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연임' 또 저격한 국민연금…공익 VS 관치
현 이사장 취임 이후 민간기업 CEO 인사 적극 개입
"스튜어드십 코드 적극 활용" "부당한 압력, 기업가치 하락" 시선 엇갈려
'주인 없는 회사'로 일컬어지는 소유분산 기업은 과거 정부 투자 기업이나 공기업이었다가 민영화되면서 소유가 분산된 기업들로, 대표적으로 KT, 포스코홀딩스, 각종 금융지주회사 등이 해당한다. 이들 기업은 확고한 지배주주, 이른바 오너가 없기에 최고경영자(CEO)가 광범위한 지배권을 가지게 되고, 이에 부적절한 장기 연임이 이뤄진다는 비판이 있었다. 국민연금이 이들 기업을 향해 스튜어드십 코드(기관투자자의 의결권 행사 지침)를 기반으로 지배구조 개선을 주문하는 이유다. 국민연금이 KT에 이어 포스코홀딩스의 차기 회장 인선 절차에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김태현 이사장 "포스코 CEO 선임 절차 공정성 의문"
김태현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은 아시아경제와의 통화에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포스코홀딩스 CEO 선임 절차의 공정성에 문제를 제기한 것과 관련해 "2022년부터 언급한 바람직한 소유분산 기업 구조에 대한 생각을 밝힌 것"이라며 "국민연금과 기금운용을 대표하는 이사장으로서 당연히 할 얘기를 했을 뿐"이라고 했다. 국민연금은 포스코홀딩스의 최대 주주다.
앞서 김 이사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소유분산 기업인 포스코홀딩스 대표 선임은 KT 사례 때 밝힌 바와 같이 주주 이익이 극대화될 수 있도록 내·외부인에게 차별 없이 공평한 기회가 부여돼야 한다"고 말했다. 포스코 CEO 후보추천위원회(후추위)에 대해서도 기존의 사외이사만으로 구성된 기구가 공정하고 주주의 이익을 충분히 대변할 수 있는지 주주, 투자자와 시장에서 적절히 판단하겠다고 했다. 최대 주주인 국민연금을 대표하는 이사장의 입에서 나온 말인 만큼 파급력이 컸다. 최정우 현 포스코 회장의 '3연임'에 제동이 걸렸다는 해석까지 나왔다.
김 이사장의 발언에 포스코 측은 즉각 "최정우 회장의 3연임 지원은 개인의 자유"라는 입장을 내놨다. "투명하고 공정하게 차기 회장 심사 절차를 진행해 나가겠다"는 뜻도 밝혔다. 포스코홀딩스 이사회는 최근 현직 회장에 대한 연임 여부를 우선 심사하도록 한 규정을 폐지한 뒤 CEO 후추위를 새로 출범시켰다. 현직 회장의 연임 의사 표명 여부와 관계없이 임기 만료 3개월 전에 회장 선임 절차가 시작되는 구조다. 사실상 현직 회장이 연임 의사를 밝히지 않아도 후보군이 되는 셈이다. 또 투명성을 높이기 위한 취지로 현직 회장의 연임을 우선 심사하는 '셀프 연임제'를 폐지하고, 후추위를 구성했다고는 밝혔지만 사외이사 7인 중 6인이 최 회장의 재임 기간 중 선임된 까닭에 종전 '셀프 연임'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최 회장의 친정체제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국민연금, 셀프연임 본격적으로 제동
국민연금은 문재인 정부 당시 '스튜어드십 코드'를 강화하면서 이사 선임에 영향력을 행사한 적은 있었지만, CEO 인사에 개입한 적은 없었다. 2019년 박능후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은 "국민연금이 특정 기업의 CEO 선임 과정에 개입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그러나 김 이사장 취임 이후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는 2022년 12월 취임 100일을 맞아 진행한 기자간담회에서 소유분산 기업의 지배구조 문제를 공개적으로 언급했고, 비슷한 시기 취임한 서원주 기금운용본부장 역시 "황제 경영, 셀프 연임에 대한 우려가 없도록 지배구조가 바뀌어야 한다"고 했다. 스튜어드십 코드가 CEO 인사 개입까지 확장될 수 있음을 시사했다.
KT는 국민연금이 지배구조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대표적인 기업이다. KT 역시 국민연금이 최대주주다. 2023년 초 이사회가 구현모 당시 대표의 연임을 결정했을 당시 "투명하고 공정한 절차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기금운용본부장 명의로 반대 입장을 밝혔다. 결국 국민연금의 반대로 구현모 대표, 구 대표와 가까운 윤경림 KT 사장 모두 낙마했다. 이후 KT는 지배구조 개선 태스크포스(TF)를 꾸리고 17차례에 걸친 집중 논의를 거쳐 CEO와 사외이사 선임 절차를 개선했다. 창사 이래 사상 초유의 CEO 부재를 경험한 KT의 '경영 공백'은 5개월이 지나서야 마무리됐다.
'김태현표 국민연금'은 소유분산 기업의 지배구조를 개선한다는 이유로 별도 조직까지 최근 신설했다. 이사장이 임명한 외부인사 10명으로 구성된 '지배구조 개선 자문위원회'다. ▲ 소유분산 기업 등의 바람직한 지배구조 방향 제시 ▲ 의결권 행사 기준의 적정성 검토 및 합리적 개선 ▲ 스튜어드십 코드 이행 상황 점검·자문 및 개선 역할을 수행한다.
주주 이익 실현 VS 부당한 압력 '기업가치 흔들'
국민연금의 행보에 대해서는 엇갈린 시선이 존재한다. '주주 이익 실현'을 위해 스튜어드십 코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긍정적인 의견이 있지만 부당한 CEO 교체 압력이나 이권 개입으로 기업 가치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또 주인 없는 회사에서 CEO들이 이사회를 측근으로 구성해 일종의 참호를 구축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보면서도 CEO 결정 과정에 정부가 개입하는 전례가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견해도 존재한다. 국민연금의 메시지는 정부의 뜻으로 받아들여져서다.
국민연금 주주권행사팀장을 역임한 법무법인 율촌의 문성 변호사는 "지금처럼 이사장이 나서서 CEO 인사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좋은 실적을 낸 CEO의 연임을 명확하지 않은 이유로 반대하는 것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국민연금이 CEO 인사에 개입하거나, 개입 중인 KT와 포스코는 모두 지난해 역대 최대 실적을 낸 기업들이다.
포스코홀딩스 차기 회장 최종 후보 선출까지 한 달 남짓 남은 가운데 국민연금의 개입으로 경영진이 줄줄이 사퇴했던 KT의 전철을 밟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KT의 경우 국민연금에 이어 2대 주주인 현대차도 경영진이 물러나야 한다는 의견을 공개적으로 피력한 반면 포스코홀딩스의 2대 주주인 블랙록은 이렇다 할 입장을 내놓은 적이 없다. 포스코홀딩스 지분의 75.86%를 보유하고 있는 개인 투자자들은 대체로 현 경영진에 우호적이다. 포스코홀딩스 주가가 지난해 80.6% 상승하며 이차전지 열풍을 주도했기 때문에 대부분 수익을 누렸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표 대결'로 가더라도 국민연금의 뜻대로 흘러가기는 어려운 환경인 셈이다.
오유교 기자 5625@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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