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의는 과연 최후의 승자였을까
[이준목 기자]
사마의(司馬懿, 179-251)는 후한말과 삼국 시대의 주요 인물이자, 훗날 천하를 통일하게 되는 진나라의 실질적인 건국 시조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소설 <삼국지연의>로 친숙한 팬들에게는 주인공인 제갈량과 맞서는 라이벌이자 최종보스의 역할로도 유명하다.
오늘날까지 사마의의 행적이 주목받는 것은, 결과적으로 그가 삼국시대를 통틀어 '최후의 승자'가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자신을 키워준 조위(조조의 위나라)를 배신하고 새로운 나라를 열게되는 드라마틱한 반전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이는 바로 한나라를 멸망시켰던 조위의 흥망성쇠와 맞물려 '역사는 반복된다'는 교훈을 알려주는 상징적인 장면임과 동시에, 라이벌인 제갈량이 끝까지 촉한의 충신으로 남았던 행적과 대비되며 이래저래 극적인 효과를 선사한다.
1월 2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 132회에서는'유비, 조조도 아닌 삼국지 최후의 승자 사마의' 편을 통하여 역사속 사마의의 진실과 그가 오늘날 영원한 2인자로 남게된 이유를 조명했다. 중국사 전문가인 이성원 전남대 사학과 교수가 이날의 강연자로 나섰다.
사마의가 태어날 무렵은 후한(後漢, 25년~220년)시대가 말기에 접어들며 황권의 약화와 환관-외척들의 권력투쟁으로 인하여 쇠락의 길을 걷던 시기였다. 조조(曹操)는 여러 군벌을 제압하고 황제인 헌제를 옹립하며 권력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조조는 자신의 세력을 키우기 위하여 천하의 유능한 인재를 모으는데도 공을 들였는데 그중 오랫동안 눈독을 들여 지켜본 인물중 하나가 바로 사마의였다.
사마씨는 한나라를 건국한 공신의 명문가였고, 사마의의 부친 사마방은 한나라의 고위관료를 지냈으며 청렴결백하고 현명하여 주변의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사마방의 8형제중 둘째로 태어난 사마의는 어릴때부터 수재로 이름을 떨쳤다. 당대는 인재을 발탁하는데 있어서 명망있는 인사들의 평판과 천거가 큰 비중을 차지했다. 조조 진영에서 최고의 인재로 꼽혔던 순욱과 최염 등은 일찍부터 사마의의 능력을 눈여겨보고 조조에게 등용을 추천했다.
하지만 사마의는 병을 핑계로 조조의 등용을 번번이 사양했다. 당시 정당한 사유없이 나라에서 내린 관직을 거절하는 것은 중죄에 해당했다. 의심많은 조조는 사마의가 정말로 아픈지 감시하게 했고, 그럼에도 사마의는 조조를 속이기 위하여 집안에 은둔하며 치밀하게 환자 행세를 하며 주변 사람들까지 속였다.
하루는 소나기가 내려서 아끼던 책이 비에 맞을까 우려한 사마의가 연기중인 것도 잊고 방밖으로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아프다던 사마의가 멀쩡히 걸어다니는 모습을 한 여종이 목격했다. 이에 사마의와 그의 아내 장춘화는 혹여 비밀이 조조의 귀에 새어나갈까봐 여종을 살해하고 만다. 사마의의 용의주도하면서도 냉혹한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다.
사마의가 이렇게까지 한사코 출사를 거부한 이유는 아직 조조에게 충성을 맹세하기에는 이르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당시 조조는 유력한 군웅의 하나이기는 했지만 확실한 1인자는 아니었다. 사마의가 조조의 밑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그가 속한 사마씨 가문 전체가 조조와 정치적 공동체가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선택한 주군이 몰락하면 그 세력에 속한 가문 전체도 풍비박산이 나기 일쑤였다. 난세에 자신과 가문을 지켜야했던 사마의의 조심스럽고 신중한 성격을 보여준다.
