. 4.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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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와이프’는 각기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퀴어 커플을 통해 약자로 살아가는 것의 의미를 보여준다. 게이 커플 에릭과 아이바. [사진 글림컴퍼니]

“이쪽은 에릭, 제 와이프예요. 나의 비밀스러운 남자라고 부를 수도 있지만. 우리는 우리의 관계를 정의할 수 있는 새로운 급진적인 단어가 필요해요.”

1980년대 영국의 한 술집. 젊은 남성 아이바는 동성 파트너 에릭을 ‘와이프’로 부른다. 게이 커플이라도 한쪽은 남편, 다른 한쪽은 ‘와이프’다. 아이바는 동성 커플의 권리 신장을 주장하는 평등주의자지만, 정작 아이바와 에릭 사이에는 불평등과 위계가 존재한다. 아이바는 런던 홀랜드 공원 근처 저택에서 살며 아트 갤러리를 운영하는 엘리트지만, 에릭은 아이바 엄마의 수발을 들고 아이바에게 그 대가를 받는 간병인이자 ‘와이프’다.

연극 ‘와이프’(연출 신유청)는 영국 극작가 사무엘 아담슨이 2019년에 쓴 작품이다. 같은 해 한국 초연 당시 동아연극상에서 작품상·연출상·신인연기상(황은후·데이지 역) 등 3관왕에 올랐다. 신유청 연출은 2020년 연극 ‘그을린 사랑’으로 백상연극상을 받았고, 지난해 연극 ‘튜링머신’ ‘테베렌드’로도 호평받았다.

극은 1950, 1980, 2020, 2040년대를 시간순으로 보여주며 여성과 성 소수자의 지위에 관해 이야기한다. 1959년 배우 수잔나를 사랑했던 레즈비언 데이지는 성 정체성을 숨긴 채 남자와 결혼해 아이를 낳고 30년 후 이민 정책에 반대하는 보수주의자가 된다. 1988년 자신의 정체성을 숨겼던 에릭은 뒤늦게 커밍아웃을 하지만 게이 퍼레이드 행진 중 괴한이 쏜 총탄에 죽고, 동성 커플 차별에 맞섰던 아이바는 꼰대 중년이 된다. 당연한 말이지만, 퀴어의 삶도 변한다.

연극 ‘와이프’는 각기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퀴어 커플을 통해 약자로 살아가는 것의 의미를 보여준다. 배우 수잔나와 그의 팬 데이지. [사진 글림컴퍼니]

극 중 ‘와이프’는 ‘을’의 총칭이다. 원치 않는 결혼 후 남편의 그늘 속에서 살아야 했던 데이지와, 아이바 집안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에릭 모두 ‘와이프’로 불린다. 그러나 시간은 흐르고 관계는 변한다. 영원한 ‘갑’은 없다. 아이바는 새로운 동성 파트너 카스에 휘둘리는 ‘와이프’가 되고 에릭의 딸 클레어는 그런 아이바를 동정한다. 신 연출은 “관객이 자신의 자리에서 벗어나 다양한 편에 서보는 경험을, 그래서 세상이 뒤집어지는 경험을 연극을 통해 할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대중적인 작품은 아니다. 마거릿 대처 전 총리 시절 영국의 성 소수자 정책, 헨릭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 내용 등 배경 지식이 필요하다.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가 동성애 혐의로 수감됐던 레딩 감옥, 교육 현장에서 동성애와 관련한 언급을 금지한 대처의 ‘섹션28’ 정책, 영국 중산층 거주지인 턴브리지 웰즈 지명을 활용한 풍자 등이 많은 대사에 녹아있다. 게다가 대사 속도까지 빨라 흐름을 놓치기 쉽다. 빽빽한 대사가 대부분 번역 투인 점도 아쉽다.

그룹 소녀시대 멤버 최수영이 데이지 역을 맡았다. “분노·사랑·연민같이 각기 다른 감정을 비슷비슷하게 표현한다”는 지적도 있지만, “연극 데뷔작인데도 대사 전달력과 캐릭터 표현 방식이 좋았다”는 호평도 있다. 젊은 아이바 역의 이승주, 늙은 아이바 역의 오용 등 연기자들은 대체로 호평을 받았다. 다음 달 8일까지 서울 강서구 LG아트센터에서 공연한다.

홍지유 기자 hong.jiy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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