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도심 속 '저렴한 주택'이 보여준 희망... 지금이 기회다 [넥스트브릿지]
정책네트워크 넥스트 브릿지(Next Bridge)는 지식경제, 기후, 디지털,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 등 전환의 시대를 직면하여 비전과 정책과제를 연구하는 포스트 386 세대(90년대 대학을 다닌 사람에서 90년대생 청년) 중심의 연구자·정책 전문가의 네트워크다. 넥스트 브릿지는 주권자인 국민들이 사회 지향과 정책과제에 대한 이해가 높아야 산업화와 민주화 이후 한국의 민주주의와 사회발전이 가능하다는 데 뜻을 모았다. 정책담론을 위한 대중적인 소통을 희망하며 다양한 분야의 정책 전문가들이 자기 분야의 정책과제를 가지고 매주 정책 칼럼을 연재한다. <편집자말>
[이주원 기자]
▲ 지난해 4월 서울 남산에서 바라본 아파트 일대. |
ⓒ 연합뉴스 |
어떤 도시에서 태어나느냐가 운명을 가른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의 극작가 에우리피데스는 "행복의 첫 번째 조건은 유명하고 부유한 도시에서 태어나는 것"이라고 했다. 그의 지적은 현대 도시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더구나 한국에서는 어떤 도시에 태어나고 사느냐가 그 사람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결정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유명하고 부유한 도시에 태어나고 살더라도 시민 개개인의 지위는 다르다. 플라톤의 논평처럼 모든 도시는 "둘로 나뉘어 있다. 하나는 가난한 사람들의 도시이고 다른 하나는 부유한 사람들의 도시"이다.
둘로 나눠진 도시는 포퓰리즘 정치의 기반이 되었다. 주거, 교육, 교통, 의료 등 고비용 구조를 버티지 못하는 도시의 가난한 시민들의 불만과 분노가 그 뿌리이다. 포퓰리즘 정치는 고비용 도시에서 이웃 시민이 처한 경제적 곤경에 관심 없는 성공한 엘리트들에게 분노하여 촉발되었다. 영국의 브렉시트, 미국 러스트벨트의 트럼프 지지 등이 바로 그것이며, 22대 총선을 앞두고 김포시 서울편입론을 꺼내든 국민의힘의 정책도 포퓰리즘에서 기반한 것이다.
도시는 인류 진보의 거대한 인큐베이터였다. 문명의 발전을 이끌어 온 인류의 위대한 발명품이다. 인큐베이터이자 인류 공동의 자산인 도시를 소수의 엘리트가 더욱 독식하는 거대한 도시가 등장했다. 요즘 논란이 되는 메가시티(인구 1000만 명 이상이 밀집해서 거주하는 도시)는 '슈퍼스타 도시'다.
미국의 도시 경제학자 리처드 플로리다는 그의 저서 <도시는 왜 불평등한가>에서 '슈퍼스타 도시'를 정의한다. 인적 물적 자원이 모여 가장 높은 수준의 혁신을 창조하고, 가장 많은 글로벌 자본과 투자를 통제하고 끌어들이는 승자독식의 도시, 그것이 슈퍼스타 도시라는 것이다.
▲ 세계의 슈퍼스타도시 순위, '도시는 왜 불평등한가? (처드 플로리다, 매일경제신문사)' p46 인용 |
ⓒ 이주원 |
대한민국은 전시 상황
전쟁이 일어나도 아이는 태어난다. 출산율이 낮을 뿐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합계출산율은 지난해 3분기 기준 0.7명으로 떨어졌다. 출산율만 놓고 본다면 대한민국은 '전시(戰時) 상황'이다. 그러나 정치권과 정부는 이 심각성을 모르는 것 같다. 뻔하고 관성적인 정책으로 일관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답답하다.
관료들은 '~~ 정책' 같은 표현을 일상적으로 쓴다. 그러나 '~~ 정책'은 관료의 언어이다. 이제까지 경험에 비춰볼 때 '~~ 정책'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논의가 시작되는 순간, 절차적 합리성을 따져보겠다거나 선례를 고민하는 등 이전의 프로세스와 해결 방식을 벗어날 수가 없다. 관료의 언어로 추진된 정책의 결과가 합계출산율 0.7 명대다. 주거 정책만 보더라도 역대 정부 모두 그래왔다. 전형적인 '관료제'에 포위된 모습이었다. 정책의 실패였다.
전시 상황에서는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야 한다. 관료의 언어가 아니라, 민생의 언어, 정치의 언어가 필요하다.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대대적인 수준의 변화가 절실하다. 이런 변화를 위한 국가 비전이 기본사회라고 본다. 기본사회는 국가가 시민들에게 '최소한의 삶'이 아니라 일정 수준 이상의 '기본적인 삶'을 보장하는 사회이다. 일정 수준 이상의 소득(기본소득)과 안락하고 편안한 수준의 주거(기본주거), 그리고 고소득·고액 자산가에게 유리한 금융구조의 개선(기본금융) 등을 이루는 나라가 기본사회 국가다.
기본주거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1개 정부 부처 수준의 정책으로는 어렵다. 관료의 언어로는 정부 부처 간의 벽을 넘지 못한다. 그래서 '정치의 언어'가 필요한 것이다. 정치인들이 '정치적 비전'으로 선언하고 시민들에게 동의를 구해야 하는 일이다. 그래야 부처 간의 벽을 넘어 전시 상황에 맞는 대책을 쏟아낼 수가 있다.
