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에서 가장 예쁘다는 이유로 마녀사냥 당한 소녀
[장혜령 기자]
▲ 영화 <립세의 사계> 스틸컷 |
ⓒ (주)디스테이션 |
<립세의 사계>는 6년 전 <러빙 빈센트>로 세계 최초 유화 애니메이션을 선보인 엘치먼 부부의 두 번째 작품이다. <러빙 빈센트>는 독보적인 작업 방식으로 영감을 안겼고 큰 사랑을 받았다. 고흐의 죽음을 추리하며 그날에 닿아가는 흥미로운 접근 방식이었다. <러빙 빈센트>가 푸른색에 가까운 죽음의 이미지였다면 반대로 <립세의 사계>는 생명력이 넘치는 붉은색의 정열이 특징이다.
<러빙 빈센트>보다 실사 영상에 가까워 유화의 분위기는 덜하다. 대신 부드러우면서도 훨씬 역동적인 움직임으로 화려한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 폴란드 전통 혼례, 춤, 투쟁 장면 등이 격정적 장면과 매칭된 영상미가 압권이다. 전작과는 다른 페인팅 애니메이션 기법 방식으로 완성되었다. 배우가 연기한 실사 영상에 프레임 단위로 유화를 덧입히는 방식에 애니메이팅 기술을 활용했다.
100여 명의 아티스트와 25만 시간을 소요해 30인의 명화를 구현한 기적 같은 협업이다. 밀레의 <이삭 줍는 사람들>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헤우몬스키의 <인디언 섬머> 등의 명화가 녹아들어가 있다.
원작은 브와디스와프 레이몬트 소설 <농민>이다. 노벨 문학상을 받았으며 폴란드 필수 정규 과정에 포함된 국민 소설이자 대하소설이다. 원작의 방대함 속에서 자유와 벌목권을 뽑아 각색한 듯 보인다. 19세기 폴란드 농촌 마을 립세의 사계절을 배경으로 욕망이 들썩이는 순간과 관계를 들여다 본다. 꽃이 피고 열매 맺고 잎사귀를 떨구는 자연스러운 계절의 순환처럼 매혹적인 여성을 두고 벌이는 이전투구이며, 한 여성이 작은 마을에서 원치 않는 소문에 휩싸여 마녀사냥 당하는 이야기다.
▲ 영화 <립세의 사계> 스틸컷 |
ⓒ (주)디스테이션 |
평화로운 마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 야그나(카밀라 우젱도브스카)는 남성들의 관심은 물론 여성들의 시샘도 한몸에 받고 있다. 농사일을 돕고 남는 시간에는 종이 공예를 즐기는 평범한 야그나. 결혼 적령기가 되자 어머니는 '사랑은 없어도 땅은 남는다'며 늙은 부농 보리나와 혼인을 추진한다. 나이가 많고 재혼이면 어떠랴, 법적 아내라면 유산이 모두 야그나 차지가 될 것이 뻔할 거라며 욕심부렸다.
얼마 전, 아내를 잃고 새 아내를 찾고 있던 보리나에게 많은 땅을 받고 딸을 서슴없이 내주었다. 가장 예쁠 때 최고가로 팔린 물건처럼 여겨진 야그나는 어떤 주장도 반항도 하지 못하고 불행한 결혼 생활을 시작한다. 하기야 결혼이 아니라면 여성 혼자 살아갈 힘도 능력도 발휘할 수 없는 사회에서 결혼은 당연한 관례였기에 수긍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나 결혼 후에도 추문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는다. 갖지 못한 것을 질투하는 얄팍한 남성들의 이기심은 순식간에 야그나를 헤픈 여성으로 만들었다. 가난한 소녀에서 갑자기 부잣집 마님이 된 야그나를 시기하는 여성들은 험한 말을 내뱉어 야그나를 몰아간다. 남성들은 호시탐탐 야그나를 탐하고, 여성들은 남편을 질책하기보다 야그나를 혐오하는 데 혈안 되어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야그나는 보리나의 아들 안테크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어 파국을 예고한다. 안테크는 부자인 아버지의 유산(땅) 중 제 몫을 얻기 위해 대립하다 오히려 쫓겨나 분노하게 된다. 처자식을 데리고 추위를 피해 가난한 처가로 떠날 수밖에 없었고 일자리까지 구하지 못해 배고픔까지 더해갔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야그나와 만나며 남편과 가장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
그러던 중 땅 문제로 주민들과 다툼을 벌이던 지주의 행동으로 온 마을이 들썩이며 혼란스러워진다. 결국 보리나가 벌목권을 두고 앞장서 지주와 대립하다 사망에 이르자, 그녀의 인생 또한 송두리째 달라져 버리고야 만다.
▲ 영화 <립세의 사계> 스틸컷 |
ⓒ (주)디스테이션 |
야그나는 모두가 손가락질하지만 가장 순수한 존재다. 마을 사람들이 야그나로 화살을 돌리려 할 때도 야그나는 부와 권력, 땅을 탐한 적 없다. 오직 사랑만을 원했다. 부적절한 관계임을 알지만 자신을 사랑한 안테크와 결혼 후에도 계속 만났던 이유다. 그로 인해 행복했고, 사랑하는 순간만은 자유로웠다. 점차 부와 탐욕에 찌들어 가는 마을 사람들 앞에서도 야그나는 당당하다. 잘못을 빌지도, 억울하다고 호소하지도 않는다. 그저 자유를 갈망했던 한 여성의 욕망만 있을 뿐이었다. 치명적인 아름다움은 때론 이처럼 독이 되어 버린다.
아이러니하게도 분노한 마을 사람들로 인해 나체로 진흙탕에 버려졌을 때서야 진정 자유로워진다. 버려진 야그나는 구정물을 뒤집어쓰고 나서야 더욱 순수해진다. 쫓겨난 게 아니라 탈출에 성공한 야그나는 시선, 압박, 구속으로부터 해방된다. 씨앗이 땅에 떨어져 비와 함께 소생하는 만물의 기원으로서 성장한다.
다만, 이야기적으로는 진부한 편이다. 19세기 소설이 21세기로 옮겨졌지만 공감받기는 어렵겠다. 30점의 명화 오마주와 케케묵은 서사가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야그나가 받는 정신적, 육체적 폭력과 불행이 내내 전시되고 있어 보는 동안 괴롭다. 자본주의로 인해 전통과 현대, 여성과 남성의 대립이 과격하게 벌어지는 현장을 목격한 느낌이다. 라스 폰 트리에의 <도그 빌>(2003)이 떠오르는 고급스러운 막장 드라마 한 편을 본 불편함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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