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뇌를 100% 사용하는 인간이 있다면?
[양형석 기자]
지금은 마블 히어로 영화들이 완성도와 재미 면에서 '예전 같지 않다'는 평가와 함께 크게 고전하고 있다. 하지만 2010년대 세계 영화계는 '마블 강점기'라고 요약할 수 있을 정도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에서 제작한 슈퍼히어로 영화들의 기세가 대단했다. 실제로 2010년대에 개봉했던 21편의 마블 히어로 영화는 도합 217억 2500만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흥행성적을 기록하며 세계극장가를 지배했다(박스오피스 모조 기준).
MCU에는 많은 매력적인 히어로들이 등장하지만 그중에서 '블랙 위도우'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조금 특별하다. <아이언맨2>에서 페퍼 포츠(기네스 펠트로 분)의 비서로 처음 등장한 블랙 위도우는 <어벤저스>를 통해 정식으로 어벤저스 원년멤버에 합류했다. 그리고 모든 <어벤저스> 시리즈를 비롯해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저>와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에 출연하면서 2020년까지 단독무비 없이도 MCU의 대표 인기캐릭터로 자리매김했다.
▲ 2014년에 개봉한 <루시>는 뤽 베송 감독이 연출한 영화 중에서 가장 높은 흥행성적을 올렸다. |
ⓒ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 코리아(주) |
충무로 배우들의 할리우드 진출사
2023년에도 디즈니플러스드라마 <카지노>를 통해 건재한 연기를 보여줬던 최민식은 2014년 김한민 감독의 <명량>으로 1761만 관객을 동원하며 한국영화 역대 최다관객 기록을 세웠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그런 최민식이 <레옹>을 만들었던 뤽 배송 감독의 신작에 출연한다고 알려졌을 때 영화팬들의 관심이 쏠리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최민식이 <루시>에 출연하기 전에도 한국 배우들의 할리우드 영화 출연은 꾸준히 이어지고 있었다.
1990년대 초·중반 한국영화의 원톱배우로 군림하던 박중훈은 1990년대 후반 두 편의 할리우드 영화에 출연했다. <터미네이터>의 마이클 빈과 함께 출연했던 액션영화 <아메리칸 드래곤>과 <양들의 침묵>을 연출했던 조나단 드미 감독이 만든 <찰리의 진실>이었다. 하지만 <아메리칸 드래곤>은 현지에서 B급영화 취급을 받았고 마크 월버그와 팀 로빈스가 출연했던 <찰리의 진실>에서는 박중훈의 비중이 너무 작았다.
2008년에는 국내에서 가수로 정점을 찍었던 비가 <매트릭스>를 만들었던 더 워쇼스키스의 신작 <스피드 레이서>에서 조연 캐릭터인 태조 토고칸 역을 맡으며 할리우드에 진출했다(이 영화에는 지오디의 박준형도 조·단역으로 출연했다). 비는 이어 더 워쇼스키스가 제작에 참여한 <닌자 어쌔신>에서 주인공 라이조를 연기했지만 4000만 달러의 제작비로 만든 <닌자 어쌔씬>은 6160만 달러 흥행으로 만족스런 성적을 올리지 못했다.
더 워쇼스키스가 한국에서 눈 여겨 본 배우는 비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2012년 더 워쇼스키스의 신작 <클라우드 아틀라스>에는 한국배우 배두나가 출연했고 배두나는 이를 계기로 <주피터 어센딩>과 <아이엠히어>, 드라마 <센스8> 등에 출연하며 본격적으로 미국활동에 박차를 가했다. 배두나는 올해 < 300 >과 <저스티스리그> 등을 연출한 잭 스나이더 감독의 신작 <레벨 문-파트1: 불의 아이>에 출연했다.
2020년대 들어서는 한국문화가 널리 알려진 만큼 한국배우들의 할리우드 활동도 더욱 활발해졌다. 2020년엔 윤여정 배우가 한국계 정이삭 감독의 <미나리>에 출연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했고 2021년 마블 히어로 영화 <이터널스>에는 마동석이 길가메시를 연기했다. 그리고 지난 2023년 11월에 개봉했던 <더 마블스>에서는 박서준이 '캡틴마블' 캐럴 댄버스(브리 라슨 분)와 정략결혼을 한 알라드나의 왕자 얀 역으로 출연한 바 있다.
