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에게 부끄럽지 않은 정치인?

임병식 2024. 1. 3.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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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치와 상식 갖추고 공동체를 생각하는 정치인이라야

[임병식 기자]

 <노량: 죽음의 바다> 스틸컷
ⓒ 롯데엔터테인먼트
 

새해가 밝은 지 사흘째, <난중일기>를 다시 펼쳤다. 단문으로 쓴 글은 맑고 담백하다. 전쟁터에서 쓴 글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차분하다. <난중일기>를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말 그대로 풍전등화와 같았던 1592년, 이순신 장군이 있었다는 게 기적처럼 여겨진다. 그때 장군이 없었더라면 나라가 보전됐을까. 생각하면 아찔하다. 많은 이들은 이순신을 전쟁 영웅으로만 소비하고 존경한다. 세 편의 영화가 그런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일조했다. 하지만 이순신을 전쟁만으로 평가한다면 절반만 아는 것이다. 명량과 한산도, 노량해전은 빛나는 성과임이 분명하다. 이순신의 진면목은 다른데 있다.

'신은 이미 준비를 마치었나이다'는 이순신의 생을 집약한다. 그는 끊임없이 준비하고 대비했다. 절대적 열세를 극복하고 대군을 격파한 건 치밀한 준비였다. 장군은 임진왜란 7년을 글로 기록했다. 임진년(1592년) 1월 1일부터 무술년(1598년) 11월 17일까지다.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면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자신을 마주하고 글을 썼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게다가 치밀하다. 날씨와 작전활동, 상관과 갈등, 가족 이야기를 비롯해 당시 정치상황까지 꼼꼼하다. <난중일기>는 임진년 1월 1일부터 시작한다. 조선군과 왜군의 첫 교전은 4월 14일이다. 전쟁에 앞서 4개월 전부터 일기를 썼다.

이순신이 전라좌도 수군절제사로 부임한 건 1591년 2월. 임진왜란 한해 전이다. 장군은 부임과 함께 전쟁을 준비했다. 병기를 점검하고 무너진 성을 다시 쌓았다. 거북선 건조는 기적적으로 전쟁 하루 전에 끝냈다. 당시 정치 상황은 어지러웠다. 왕(선조)은 무능했고, 조정은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죽고 죽이기를 반복했다. 2년 전 발생한 기축옥사(1589년) 후유증도 채 가시지 않았다. 조정은 모함과 불신으로 가득 찼다. 지리멸렬한 정치상황에서도 이순신은 소임을 감당했다. 임지를 돌며 무기고를 점검하고 민심을 다독였다. 또 <난중일기>를 쓰고 활을 쐈다. 이 모든 걸 전쟁 직전, 1년 2개월 만에 마쳤다.

이순신은 인격적으로도 성숙했다. 자기희생과 절제, 연고주의 배척, 백성과 부하에 대한 연민, 공동체를 위한 공적 분노까지 헤아리기 어렵다. 이순신은 무관이지만 독서와 글쓰기를 통해 내면을 다졌다. <난중일기>에서 반복되는 단어는 글과 활, 어머니다. 이순신에게 글쓰기와 활쏘기는 자기수양이다. 글을 쓰며 생각을 다듬고, 활시위를 당기며 의지를 다졌다. 틈나는 대로 부하들과 활을 쏜 것 역시 긴장감을 잃지 않기 위해서였다. 전쟁 직전 1~4월까지 무려 30차례 활쏘기 대회를 열었다. 나아가 연민과 자애로 백성과 부하들을 품었다. 전쟁에서 가장 큰 적은 내부 분열이다. 그는 그들과 하나가 되는 법을 알았다.

이순신은 사소한 이익에 연연하지 않고 당당했다. 집안 관계에 있는 율곡과의 만남을 사양하고 직속상관의 부당한 인사 청탁을 거절하고 쓰고 남은 공물은 반환했다. 지나칠 만큼 철저했기에 외로웠다. 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행동에 옮겼다. 막내아들에게 사가(私家)를 지키게 하고 나머지 아들과 조카를 데리고 참전했다. 전쟁 7년 동안 아내를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아들 면은 전쟁터에서 잃었다. 유일하게 정을 드러낸 대상은 홀어머니였다. 그나마 노모가 숨지기 1년 전에야 특별휴가를 얻어 며칠을 같이 보냈을 뿐이다. 노모 또한 "나라의 치욕을 갚는 것이 급하니 어서 돌아가라"며 사보다 공을 앞세웠다.

이순신은 23년 군인으로 지냈다. 그 기간 중 세 차례 파직과 두 차례 백의종군을 당했다. 나라를 위해 헌신했지만 돌아온 건 모함과 비난, 투옥이었다. 그러나 사적 분노를 드러내지 않았다. 이순신이 위대한 건 이런 자세에 있다. 소설이나 영화를 만들어도 이처럼 드라마틱한 삶이 있을까 싶다. 원균의 모함으로 서울로 압송되어 감옥에 갇힌 이순신은 사형 직전 사면 받았다. 34일 동안 온갖 고초를 치르고 나온 첫날 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맑다. 옥문을 나섰다.' 누굴 탓하지도 원망도 비난도 없다. 그저 담담하다. 이어 가족 지인과 이야기 나누고, 누가 찾아와 만났고, 누구에게 위로 서신을 받았다고만 적었다.

4·10 총선을 앞두고 국가와 국민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이들로 넘쳐난다. 국회의원을 해야만 봉사할 수 있는 것인지, 또 몇이나 마음가짐을 갖췄는지 의문이다. 그들에게 기대하는 건 최소한의 염치와 상식이다. 모든 걸 내던진 이순신 장군의 염결성을 기대하는 게 아니다. 절제와 배려를 토대로 공동체를 위해 헌신할 준비가 되었는가다. 이순신 장군은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전선이 있습니다"라며 결의를 다졌다. 장군께서 "준비를 마쳤느냐"라고 묻는다면 자신 있게 답할 사람은 몇이나 될까. 국민을 두렵게 알고, 상대를 존중하고, 자신의 책무를 무겁게 여기는 정치인이 아쉬운 새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한스경제>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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