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엔 "특등공신" 文엔 "교활하다"…김여정 2000자의 노림수

박현주 2024. 1. 3. 16:46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이 2일 윤석열 대통령의 신년사를 겨냥해 2000자가 넘는 장문의 비방 담화를 냈다. 북한이 문재인 정부 때는 평화 논의에 손발이 묶여 있다가 최근 윤석열 정부가 앞세운 '힘에 의한 평화' 덕분에 군사력을 당당히 증강할 수 있었다는 궤변이 요지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 이어 여동생 김여정도 "전쟁 중"이라며 위협을 높이는 건 향후 협상 재개에 대비해 종전협정 내지는 평화협정 카드의 가치를 높이려는 노림수라는 분석이다.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 연합뉴스.


"확장억제 덕에 핵 증강"


김여정은 이날 '대한민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신년메세지'라는 제목의 담화에서 지난 1일 확장억제 강화를 강조한 윤 대통령의 신년사를 겨냥해 "우리에게 보다 압도적인 핵전력 확보에 더욱 박차를 가해야 할 당위성과 정당성을 또 다시 부여해줬다"고 주장했다. 윤 대통령에 대해 "특등공신", "값나가는 선물", "용감한 대통령", "은사", "공로", "찬양" 등 반어법을 동원해 사실상 비난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신년사를 발표하는 모습. 대통령실.


尹ㆍ文 싸잡아 반어법 구사


특히 이날 담화에서 김여정은 문재인 전 대통령까지 소환해 비꼬았다. 김여정은 문 전 대통령을 "진짜 안보를 챙길줄 아는 영특하고 교활한 사람"이라고 부르며 "특유의 어눌한 어투로 살점이라도 베여줄듯 간을 녹여내는 그 솜씨가 여간이 아니였다"고 평가했다. "(문재인 정부의) 겉발린 평화의지에 발목 잡혀 적지 않은 시간을 허비했다"면서다.

하지만 북한은 문 정부와 대화 중에도 영변 핵시설을 가동하고, 2022년 4월에는 스스로 약속한 핵실험 및 ICBM 발사 '모라토리엄'(유예)을 깼다. 그래놓고 이제 와 "손발이 묶였다"는 거짓 주장을 한다는 지적이다. 북한은 2019년 2월 하노이 북ㆍ미 정상회담 '노 딜' 직후부터 탄도미사일 발사 잠수함을 건조하는 등 무기 개발에 속도를 냈다.

2019년 9월 백두산 천지에서 문재인 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손을 잡은 모습. 평양사진고옹취재단.

"통일은 없다" 재차 강조


김여정은 '통일 불가'도 다시 강조했다. 윤석열 정부를 겨냥해 "자유민주주의 체제하의 통일을 염불처럼 떠들어주었기에 민족의 화해 단합과 평화통일과 같은 환상에 우리 사람들의 눈이 흐려지지 않게 각성시킬 수 있었다"면서다.

앞서 김정은은 지난해 연말 전원회의에서 "지금까지 괴뢰 정권이 10여 차례나 바뀌었지만 '자유민주주의 체제하의 통일' 기조는 추호도 변함없이 그대로 이어져 왔다"며 "대한민국 것들과는 그 언제 가도 통일이 성사될 수 없다"고 말했다.

김여정이 문 전 대통령까지 싸잡아 비꼰 것도 김정은의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며 남 측에 책임을 전가하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해 12월 26~30일 진행됐던 연말 전원회의에 참석한 모습. 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이는 4월 총선을 앞두고 '남남 갈등'을 유발하려는 노림수라는 분석도 있다. 정대진 원주한라대 교수는 "국내 여론 분열을 노린 것"이라며 "총선에서 여당이 승리해 대북 강경책을 이어가면 군사력 강화의 명분으로 삼고, 야당이 승리해도 과거처럼 남측 제안에 쉽게 응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라고 분석했다.


"전쟁 중" 강조…'주한미군 철수' 노림수


김여정은 이날 "지금 조선반도의 안보 형세가 당장 전쟁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매우 위태롭다"고 말했다. 김정은이 연말 전원회의에서 남북 관계를 '동족'이 아닌 "전쟁 중인 적대적 국가"로 다시 정의한 데 이은 '전쟁팔이'다.

김정은·김여정이 잇따라 최근 한반도의 '정전 상태'를 부각하는 것은 향후 대화 국면이 열릴 경우 종전 선언이나 평화 협정을 더 세게 밀어붙이기 위한 명분을 확보하려는 시도라는 해석도 나온다. 이는 북한의 수십년 숙원인 주한미군 철수, 유엔사 해체와도 직결된다.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는 "북한이 정전 체제를 평화 체제로 전환하자고 요구하기 위해 한반도가 전시 상태라는 점을 미리 지속적으로 부각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며 "평화 협정과 함께 군축 협상, 유엔사 해체, 주한미군 철수 등을 요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는 오는 11월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선할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일 수도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마지막 국방장관이었던 마크 에스퍼 전 장관의 회고록에 따르면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임기 중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주한미군 철수를 여러 차례 주장했다.

2018년 6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싱가포르에서 정상회담을 하는 모습. 스트레이츠타임스. 연합뉴스.


정부 "범죄자가 경찰 때문에 죄지었다는 격"


3일 국방부는 김여정의 담화에 대해 "범죄자가 오히려 선량한 시민이나 경찰 때문에 범죄를 저질렀다고 핑계를 대는 말도 안 되는 억지 주장이며 궤변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통일부도 "격에도 맞지 않는 북한의 당국자가 우리 국가 원수와 정부에 대해 현 상황을 왜곡하고 폄훼했다"고 지적했다. 이날 통일부의 담화는 이례적으로 대변인이 아닌 부대변인 명의로 나왔다. 김여정의 격을 그만큼 낮춰 본다는 의미다.

박현주 기자 park.hyunju@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