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커플도 갑을 있다…소녀시대 수영 '레즈비언' 열연한 이 연극
"이쪽은 에릭, 제 와이프예요. 나의 비밀스러운 남자라고 부를 수도 있지만. 우리는 우리의 관계를 정의할 수 있는 새로운 급진적인 단어가 필요해요."
1980년대 영국의 한 술집. 젊은 남성 아이바는 동성 파트너 에릭을 '와이프'라고 칭한다. 게이 커플이라도 한 사람은 남편, 한 사람은 와이프다. 아이바는 동성 커플의 권리 신장을 주장하는 평등주의자지만, 정작 아이바와 에릭 사이에도 불평등과 위계가 존재한다. 아이바는 홀랜드 공원 근처의 저택에서 살며 아트 갤러리를 운영하는 엘리트지만, 에릭은 아이바 엄마의 수발을 드는 대가로 아이바에게 돈을 받는 간병인이자 와이프다.
연극 '와이프'(연출 신유청)는 영국 극작가 사무엘 아담슨이 2019년에 쓴 작품이다. 2019년 한국 초연 당시 제 56회 동아연극상 작품상, 연출상, 신인연기상(황은후·데이지 역)을 휩쓸며 3관왕에 올랐다. 신유청 연출은 2020년 연극 '그을린 사랑'으로 백상연극상을 받았고 올해 연극 '튜링머신'과 '테베렌드'로도 호평받았다.
극은 1950년대와 1980년대, 2020년대와 2040년대를 시간 순으로 보여주며 여성과 성소수자의 지위에 관해 이야기한다. 1959년 배우 수잔나를 사랑했던 레즈비언 데이지는 자신의 정체성을 숨긴 채 남자와 결혼해 아이를 낳고 30년 후 이민 정책에 반대하는 보수주의자가 된다. 1988년 벽장 속에 숨어있던 에릭은 뒤늦게 커밍아웃을 하지만 게이 퍼레이드 행진 중 괴한이 쏜 총에 맞아 죽고, 동성 커플 차별에 정면으로 맞서왔던 아이바는 꼰대 중년이 된다. 당연한 말이지만, 퀴어의 삶도 변한다.
극 중 와이프는 '을'의 총칭이다. 원치 않는 결혼 후 남편의 그늘 속에서 살아야 했던 데이지와 아이바 집안의 뒤치다꺼리를 도맡은 에릭은 와이프로 불린다. 그러나 시간은 흐르고 관계는 변한다. 영원한 '갑'은 없다. 에릭에게 떵떵거리던 아이바는 새로운 동성 파트너 카스에게 휘둘리는 와이프가 되고 에릭의 딸 클레어는 그런 아이바를 동정한다. 신유청 연출은 "관객이 자신의 자리에서 벗어나 다양한 편에 서보는 경험을, 그래서 세상이 뒤집어지는 경험을 연극을 통해 할 수 있길 바란다"고 3일 본지와의 통화에서 말했다.
대중적인 연극은 아니다. 마가렛 대처 전 총리 시절 영국의 성소수자 정책, 노르웨이 작가 헨릭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 내용 등 배경 지식이 필요하다.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가 동성연애 혐의로 수감돼 유명해진 영국의 레딩 감옥, 교육 현장에서 동성애와 관련한 언급을 금지한 마가렛 대처의 '섹션28' 정책, 영국의 중산층 거주지인 턴브리지 웰즈 지명을 활용한 풍자 등이 꽤 많은 대사에 녹아있는데, 배경 지식 없이 이해하기 쉽지 않은 데다 대사를 치는 속도도 빨라 흐름을 놓치기 쉽다. 신 연출은 "성소수자 커플이든 이성애자 커플이든 모든 관계에는 힘과 위계가 있고, 상대적 약자가 있다"며 "그런 면에서는 보편적이고 단순한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젊은 아이바와 에릭이 술집에서 대화하는 장면에서는 성행위를 묘사하는 말과 욕설이 여러 차례 나온다. 빽빽한 대사가 대부분 번역 투인 점도 아쉽다.
배우로 활동 중인 소녀시대 멤버 최수영이 데이지 역을 맡았다. "분노와 사랑, 연민 같은 각기 다른 감정을 비슷비슷하게 표현한다"는 아쉬운 평가가 있는 반면, "연극 데뷔작인데도 대사 전달력과 캐릭터 표현 방식이 좋았다"는 호평도 있다. 젊은 아이바 역의 이승주, 늙은 아이바 역의 오용 등 연기자들은 대체로 호연했다는 평가다. 공연은 다음 달 8일까지 서울 강서구 LG아트센터에서 볼 수 있다.
홍지유 기자 hong.jiy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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