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기자 북클럽 3기] 몇 년을 식집사로 살았는데 이걸 몰랐네

김현진 2024. 1. 3.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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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앙리 파브르의 <파브르 식물기> 를 읽고

책을 통해 책 너머의 세상을 봅니다. 서평 쓰는 사람들의 모임,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북클럽' 3기입니다. <편집자말>

[김현진 기자]

몇 년 째 식물을 키우고 있다. 그 사이 죽은 식물도 있고 몸을 불린 아이도 있는데 잘 자란 식물은 꺾꽂이를 해 주어 화분 개수가 늘었다. 

어릴 적부터 집안에 화분을 키웠던 엄마를 보고 자란 때문일까. 특별한 지식없이 무의식적으로 꺾꽂이를 했다. 가지치기 한 가지를 그냥 버리지 않고 물에 꽂아 두면 뿌리가 내린다. 이후 화분에 옮겨 심으면 원래 있던 화분의 일부였던 줄기가 새로 태어난 아이처럼 어엿하게 자신의 삶을 꾸려간다.

그 과정의 의미나 이유에 대해 깊이 헤아려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적당한 보살핌을 제공하면 쑥쑥 자라는 식물이 기특하다고 여겼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집안에 활기를 부여하는 인테리어 소품으로 대했다.

몇 년간 새로 식물을 구입하지 않고도 화분의 개수를 늘렸고 불어난 화분 중 몇 개는 지인들에게 기쁘게 선물했다. 초록빛 식물이 주는 기쁨을 안일하게 누렸다. 그랬는데 식물의 삶 바탕에 그보다 커다란 의미와 기여가 있음을 최근에 새롭게 알게 되었다.

자연을 사랑한 친절한 선생님, 장 앙리 파브르
 
 150년이 지나도 변함없는 지혜를 전해주는 파브르 선생님의 다정한 식물기
ⓒ 휴머니스트
  
곤충학자로 잘 알려진 파브르는 곤충기(1879)를 집필하기 3년 전 식물기를 썼다. 1876년 발간된 <파브르 식물기>(조은영 옮김, 휴머니스트출판그룹, 2023)가 150년을 건너 새 옷을 입고 다시 나왔다.
'파브르 식물기라니?'라는 호기심에 비롯된 독서로 파브르라는 사람을 재발견했다. 그는 단순한 곤충학자가 아니라 모든 자연을 지극히 사랑한 섬세한 사람이었다. 또한 빼어난 화가이자 문장가, 다정한 선생님이었고. 
 
"식물은 동물의 자매다. 식물도 동물처럼 먹이를 먹고 자손을 낳으며 살아간다. 식물을 알고자 하면 동물을 들여다보는 것만큼 확실한 방법이 없고, 동물을 이해하자면 식물의 본성을 살피는 것만큼 빠른 방법이 없다." - 9쪽 <파브르 식물기>, 장 앙리 파브르

파브르는 히드라와 산호처럼 식물에 가까워 보이는 동물의 습성을 설명하며 책을 시작한다. 식물 또한 동물처럼 숨을 쉬고 먹고 (심지어) 잠을 자고 자손을 번식한다는 것을 친절하게 설명한다. 덕분에 첫 장에서부터 이런 놀라운 발견을 마주할 수 있다. "식물은 단일 존재가 아닌 집합적 존재다."(19쪽)

나무 한 그루는 하나의 개체가 아니라 작은 공동체와 비슷하다. 식물의 가지 하나에는 여러 개의 눈이 다음 가지가 될 운명을 안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눈은 식물 사회의 단위체(개체)이며 공동체의 일원이다. 내가 가지의 적당한 부분을 잘라 뿌리를 내리게 한 뒤 독립된 또 하나의 화분을 만들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눈' 덕분이다.

"나무의 세대는 몸통인 줄기에서 시작해 큰 가지를 거쳐 가장 최근에 자라난 잔가지까지 단계적으로 추적할 수 있다. 잎을 달고 있는 새 가지는 현재 세대다.(…) 눈은 가까운 장래에 모습을 드러낼 미래 세대,(…) 나무줄기와 그 아래쪽의 굵은 가지들은 과거 세대다."(21쪽) 한 개의 화분에서 자라는 나무 한 그루가 인간에 비유하자면 하나의 씨족 마을(공동의 조상을 가진 혈연 공동체)인 셈이다.

