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택배기사가 되었나... 목사로서 사죄합니다 [목사가 쓰는 택배 이야기]

구교형 2024. 1. 3.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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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가 쓰는 택배 이야기- 마지막회] 만만치 않은 2024년... '여기 사람 있음'을 함께 외칠 수 있길

[구교형 기자]

 택배분류장
ⓒ 구교형
 
지난해 6월 처음으로 쓰기 시작한 연재를 한해 넘겨 오늘까지 30회로 마무리하려고 한다. 처음 연재를 부탁받을 때의 요청은 여러 활동을 해 온 목사로서 택배 일을 하고 있는 게 의미도 있고, 나눌 이야기가 특별할 테니 그런 이야기를 써 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꼭지 제목이 '목사가 쓰는 택배 이야기'였다.

사실 오마이뉴스 이전에도 그런 주제로 글이나 강의, 인터뷰해 달라는 요청을 많이 받아 생소할 건 없고, 할 말도 많았다. 그러나 이게 꼭 좋은 현상은 아닌 것 같아, 찜찜한 마음도 있었다. 목사가 무슨 특별한 사람이라서 현장 일을 하면 특이하거나 대견해 보이는 현상 말이다.

사실 목사(종교인)가 교회 울타리를 벗어나 이웃과 사회에서 '평범한' 무엇인가를 함께 하면 이상해 보이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마치 땀 흘리지 않고 무임승차로 먹고사는 불한당(不汗黨)처럼 말이다. 본래 종교인의 존재가 단지 자신만의 구원(해탈)이 아니라 세상의 구제로 향해야 함에도 지나치게 특별해지면 높은 성을 쌓고 홀로 자족하는 것이 되기 쉽다.

얼마 전 내가 잘 아는 한 교인은 이렇게 메일을 보내왔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강단에 서는 목회자분들이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성도들의 삶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많은 목사님이 교회 안에서 온실 같은 삶을 살면서 존경만 받고 칭찬만 받고 대접만 받는 삶을 사시다 보니 정작 하나님의 일을 한다면서 성도를 이해하지도 못하고 또 하나님의 마음도 이해하지 못할 때를 많이 봅니다. 그래서 목회자분들이 스스로 노동해서 일을 해보고 돈을 벌어보고 가정을 책임져 보는 일을 경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목사가 있어야 할 자리

사실 우리 목회자 사회에도 벌써 그런 바람이 불고 있다. 우선 더는 교회 헌금만으로 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운 목회자들이 평일에 다른 일을 맡는 일이 적지 않다. 원래부터 특권의 높은 성을 쌓고 누리는 목회자는 의외로 많지 않다. 한국교회 대부분은 미자립이고, 목사는 근로자 평균 임금에 턱없이 못 미치게 생활한다. 대다수는 흙 속에서 산다. 가까운 내 지인 목사도 교회를 접으려는 마음을 오래전부터 하고 있지만, 교인들보다 먼저 떠날 수는 없다며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꼭 경제적 어려움이 아니어도 목사가 있어야 할 이웃과 삶의 자리를 찾아보려는 노력 가운데 일을 하는 분들도 적지 않다. 나 역시 교인의 헌금만 받아 생활할 때는 그들의 생업 현장을 그다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택배 일을 하며 느끼고, 배우는 게 참 많았다. 예전에는 강의 한번하고 20~30만 원 받고서 기분 좋게 한턱 쓰는 일도 있었지만, 택배하고 대리운전하면서는 단돈 500원, 1,000원의 차이로도 물건을 들었다가 내려놓기도 한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만큼 힘들게 번 돈이라 더 신중해지고, 힘들게 헌금 내는 교인들의 마음도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나는 연재를 통해 우리 목회자들이 세상을 좀 더 이해하고 겸손해지기를 바랐다. 종교와 목사가 진짜 있어야 할 자리를 다시 느끼게 되었다는 뜻밖의 고백을 들을 때 큰 보람을 느낀다. 목사 아닌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목사도 할 수 있다. 목사 아닌 사람이 할 수 없는 건 목사도 할 수 없다. 다만 주된 능력과 전공이 다를 뿐이다.

그러나 나는 목사의 현실 감각을 과장할 마음도 없다. 어쨌든 목사(종교인)가 너무 현실적이기만 해도 안 된다. 종교인이 지나치게 정치에 해박하거나 경제 관념이 밝거나 일반상식에만 의존해 살아간다면 종교와 종교인이 존재할 이유가 없다. 우선 자신의 전문영역에 충실해야 한다. 종교인은 현실을 뛰어넘는 가치를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모두가 이해타산적이고 자기 잇속만 차리는데도 마치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처럼 다른 사람에게 틈을 내주고 제법 속기도 잘한다. 그러나 그게 진짜 몰라서라기보다 오히려 너무 자본주의적인 현실에 대한 저항으로 그리할 때 그게 지금 필요한 종교인의 모습이 아닐까?