수도권, 특히 서울은 슈퍼스타 도시다. 일자리는 상대적으로 많지만, 생활비가 많이 드는 고비용 도시다. 일자리를 얻으려 서울로 이주하려는 노동자는 대개 낮은 임금의 일자리를 얻게 된다. 이들의 임금이 비(非) 슈퍼스타 도시의 노동자보다 더 높기는 하지만 비싼 생활비로 인해 더 고될 뿐이다. 특히 주거비가 이들의 삶을 옥죈다. 집값 상승은 이들을 도시 주변부로 밀어내서 과중한 교통비 부담이라는 짐을 지워준다.
고비용 도시에 사는 시민에게 비싼 주거 문제의 해결은 절실하다. 주거 문제는 주택·교육·교통·의료 등 삶의 여러 문제와 맞닿아 있어 패러다임의 전환이 절실하다,
고비용 도시, 비용구조 결정권이 시장에 맡겨져 있는 탓
전시 상황의 대한민국호가 이 난제를 타개하려면 지나치게 고비용 구조인 시민의 삶터를 저비용 도시로 전환해야 한다. 우리의 도시는 '지나치게 고비용 구조'이고, 비용구조의 결정권이 시장(Market)에 맡겨져 있다. 특히, 주거의 고비용 문제가 크다. 시장이 주도하는 고비용 주거와 미흡한 일·가정 양립 정책이 원인이 되어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는 현실이다. 사람들은 주거 문제가 해결되고 '일·가정 양립'에 확신이 들 때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다.
집에 '거주'하기 위해 내는 비용 자체가 너무 비싸다.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 주택을 매입하는 것은 평생 벌어야 할 노동소득을 다 쏟아부어야 하는 비용 수준이다. 전세와 월세 등 임차 비용도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다. 최근에는 전세사기 문제가 터져서 안전한 임차를 위해 더 큰 비용을 내야 하는 상황까지 됐다. 주거 문제가 철저하게 '시장 논리' 위주로 구성된 탓이다.
▲ 수도권광역급행철도 노선(출처 : 내 손안에 서울) |
ⓒ 국토교통부 |
운이 좋은 소수의 정치·경제 엘리트뿐만 아니라 모든 시민에게 도시가 좋은 삶터가 되려면 공정하고 '기회가 평등한 교육', '저비용 주거', '값싸고 이용이 편리한 저비용 대중교통'이라는 세 가지 기둥이 필요하다. 특히 평생 노동소득으로도 감당하기 힘든 집 문제 해결을 위해 저비용의 주거 기둥을 튼튼하게 만드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주거의 시민 이니셔티브(Initiative) 시대를 열자
저비용 도시를 이루기 위해서는 도시 외곽이 아니라 도시 내 중심지에 저렴한 비용의 주택을 늘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도시는 부자들이 독점하는 기울어진 운동장이 될 것이다. 저렴한 주택은 '안정적인 주거'이자 '기본주거'이다. 어포더블하우징(Affordable Housing)이라는 영어 개념으로 더 잘 알려진 '저렴한 주택'은 '소득대비 적정비용'으로 주거를 유지할 수 있는 주거 문제의 해결책이다.
소득대비 적정비용에 대한 기준은 정치가 나서 사회적 합의를 통해 정하면 된다. 국민 다수가 인정할 수 있는 비용을 합의하기 위해 정치가 '정치의 언어'로 관료의 정책을 통제해야 한다. 만약 구체적인 금액에 대해 합의가 어려우면 방법론 측면에서 풀어볼 수도 있다. 일단은 소유권은 시민에게 이전시키고, 지분은 국가(지자체)와 시민이 나눠 갖는다거나, 아니면 이를 시민들이 협동조합 형태로 공동 소유할 수도 있다. 또한 임대료가 저렴하고 임대 기간이 긴 주택을 대폭 늘려 이사 걱정 없이 오래 살 수 있게 하면 된다.
▲ 기본주거사례 |
ⓒ 이주원 |
어포더블하우징에 반대하는 일군의 경제학자들은 주택바우처 정책을 선호한다. 주택바우처는 저소득 가정에 주거비를 직접 지원하는 정책이다. 그러나 주택바우처 정책은 저소득 가구들이 집세가 저렴한 지역에 모이게 한다. 일종의 저소득층 주거지역이 형성되는 것이다. 공간적으로 부자의 도시와 가난한 자의 도시로 나누고 고착시키는 것이다. 주택바우처는 의도와 달리 도시 내에서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른 주거 분리를 촉진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22대 총선으로 전국이 술렁이고 혼란스럽다. 정쟁의 일상화로 특정 정당의 지지하지 않는 무당층의 비율이 30%를 넘는다. 선거는 정당과 정치인이 새로운 상상력으로 미래에 대한 비전과 정책으로 국민에게 선택받는 축제의 장이어야 한다. 그런데, 정쟁만 일삼으니, 국민의 정치혐오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총선을 앞두고 여야는 포퓰리즘의 기반이 된 도시 양극화, 즉 부자의 도시와 가난한 자의 도시로 나뉜 문제의 해법을 제시해야 한다. 특히 평생 벌어도 집 한 채 살 수 없는 주거 문제의 해법을 내놔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치가 역할을 해야 한다. 정치가 사회적 합의를 통해 주거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가 자리 잡을 때, 시장에게 빼앗겼던 주거 문제의 주도권을 시민들이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필자 소개 : 이주원은 세종대학교 대학원에서 도시학 박사과정 수료를 하고 도시와 주택문제를 화두로 살아온 도시재생과 주택정책 전문가입니다. 국토교통부 장관정책보좌관을 역임했으며, 현 사)사회주택협회 정책위원과 탄탄주택협동조합 상임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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