▲ 약물로 인해 뇌의 100%를 사용할 수 있게 된 루시는 전지전능한 인물로 거듭나게 된다. |
ⓒ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 코리아(주) |
뤽 베송 감독은 <제5원소> 이후 심혈을 기울여 만든 신작 <잔 다르크>가 실망스런 성적을 기록한 후 감독으로 슬럼프에 빠졌다. 하지만 <트랜스포터>와 <택시> <테이큰> 시리즈 등의 제작과 각본에 참여하며 여전히 제작자와 각본가로 명성을 이어갔다. 하지만 <제5원소> 이후 감독으로 확실한 흥행작이 없던 뤽 베송 감독이 '블랙 위도우' 스칼렛 요한슨이 출연하는 신작 <루시>를 들고 나왔을 때 국내 관객들은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루시>는 "인간은 죽을 때까지 자신이 가진 뇌용량의 10% 밖에 사용하지 못한다"라는 속설을 바탕으로 "자신의 뇌를 100% 사용하는 인간이 있다면?"이라는 상상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루시>는 생명공학과 유전자 조작 등을 다룬 다소 어려운 소재를 뤽 베송 감독 특유의 감각적인 액션연출로 풀어내며 4억 6900만 달러의 높은 흥행성적을 올렸다. 이는 <제5원소>(2억 6300만 달러)를 훌쩍 뛰어넘는 뤽 베송 감독의 역대 최고 흥행기록이었다.
흥미로운 소재와 전개로 제작비의 10배가 넘는 수익을 올렸지만 정작 영화를 이끌고 가는 주인공 루시 역을 맡은 스칼렛 요한슨의 연기는 관객들로부터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사실 연기력을 평가 받을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극 중 루시는 뇌사용 용량이 늘어날수록 감정은 점점 사라지는 설정이었기 때문에 스칼렛 요한슨은 자신의 캐릭터에 맞게 루시의 무미건조한 감정을 잘 표현한 셈이다.
사실 할리우드 영화에서 한국인이 등장하는 장면들을 보면 한국어가 익숙하지 않은 배우들의 어색한 발음과 연기 때문에 영화몰입에 방해가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하지만 <루시>에서는 메인빌런 미스터 장 역의 최민식을 비롯해 미스터 장 수하의 조직원들도 대부분 한국인 배우들을 캐스팅해 한국관객들이 보기에도 크게 어색한 부분을 찾을 수 없다. 심지어 무술감독 겸 배우 서정주가 연기한 인물은 극 중 배역 이름도 '정주'였다.
<루시>는 제작비의 10배가 넘는 수익을 올리며 뤽 베송 감독의 건재를 알리는 작품이 됐다. 뤽 베송 감독은 기세를 몰아 2017년 프랑스 영화 역사상 가장 많은 제작비(1억 7700만 달러)를 투입해 만든 데인 드한 주연의 <발레리안: 천개행성의 도시>를 선보였지만 제작비조차 회수하지 못하는 큰 시련을 경험했다. <발레리안>의 실패로 영화 제작사의 경영진은 책임을 지고 총사퇴했고 뤽 베송 감독 역시 성과급을 반납했다.
▲ 최민식(왼쪽)은 <루시>에서 메인빌런 미스터 장 역을 맡아 관객들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를 발휘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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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친절한 금자씨>와 2010년 <악마를 보았다> 사이에 약 5년의 공백기가 있었던 최민식은 2012년 <범죄와의 전쟁>, 2013년 <신세계>를 통해 건재한 연기를 보여줬다. 2014년 여름에는 김한민 감독의 <명량>으로 조금 늦은 감이 있는 '천만 배우'에 등극했다. 하지만 늦은 만큼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는 한국영화 역대 최다관객 배우로 단숨에 올라섰고 그해 가을 할리우드 영화 <루시>에서 악역 미스터 장을 연기했다.
최민식은 존재만으로 화면을 장악하는 카리스마를 선보이며 관객들을 압도했고 의도적으로 무미건조한 연기를 했던 스칼렛 요한슨 대신 영화의 온도를 높였다. 특히 최민식의 이름을 몰랐던 영화 평론가 크리스 스턴만은 "<올드보이> 그 아저씨 연기 정말 잘하더라"는 표현으로 최민식의 연기를 극찬했다.
<루시>에는 지난 2011년 미국영화연구소(AFI) 평생공로상을 수상한 모건 프리먼이 '인간이 10~15% 이상의 뇌를 사용하는 방법을 알아내면'이라는 가설을 연구하는 노먼 교수를 연기했다. 초·중반까지는 주로 강의를 하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생명체는 주위 환경이 나쁘면 불멸을 추구하고 주위 환경이 좋으면 번식을 추구한다'는 황당한 이론을 설명한다. 하지만 이 비현실적인 강의는 대배우 모건 프리먼의 진지한 연기와 만나 묘한 설득력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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