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분의 아이들세상] 트라우마 후 성격이 변한 여학생
중학교 2학년 여학생 K는 집단 폭행을 당했다. 이후에 잠을 자지 못하고, 불안해 했다. 모든 사람을 경계하고 집밖에 나가질 못한다. 어떤 날은 예민해 짜증을 심하게 내고 작은 소리에도 놀란다. 어떤 날은 온종일 넋을 놓고 무엇에도 집중을 못 한다. 오랫동안 이런 극단적 상태를 오락가락하니, 가족들도 ‘아이가 변덕스럽게 성격이 변했다’고 느끼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정신적인 트라우마 후에는 각성 수준의 조절이 되질 않아 이해할 수 없는 기복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교감신경계, 복측 미주신경, 배측 미주신경의 작용을 오가면서 나타나는 생리적 현상으로 트라우마에 따른 방어기전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호랑이를 만났다고 가정해 보자. 이 상황에선 몸속의 혈류가 뇌가 아닌 사지로 보내진다. 심장은 빠르게 뛰고, 호흡도 가빠지고 예민해지는 교감신경계가 활성화돼 과잉각성이 된다. 가능한 한 빨리 도망가려고 할 것이다. 또 맹수에 쫓기는 작은 동물이 죽은 듯이 마비를 보이는 사례를 동물 다큐멘터리에서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약한 동물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저각성 상태, 즉 얼어붙은 듯 마비 상태로 만들어 죽은 듯이 보여 위험을 피하게 되는 거다. 복측 미주 신경계의 작용이다.
저각성 상태에서는 멍해짐, 집중력 저하, 심하면 해리 현상까지 경험할 수 있다. 대개 트라우마를 겪은 과잉각성(예민함)과 저각성(멍함)을 번갈아 느끼게 되는데 이를 잘 조절하면 그 중간의 적당한 각성을 유지하는 ‘허용 범위’에 있게 할 수 있다. 이는 배측 미주신경에 의해 매개되는데, 트라우마 이전의 상태로 회복하는데 중요한 기전이다. 비유하자면 ‘두 강둑 사이를 흐르는 물줄기’다. 위쪽 강둑 너머는 요동치고 불안정하며, 통제할 수 없는 곳이고, 아래쪽 강둑 너머는 정체되고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인데, 두 강둑 사이에는 이들 극단 사이의 균형을 이루는 강줄기가 흐른다.
트라우마로 유발되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게 되면, 어떤 날에는 극도로 경계하는 상태였다가 다음 날에는 무감각하고 텅 빈 채 옴짝달싹 못하는 상태를 겪게 된다. 그래서 K의 가족처럼 ‘트라우마를 겪은 후 성격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경과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트라우마에 대한 자기방어 기전으로 동물에서도 보이는 진화의 산물이다. 이런 것을 설명해주면 ‘변화된 자신에 당황하던 당사자나 가족’들이 조금은 안심할 수 있다.
호랑이에 쫓겨 긴장해서 도망하는 것처럼, 맹수에 포위되었을 때 죽은 듯이 보이며 살아남는 작은 동물처럼, 비극적인 사건 이후 각성의 동요는 살기 위한 몸부림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동요하는 두 강둑 사이의 안전한 물줄기, 즉 ‘허용 범위’로 안내할 수 있을까?
트라우마에 대한 개입의 1단계는 자신의 내면 및 환경에서 안정되고, 안전하다는 감각을 확립하도록 안정화하는 거다. 최대한 익숙하고 편안한 환경에 있도록 하고, 트라우마 상황과 현재는 전혀 다른 환경임을 알아차리고 편안한 사람과 눈을 맞춘다. 트라우마의 기억으로 무서워하면 “그때는 무서웠었지?. 그건 ‘그때’ 일어났던 일이고, 지금은 ‘그때’와는 다른 ‘현재’이고, 자신이 ‘그곳’이 아닌 ‘여기’에 엄마, 아빠와 같이 있다”는 사실을 계속 알아차릴 수 있도록 도와준다. 발이 땅에 닿아 있는 느낌을 느껴보도록 하고, 주변에 익숙한 책상과 침대, 커튼 등 보이는 물건을 말하도록 도와 안전한 환경임을 알게 해준다.
각성을 조절하기 위해서 호흡을 통한 마음 챙김 기법을 활용하여 각성의 수준이 ‘허용 범위’ 안에 머물도록 조절할 수 있다. 과잉각성일 때는 호흡을 좀 더 깊고 느리게 하도록 하고, 저각성 상태일 때는 호흡을 조금 더 강하게 빠르게 하도록 한다. 이렇게 각성 조절이 어느 정도 되고 안정화 후에 트라우마에 대한 기억을 더욱 적극적으로 처리하고 재구성하는 작업을 하게 된다.
예전에는 이런 노출 작업을 우선으로 하였으나 각성 조절이 심각하게 손상된 상태에선 트라우마를 상기시키는 것들에 지나치게 과민해져서 걷잡을 수 없는 기복을 겪게 되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감정의 카타르시스도 이 상태에선 일시적인 도움 이상을 가져올 수 없다. 물론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은 경우엔 가족들의 도움만으로 충분하지 않으니 전문가를 반드시 찾도록 한다.
이호분(연세누리 정신과 원장, 소아청소년 정신과 전문의,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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