조조가 사마의를 자신의 휘하로 불러들이는데는 무려 7년을 기다려야했다. 조조는 그 사이 승상(오늘날의 국무총리)의 자리에 오르며 권력을 더욱 공고히했다. 조조는 두 번째로 사마의에게 손을 내밀며 "이번에도 응하지 않으면 감옥에 넣겠다"고 최후 통첩을 날렸다. 이에 사마의는 결국 조조가 내린 관직을 받아들여 출사하니 그의 나이 29세였다.
그런데 정작 사마의를 불러들이게 된 조조는 그의 관상을 보자마자 낭고상(狼顧相, 이리의 상)이라고 하여 경계했다고 한다. 이리는 몸통은 그대로 두고 고개만 180도 돌려서 뒤를 돌아볼 수 있어서 조심스럽고 신중한 성격으로 알려져있다. 이리처럼 몸과 시선이 반대 방향이라는 것은, 사람에 비유하면 행동과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낭고상은 겉과 속이 다르고 주인을 배신하는 역적의 관상으로 평가받았다.
눈치빠른 사마의는 조조의 무자비하고 잔혹한 성격을 파악하고 있었고, 항상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처신하며 그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하여 노력했다. 사마의는 명문가 출신임에도 마부처럼 말이나 가축을 돌보는 일까지 직접 자처하며 극도로 몸을 낮췄다.
조조는 사마의에 대한 경계를 다소 풀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를 크게 중용하지는 않았다. 사마의는 이후 215년 조조의 한중 정벌에 책사로 종군하게 되면서 처음으로 그의 전략적 안목을 보여주는 일화가 등장한다. 한중을 정복하고 난 직후, 사마의는 조조에게 기세를 몰아 바로 이웃 지역인 서천의 유비까지 점령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한중은 서천과 중원을 잇는 최대의 군사적 요충지였다. 사마의는 당시 서천을 장악한지 얼마안되던 유비가 세력을 회복하면 조만간 한중을 공략할 것이고 천하통일은 기약없이 늦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조는 군사들이 지쳐있다는 이유로 사마의의 제안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마의는 당시 이미 환갑에 이른 조조가 이미 천하통일의 야심을 이루기에는 너무 늙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하지만 사마의는 자신이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조조의 결정을 받아들이고 물러선다. 그리고 훗날 사마의의 혜안대로 유비는 한중을 점령하며 촉한을 건국하게 되면서 조조의 천하통일은 물거품이 되고만다.
여기서 사마의가 난세에 끝까지 생존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비결은 '참고 절제할줄 아는 미덕'에 있었다. 후한말과 삼국시대의 난세에 무수한 영웅호걸들이 등장했으나 허무하게 사라져간 이유는 중요한 순간마다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잘못된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조조, 유비, 손권, 관우 같은 <삼국지>의 대표 영웅이나 군주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사마의는 인내심이 극도로 뛰어났고, 아직 때가 아니라고 판단되면 고집을 부리거나 모험을 걸지 않으며 유연하게 처신했다. 하지만 일단 한번 기회를 포착하고 결단을 내리면 주저하지 않고 전광석화처럼 일을 처리하는 단호한 추진력도 갖추고 있었다.
또한 사마의의 또다른 생존비결은 가급적 '싸우지않고 이긴다'는 전략이었다. 2019년 유비의 맹장인 관우가 형주의 군사를 이끌고 북진하여 조조가 있던 수도 허도를 위협한다. 늙고 나약해진 조조는 관우를 두려워하여 수도를 옮기는 것까지 생각했다.
하지만 사마의는 단호하게 반대하면서 배후의 손권을 회유하여 관우를 협공하자는 전략을 제안했다. 사마의는 유비와 손권의 동맹관계가 실제로는 불안정하며, 손권이 형주를 노리고 있다는 것과 관우와의 사이가 좋지않다는 사실도 정확히 꿰뚫어보고 있었다. 이번에는 조조도 사마의의 책략을 받아들였다.
사마의의 계략은 성공하여 219년 12월, 손권의 기습으로 관우는 형주를 잃었고 본인도 사로잡혀 처형당하고 만다. 이에 크게 분노한 유비는 대군을 일으켜 손권을 공격하지만 이릉대전(夷陵之戰)에서 참패하며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었다. 유비 본인도 얼마 지나지않아 223년 병으로 사망한다. 이후로 삼국시대는 '1강(위나라)-2약(촉한, 오)'의 판세가 훗날 삼국통일 때까지 영구하게 굳어지게 된다. 사마의의 책략 하나가 삼국시대의 판세를 결정지은 것이다.