나는 사회에서 교회를, 목사를 어떤 시선으로 보고 있는지 잘 알고 있으며, 늘 의식하고 있다. 늘 그럴듯한 말은 잘하면서도 진짜 어렵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자리에서는 비켜서 있는 것 같은 모습에 사람들은 실망을 넘어, 이제는 분노를 쏟아낸다.

내가 대표할 수는 없으나 목사의 한 사람으로 사죄하는 마음이다. 그래서 특권의식에 물들기 쉬운 종교인과 정치인은 자기 직업이 아니라도 가끔 생활 현장으로 나가 돈도 벌어보고, 서민이 살아가는 현장에서 함께 지내보는 경험도 가져보기를 권한다.

만만치 않은 2024년
 
 1일 오전 한 시민이 서울 영등포구 선유도공원 선유교에서 새해 첫 일출을 사진으로 담고 있다.
ⓒ 연합뉴스
이제 2023년이 저물었다. 그 모든 일이 한해에 다 있었는지 의심이 될 정도로 격정의 시간이었다. 새해 벽두부터 북한 위협을 대응한다는 한미일 동맹은 동아시아와 점점 세계로 확산되었고, 북중러의 더 강한 결속으로 한반도 위기는 어느 때보다 증폭되었다. 2022년 이태원 참사의 무능 정부는 작년에도 잼버리 망신으로 이어졌다. 얼마 남지 않은 생태환경 시간표에 정부는 별 관심이 없다. 기후 위기 극복을 위해 모인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도 산유국과 선진국의 홍보장처럼 되어버렸다.

독립운동사조차 지금의 흑백 이원론으로만 보며 홍범도 장군 사태를 일으킨 국방부와 군은 수해복구 작업 중 순직한 채 상병 사건은 오히려 은폐하며 12.12 사태 당시를 자꾸 떠올리게 했다. '결혼해라, 아이 낳아라' 온갖 주문은 하면서도 무고한 여자들이 거듭 죽어가는데 사회는 관심이 없고, 국민통합에 힘써야 할 정부 여당은 엉뚱하게도 서울편입 논란을 일으켰다. 이 모든 실정의 책임을 무겁게 인식해야 할 대통령은 자기 아내 문제는 회피하며, 재벌들과 떡볶이를 먹으며 돌아다니다가 2023년이 저물었다.

2024년도 벌써부터 만만치 않아 보인다. 마치 이전 일을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한 채 다시 새 일을 시작하는 것 같은 버거움을 느낀다. 특히 올해는 미국과 러시아의 대통령 선거, 대만 총통 선거 등 무려 50여 국가에서 대선, 총선이 예정되어 있다. 특히 트럼프가 다시 돌아온다면 미국을 넘어 전 세계가 더 크게 흔들릴 것이다.

그러나 나쁜 놈들을 통해서도 역사가 일어나기도 하는 것처럼, 어쩌면 트럼프의 당선은 적어도 한미일 vs 북중러로 빈틈없는 위기의 한반도에는 뜻밖의 돌파구가 일어날지도 모른다. 올해 우리나라도 4월 총선이 있다. 언제부턴가 정치가 국민에게 힘보다 절망을 주는 게 일상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이번 총선은 이준석, 이낙연 등을 통해 철옹성 같은 양당정치에 제법 적지 않은 균열이 일어나고 있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권력중독과 양당 기득권이 깨지고, 나라와 국민의 안위, 복리보다 반사이익과 당리당략이 우선하는 정치문화가 무너지는 기회가 되면 좋겠다. 그러나 정치가 풀지 못한다고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할 게 아니라 우리 서로가 '여기 사람 있음'을 외쳐서 깨울 필요가 있다.

사실 택배 일이라는 게 비슷한 업무의 반복이라 처음 연재를 시작할 때만 해도 열 번이나 쓸 수 있을까 싶었는데, 쓰다 보니 이것, 저것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대수롭지 않은 글에 의외로 뜨거운 반응을 보여주어 놀랍고, 감사하다. 내 생각이나 의견의 옳고 그름보다는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문제, 과제들을 함께 고민해 나가는 게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동시대인의 책임과 역할이 아닌가 싶다. 기회가 되면 또 다른 글에서 만날 것을 약속하며 이번 연재를 마친다.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이사야 40장 3~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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