나도 모르게 일반적인 통념에 기대어 화분 하나에 자라는 식물을 개체라고 믿어왔다. 일상에서는 한 화분에서 가지를 잘라 새로운 개체를 만드는 작업까지 수행했으면서 하나의 식물이 공동체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으니 우리가 무언가를 보고 안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얼마나 커다란 구멍이 있는 걸까.

파브르 선생님 덕분에 우리집 화분에는 휘커스라는 씨족 사회와 몬스테라라는 씨족 사회가 살고 있다는 걸 새롭게 배웠다. 하나의 화분 안에 한 식물의 과거 세대와 현재 세대, 미래 세대가 공존한다고. 인간의 사회가 축약되어 담긴 화분에 경이로움을 느끼다 거기 숨은 자연의 원리를 깨닫고는 숙연해졌다. 그건 바로 상생과 지속성이다.

식물은 개체가 아니라 상생으로 존재하는 공동체
 
▲ 자라나는 휘커스 씨족 마을 부모 휘커스에서 꺾꽂이 한 아이들이 새 둥지에서 자신들의 공동체를 일구고 있다.
ⓒ 김현진
  
식물은 공동체를 지탱하는 뿌리와 잎에서 만들어진 양분을 누구 하나가 독차지 하지 않고 공동체 안의 모든 구성원이 동일하게 나누어 갖는다. 어떤 식물들은 자신(개체)은 말라 떨어져 나가면서 다음 세대를 위해 양분을 남겨 놓는다. 부모 세대가 자식 세대를 먹이고 키우면 자식 세대는 부모 세대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체가 되고, 그러면서 또 후대를 길러낸다.

끝없이 후손을 낳고 후대를 위해 양식을 만들고 먹이는 일을 식물은 당연하다는 듯 행한다. 그러니 인간 부모가 자식을 낳고 희생과 헌신으로 아이를 키우는 일이 어떤 숭고함이나 특별함을 보여주는 면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체가 갖는 보편적인 임무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바로 자연의 원리라고. 우리가 다음 세대를 위해 지금 누리는 것을 잘 보존하고 더 나은 것을 물려주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살아있는 생명체라면 마땅히 따라야할 삶의 방식이라고.

식물이 몸소 실행하고 있는 공생의 원리가 새삼 놀라운데 식물은 그 존재 자체로 지구 생명의 존속에 기여한다. 태양과 흙으로부터 스스로 에너지원, 즉 양분을 만들 수 있는 생명체는 오직 식물 밖에 없다. 그 밖의 동물과 사람은 식물을 먹거나 식물을 먹어 양분을 얻은 또 다른 동물을 먹음으로 에너지를 얻기 때문이다. 모두를 먹여 살리는 식물이 있어 지구 생명계는 다채로움과 풍성함을 입는다.

식물의 번식에 동물과 곤충이 기여하기도 한다. 동물은 식물을 먹고 배설물로 씨앗을 옮기거나 몸에 묻혀 씨를 나르면서 식물의 이동과 번식을 돕는다. 수술과 암술이 분리되어 존재하는 식물의 경우 식물의 꿀을 먹기 위해 꽃을 찾아온 곤충이 암술머리로 꽃가루를 옮기는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동물과 곤충의 생존에 식물이 필수적이듯 식물의 삶에도 그들의 도움이 긴요하다.

이들 관계를 떠올리면 지구라는 생명계는 서로 다른 존재의 긴밀한 협력으로 생명을 나르는 모세혈관으로 이루어진 것 같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치밀하게 짜인 그물망을 오가는 상생의 흐름이 없다면 전체 생명도 유지될 수 없다.

멈춰 있는 듯 보이는 식물조차 하나의 개체 안에서 공생과 상생, 후대를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식물의 삶은 더할 나위 없이 동물과 유사하고, 자연을 구성하는 식물과 동물은 상생과 지속성이라는 자연의 원리를 충실히 따른다.

그렇다면 자연의 일부이자 활발하게 움직일 수 있고 언어를 통해 사고와 의사소통까지 가능한 인간은 어떻게 그 원리를 실천할 수 있을까. 공존을 위한 노력이 살아있는 존재와 공동체의 기본 원리라는 걸 기억하며 새해를 시작하고 싶다.

《 group 》 시민기자 북클럽 3기 : https://omn.kr/group/bookclub_03
책을 통해 책 너머의 세상을 봅니다. 서평 쓰는 사람들의 모임,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북클럽' 3기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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