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 야구선수·가수…그런 나를 일으켜준 ‘레미제라블’

나원정 2024. 1. 4. 00:0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배우 민우혁은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메시지를 “사랑”이라 요약했다. 2015년 같은 뮤지컬에서 청년 혁명가를 맡았던 그가 지난 연말 서울 공연을 시작한 세번째 시즌에서 주인공 장발장 역할로 복귀했다. [사진 레미제라블코리아]

“장발장을 연기해보니 ‘레미제라블’의 본질적 메시지는 사랑이더군요. ‘그 누군가를 사랑하면 신의 얼굴을 보리’라는 마지막 가사가 한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어요.”

배우 민우혁(41)은 뮤지컬 ‘레미제라블’을 “암울하던 시대를 녹인 사람, 장발장의 따뜻함”으로 해석했다. 2015년 한국어판 ‘레미제라블’ 두 번째 시즌에 젊은 혁명가 앙졸라를 연기했던 그가 지난해 말 개막한 세 번째 시즌에 주역 장발장으로 돌아왔다. ‘영웅’ ‘프랑켄슈타인’ ‘마리 앙투아네트’ ‘안나 카레니나’ ‘벤허!’ ‘지킬 앤 하이드’ 등 대극장 뮤지컬 주역을 도맡아온 그는 최재림과 더블 캐스팅됐다. ‘오페라의 유령’ ‘미스 사이공’ ‘맘마미아’와 함께 세계 4대 뮤지컬로 꼽히는 ‘레미제라블’은 극 전체가 노래로 이뤄진 ‘송스루(Song Through)’ 뮤지컬이다.

무명의 야구선수·가수를 거쳐 뮤지컬 배우로 고군분투하던 민우혁에게 ‘레미제라블’은 제2의 인생을 열어준 무대다. “배우란 작품의 본질을 잘 표현하는 거로 감동을 선사해, 병원에서도 고치지 못하는 마음의 병을 고쳐주는 직업”이란 직업관을 깨우쳐준 작품이란다. 그를 지난해 말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났다.

뮤지컬 ‘레미제라블’. [사진 레미제라블코리아]

예능 ‘전지적 참견 시점’(MBC) 등으로 대중적 인기를 얻은 민우혁은 지난해 JTBC 드라마 ‘닥터 차정숙’에서 외과 의사 로이킴 역을 맡아 열연했다. 드라마는 최고 시청률 18.5%(닐슨코리아)로 큰 인기를 끌었다. 로이킴은 의사 경력이 단절된 차정숙의 수호 천사 같은 캐릭터다. ‘레미제라블’의 장발장도 키다리 아저씨 같은 캐릭터다. 빵을 훔치다 19년간 복역한 장발장은 미리엘 주교의 사랑 덕분에 개과천선하고, 고아 소녀 코제트를 친딸처럼 키운다. 그는 “초반부 야수 같은 출소자 시절이 강렬해, 분노와 악에 받친 복수심을 내려놓는 후반부 장발장이 더욱 돋보인다”고 말했다.

1985년 런던 초연 이래 53개국 1억3000만명이 관람한 ‘레미제라블’은 영국 오리지널 제작진이 1년 넘게 오디션을 할 만큼 캐스팅이 까다롭다. 특히 장발장은 “30년간 나이 들어가는 모습에, 어려운 곡을 소화해야 하는”(협력연출 크리스토퍼 키) 역이다. “무슨 역할로든 참여하고 싶어” 오디션에 나섰던 민우혁은 “(2015년) 앙졸라 오디션 당시 ‘야수의 거친 면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기억하고, (이번에는) 자고 일어난 듯 흐트러진 상태로 오디션을 본 전략이 통했다”며 웃었다. 하지만 합격 후 30초만 좋았다. “죽기 전 마지막 역할이 장발장이길 바랄 만큼 꿈의 배역”이 예상보다 일찍 찾아온 부담감이 컸다. 장발장의 음역이 “남자가 낼 수 있는 모든 소리를 다 내야 할 만큼 어렵기” 때문이었다.

지난해 드라마 ‘닥터 차정숙’의 의사 로이 킴 역할로 주목받은 데 이어서다. [사진 JTBC]

민우혁은 앙졸라 연기 당시 목청껏 노래하다 성대결절을 앓았다. 이후 실용음악·성악 전문가들 지도로 보컬을 단련했다. 3시간 넘는 공연에서 그가 꼽은 최고난도 넘버는 ‘브링 힘 홈’. 청년 혁명가를 위해 장발장이 부르는 기도문이다. “운동을 했기 때문에 힘으로 하는 건 자신 있거든요. 그런데 ‘브링 힘 홈’은 운동에 빗대면 필라테스처럼 속 근육을 써야 하는 넘버에요. 헬스를 2시간쯤 한 상태로 필라테스 하는 고통이랄까요?”(웃음)

‘레미제라블’은 민우혁에게 “10년마다 실패한 ‘포기 인생’에 브레이크를 건 작품”이기도 했다. 그는 프로야구 LG 트윈스에 입단했다가 부상으로 은퇴했다. 가수에 도전해 2007년 그룹 포코스 메인보컬로 데뷔했다. 2012년 결혼 후엔 소극장 뮤지컬 배우로 활동했다. 모두 별 반응이 없었다. “군대에 다녀온 뒤 체육 교사를 준비하면서 마지막 각오로 뮤지컬 ‘데스노트’ 오디션에 갔는데, 김문정 음악감독이 ‘레미제라블’ 오디션은 안 봤냐고 묻더군요.” ‘데스노트’는 떨어졌지만, ‘레미제라블’에는 덜컥 붙었다.

민우혁은 지난해 LG 경기의 시구자로 나설 만큼 명성과 여유를 얻었다. 공을 놓은 지 오래돼 공을 패대기쳤지만, 그래도 감개무량했다. 그는 “결국 버티며 살아가는 원동력은 사랑”이라고 했다. ‘레미제라블’과 자신의 경험에서 배웠다.

“포기할 때마다 무서웠지만 재도전한 건 가족의 믿음 덕분이었습니다. 두 아이에게 아빠가 필요한 시기인데 너무 일만 하나 싶기도 하지만, ‘레미제라블’을 통해 아빠로서도 더 성장한다고 느낍니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