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덮고서야 알았다, 내가 기다려왔던 소설이라는 걸
[홍기표 기자]
▲ 책 <작은 땅의 야수들> |
ⓒ 다산책방 |
<작은 땅의 야수들>은 재미교포가 쓴, 일제강점기 시대를 배경으로 한 역사 소설이다. 글 속에서 인물들이 살아 숨쉬는 것 같아서 몰입감이 최고였다. 이야기 속에서 나는 무언가를 찾느라 정신이 없었다. 마지막 장까지 넘기고 나서야 내가 읽고 싶었던 역사 소설을 찾았다는 반가움인 것을 알았다. 이런 책에 대한 일종의 그리움 때문이었던 것 같다.
최근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논란 등 그의 독립운동이 폄하된 사건이 있었다. 부정확한 사실과 억지스러운 논리로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독립운동을 평가하는 세상이 슬펐다. 책에서 본 해방 직후 친일을 숨기기 위해 벌어졌던 일들이 실제로 일어난 것만 같았다.
안중근 장군은 조선의 독립이 동북아의 평화와 정의가 승리해야 한다는 세상의 순리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다. 그런 조선의 독립은 공산주의, 민족주의 등의 진영에서 모두가 함께 바래왔던 꿈이었다. 일제로부터 해방이 실현된 후 우리는 38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나뉘어졌고, 거대 자본주의의 신탁통치를 받으며 한민족의 정체성보다 국제 질서의 필요에 의해 제단되었다. 그로 말미암아 결국 민족상잔의 비극인 6.25 전쟁으로 뼈 아픈 상처를 입어야만 했고 우리는 여태껏 서로를 적으로 두고 다투고 있다.
▲ 육군사관학교 내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에 항의하는 독립운동가 후손(윤기섭 선생의 외손자 정철승 변호사,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 선생 증손자 이항증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공동대표, 지청천 장군 외손자 이준식 전 독립기념관장)들이 지난해 9월 15일 오후 서울 노원구 육군사관학교 정문에서 ‘육사 명예졸업증’을 반납하는 모습.(자료사진) |
ⓒ 권우성 |
1945년 해방 뒤 이후 근 80년이 흐른 지금 과연 우리는 진정한 독립을 성취했을까. 또한 안중근 장군이 바랐던 정의로운 세상이 도래했을까. 지금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 때문에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이러한 시대 흐름 속에 재미교포가 영어로 쓴 이 소설은 큰 울림이 있다. 작가의 외 할아버지는 김구 선생 옆에서 독립운동을 했다고 한다. 집안에서 한국어를 쓰고, 많은 한국 역사 이야기를 들어온 그녀는 자신의 기억로부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교훈을 다시 끄집어냈다.
너무나 훌륭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이토록 한국적인 소설이 세계적인 관심을 받고 있다는 것에 다시 한번 K-콘텐츠에 자부심을 느낀다. 아마존 베스트셀러부터 권위있는 문학상 최종 후보에 이르는 등 출판 후 1년동안 정말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중이다. 덕분에 강제노동, 위안부 문제 등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제국주의 일본의 과오에 대한 질책이 다양한 국가로부터 이어지고 전쟁이 끊이지 않는 국제 사회에 정의와 평화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소설은 기생 옥희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이야기는 3.1운동이 시발점인 1918년부터 해방 후 박정희 독재정권이 들어섰던 1964년까지 이어진다.
가난했던 그녀는 어릴적 가족으로부터 기생집에 팔리게 된다. 이후 평양에서 경성(지금의 서울)으로 가게 된다. 경성에서 기생으로 살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예인이 되는데, 결국 전국적으로 유명한 영화 배우가 된다.
옥희를 중심으로 여러 남자가 등장한다. 한국의 토지와 광산을 차지한 일본 장교, 권세를 유지했던 친일파 사업가, 공산주의 독립 운동가와 그의 수제자인 거지 왕초 출신의 독립 운동가, 인력거를 몰다 자수성가한 자동차 사업가 등이다. 옥희가 그들 사이에서 겪는 사랑과 이별, 폭압과 투쟁의 이야기가 불행했던 시대상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옥희는 그녀를 둘러싼 한국의 사정과 국제정세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 단지 살아남고자 했고 그녀에게 주어진 기예를 훌륭히 익혀 근사한 예인이 되어 선망을 받았다. 그리고 순애보에 한 평생을 바쳤다.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친구의 고백을 받아들이지 못함에 미안해했고, 그럼에도 그녀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앞에서 한없이 나약하게 때로는 강한 용기로 생명을 이어갔다.
"문학은 인간 안의 잠재된 양심 불러일으켜야"
"진정한 예술은 어떻게 인간이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지 제시하고, 깊이 잠재된 양심과 영혼을 불러일으켜야 합니다. 문학은 그럴 수 있는 힘, 의무가 충분하다고 믿어요."
- 김주혜 작가, <Vogue>와의 인터뷰 중
김주혜 작가는 문학은 그저 하나의 읽을거리가 아니라고 했다. 철학의 정수이며 불가능한 도전을 가능케 하는 하나의 원동력이라고 했다. 내가 이 소설을 읽고 난 감동은 어디를 향해 달려가는 것일까. 창작이라는 건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사실에 새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 아닐까.
알고 있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알고 있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행동의 변화를 가져오게 해야 한다. 우리에게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역사가 있고 그로부터 우리의 정체성을 지키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살아온 위인들이 있다는 것은 일반적인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사실로부터 누군가에게 삶의 지향점을 제시하는 건 좀 더 특별하다.
일제강점기 동안 우리 조상들이 지키고자 했던 것은 알량한 눈 앞의 이익이 아니라 몇 천 년을 이어온 전통과 또 몇 천 년을 이어갈 미래의 근본에 대한 열정이었다. 믿고 따라야 할 덕목이 부패와 사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의 안에 있다는 믿음의 발현이었다. 비루한 현실을 뛰어 넘을 만큼 그들의 이상은 담대하고 단단했던 것이다.
지금의 우리는 어떠한가. 지금 내가 믿고 따르는 것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을 느낌표로 바꿔가는 게 문학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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