비로소 능력을 인정받은 사마의는 조조가 사망하고 아들 조비가 집권하면서 본격적으로 출세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조비는 결국 껍데기만 남아있던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위나라를 건국하여 초대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사마의를 견제했던 조조와 달리, 조비는 스승이었던 사마의를 측근으로 우대하여 여러 요직을 맡겼다.
226년, 조비가 재위 6년만에 사망하면서 사마의는 진군, 조진 등과 함께 후계자 조예를 보좌할 고명대신(顧命大臣)으로 지명되었고, 표기대장군의 자리까지 오르며 명실상부한 위나라 조정과 군부의 실세로 등극했다.
그 무렵 삼국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었다. 창업군주 유비가 사망한 이후 절치부심의 세월을 보내던 촉한은, 재상 제갈량이 황제 유선을 보좌하여 국정을 맡아 국력재건에 성공한다. 제갈량은 한적불양립(漢賊不兩立) 왕업불편안(王業不偏安, 한나라의 적인 위나라와 양립할수 없고, 국토가 일개 지역에 머물러서는 안된다.)이라는 국가 이념을 내세워 위나라를 정벌하고 중원을 수복하겠다는 '북벌'을 추진했다.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의 후반부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는 '제갈량 VS 사마의' 라이벌전의 시작이다.
연의에서는 두 사람의 라이벌 구도를 부각시키기 위하여 사마의를 제갈량의 호적수로 설정했다. 하지만 실제 <삼국지> 정사를 보면 제갈량이 북벌에서 맞서싸운 상대는 사마의만이 아니라 조진, 장합, 학소 등이었다.
심지어 사마의는 첫 번째 북벌에는 참전하지도 않았고 그가 직접 군권을 쥐고 제갈량과 상대하기 시작한 것은 후반부인 4,5차 북벌 정도다. 연의나 드라마 등에서 묘사된 두 사람의 현란한 심리전이나 공성계, 상방곡 전투 등 극적인 장면들의 대부분은 후대 대중문화의 창작이다.
연의는 주인공인 제갈량을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사마의를 호적수이지만 결국은 제갈량의 책략에 번번이 놀아나는 희생양으로 만들었다. 실제로 이는 완전한 허구는 아닌 것이, 사마의는 역사상 제갈량과의 야전에서 두 차례 정도 격돌했으나 모두 패배했고 이긴 기록이 전무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제갈량의 북벌은 실패했고 사마의의 수성은 성공했다는 것이 역사의 진정한 결말이다. 애초에 사마의의 인생철학처럼 제갈량을 상대했던 군사 전략 역시 '참고 때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사마의는 대규모 군대를 유지할 장거리 보급이 어렵고 유능한 인재도 부족하다는 촉군의 약점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사마의는 촉군이 이동할 길목하고 요충지를 미리 점령하여 장기간 대치하는 농성전을 펼쳤다.
초조해진 제갈량은 사마의에게 사신을 통하여 여인의 옷과 장신구를 보내며 도발한다. 이는 수비만 하는 사마의가 여인처럼 소심한 겁쟁이라고 조롱하는 의미였고, 당대 남성들에게는 엄청난 모욕이었다. 그러나 제갈량의 심리를 간파한 사마의는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다.
오히려 사마의는 사신에게 제갈량의 안부를 걱정하는 척 근황을 물으며 그가 잠도 자지않고 잘먹지도 않으면서 오직 일에만 매달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마의는 이를 듣고 자신을 혹사하는 제갈량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을 간파했다고 하며, 식소사번(食少事煩)라는 성어의 유래가 된다.
사마의는 곧바로 동생에게 편지를 보내 "공명(제갈량)은 큰 뜻을 품었지만 기회를 보는 눈이 없고 모략에는 뛰어나지만 결단력이 부족하며 전투를 즐기지만 임기응변에 능력이 없다"고 평가하며 "지금 10만 대군을 이끌고 출병했지만 이미 나의 계책에 빠진 상태다. 그는 이제 패해 물러가게 될 것이다"며 승리를 확신했다.
사마의의 이러한 평가는 제갈량의 능력과 한계를 가장 정확하게 묘사한 표현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후의 전황은 모두 사마의의 예언대로 실현되었다. 연의 등 대중매체의 영향으로 사마의가 제갈량에 비하여 한 수 아래이거나 열등감을 느끼는 것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았다. 실제 역사에서 사마의는 제갈량의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심리를 유일하게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던 진정한 호적수였던 것이다.
234년 제갈량은 오장원의 진중에서 세상을 떠나고 촉군은 퇴각한다. 연의는 죽은 제갈량이 사마의를 물리쳤다는 사공명주생중달(死孔明走生仲達)의 일화를 통하여 마지막까지 제갈량의 퇴장을 여운있게 남기기 위하여 엄연한 승자인 사마의를 또 한번 희생양으로 만들었지만 이 역시 정사에는 존재하지않는 가공의 이야기이다.
어느덧 조조-유비도 제갈량도 모두 사라진 삼국시대에 끝까지 살아남은 사마의는, 말년이 되어 자신의 야심을 드러낸다. 조위는 조조-조비-조예의 시대를 거쳐 4대 황제 조방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칠순에 접어든 사마의는 조씨 일족들의 견제를 받으며 퇴물 취급을 받고 있었다. 사마의는 어릴 때 조조를 속였던 것처럼 일부러 꾀병을 부리며 관직에서 물러났고, 염탐을 하러오는 사람들이 있으면 치매에 걸려 정신이 혼미한 척 열기까지 불사했다.
249년 실권자 조상이 황제 조방을 모시고 수도를 비운 틈에 사마의는 정변을 일으켜 정적들을 몰살하고 정권을 탈취한다. 바로 위나라의 몰락과 사마씨 정권의 등장을 알리는 고평릉사변(高平陵之變)이다.
조위의 정권을 장악한 사마의는 아이러니하게도 본인의 정치적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조조를 그대로 벤치마킹했다. 사마의는 자신이 섬기던 주군과 나라를 배신했고, 후대의 평가를 우려하여 본인이 직접 황제에 오르지는 않았지만 후계자들에게 찬탈의 기반을 차근차근 마련해줬다. 자신에게 저항하는 반대파는 수단방법을 가리지않고 잔인하게 숙청하는 모습도 조조와 흡사했다.
사마의가 생전에 절대 권력을 누린 시간은 짧았다. 그는 고평릉 사변을 일으키고 권력의 정점에 오른뒤 불과 2년만인 251년에 사망했다. 하지만 그가 수립한 사마씨의 권력은 아들 사마사와 사마소, 그리고 손자 사마염에게 계승됐다.
사마씨 정권에 의하여 263년 촉한이 가장 먼저 멸망했고, 265년에는 위나라가 멸망하며 진이 건국된다. 그리고 진나라는 280년 오나라마저 정벌하여 100여년에 걸친 난세를 끝내고 통일을 이뤄낸다. 사마의는 사마씨 후손들에게 고조(高祖 宣皇帝) 황제로 추존되며 결국 자타공인 삼국시대 최후의 승자로 이름을 남기게 된다.
"겸손하고 또 겸손하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화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사마의가 생전에 남겼다는 어록이다. 결국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하다는 의미에서 사마의의 놀라운 인내력과 처세술은 난세를 살아가는 한 인간의 생존 비결로는 본받을 만하다.
하지만 사마의는 '역사의 승자'가 되지는 못했다. 그의 후손들이 세운 진나라는 건국 과정에서의 온갖 모순과 부족한 정통성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고 단명했고, 이후 중국은 오호십육국 시대라는 또다른 난세에 휘말리게 되며 진의 삼국통일은 그 의미가 빛이 바라게 됐다.
또한 시간이 흐르면서 촉한정통론(蜀漢正統論)과 삼국지연의의 등장 등으로 활발한 역사적 재평가가 이루어지면서, 라이벌 제갈량이 시대의 명재상이자 충절의 화신으로 추앙받은 반면, 사마의는 주군인 조조와 더불어 권신의 대명사이자 '배신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악역으로 굳어졌다. 그렇다면 과연 사마의를 진정한 최후의 승자라고 부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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