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 10년 일기장을 펼치며

2024. 1. 3. 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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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문득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나?' 하고 깨닫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나에게도 시간의 흐름을 느끼는 특별한 순간들이 있다.

대단한 인생의 기록을 써 놓은 것은 아니지만, '작년 오늘에는 가족들과 여행을 갔었구나. 그때 아이들이 무척 좋아했었는데...'라든지, '맞아, 그때 유행하던 드라마는 그거였지?'와 같은 소소한 감상을 느낄 수 있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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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지현 변호사


누구나 문득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나?’ 하고 깨닫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나에게도 시간의 흐름을 느끼는 특별한 순간들이 있다.

그 첫 번째 순간은, 하루를 마무리하며 10년 일기장을 쓰는 때이다. 올해인 2024년은 이 일기장을 써온 지 꼭 10년이 되었다. 10년 일기장은 오늘과 같은 날짜에 과거 10년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한눈에 훑어볼 수 있도록, 작은 칸을 나누어 놓은 노트이다. 대단한 인생의 기록을 써 놓은 것은 아니지만, ‘작년 오늘에는 가족들과 여행을 갔었구나. 그때 아이들이 무척 좋아했었는데...’라든지, ‘맞아, 그때 유행하던 드라마는 그거였지?’와 같은 소소한 감상을 느낄 수 있어 좋다. 매년 연말에는 이 일기장으로 한 해를 돌아보며 올해의 10대 뉴스나, 감사 제목을 뽑아보기도 한다.

두 번째 순간은,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주기적으로 알려주는 ‘오늘의 사진’을 볼 때이다. 10년 일기장을 쓰는 사람은 많지 않아도, 스마트폰 화면에 예기치 않게 뜨는 사진 알림을 받는 분은 많을 것이다. 지금은 데면데면한 사춘기 자녀들도, 스마트폰이 알려주는 7년 전의 사진 속에서는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나에게 손하트를 날려주고 있다. 그 옆에 함께 찍힌 내 모습이 ‘그때는 몰랐는데 참 젊고 고왔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이런 날 저녁, 집으로 갈 때는 가족들을 위한 따끈따끈한 붕어빵이라도 사 가고 싶어진다.

세 번째 순간은, 법률 서류를 쓸 때이다. 먼저 파일 양식을 불러와 컴퓨터 모니터에 띄워놓고 내용을 작성한 후 제일 마지막으로 작성 날짜를 쓴다. 이때, 양식에 있는 ‘2023년’이라는 숫자의 끝에 마우스 커서를 대고 ‘3’을 지운 후 ‘4’를 입력하는 순간, 갑자기 의미심장한 기분을 느끼는 건 나만의 경험일까? 단지 숫자 하나를 고쳤을 뿐인데 다사다난했던 한 해가 정리되고, 인생의 새로운 서막이 시작되는 웅장한 기분이랄까?

2024년 새해를 맞이하며 내가 몸담은 법조계에서 지워야 할 숫자 ‘3’은 무엇이고, 새롭게 수정해서 넣어야 할 숫자 ‘4’는 무엇일까 생각해보게 된다. 사법부는 새로운 규범을 창조하는 기관이 아니라, 존재하는 규범을 해석해서 판단하는 기관이기에 그 성질상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렇지만 옛것만 답습해서는 새로운 환경을 따라가기 어렵다. 요즘 법조계의 분위기는 새로운 법 해석으로 기존 법리를 바꾸기보다는 이를 무비판적으로 따라가는 것 같아 조금 답답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여러 해 전 판사가 재판 중에 “변호사님, 지금 하시는 주장은 대법원 판례와 배치되는 것 아시지요? 이 주장은 철회하시지요”라고 권한 적이 있는데,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변호사가 기존의 대법원 판례만 따라 주장한다면 전원합의체로 대법원 판결이 바뀌어야 할 이유도 없지 않을까? 오히려 기존에 확고해 보이던 대법원 판례가 나의 새로운 견해를 받아들여 바뀔 때 변호사로서 진정한 보람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싶다. 법조인들이 패기 있게 새로운 환경에 따른 새로운 법리를 주장하고 해석하는 일이 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특히 사람의 생명에 대한 가치를 더 높게 평가하고, 사람의 안전에 관한 일은 더 엄격해졌으면 좋겠다.

시간의 흐름을 느낄 새도 없이 살다 보면, 변해야 할 것도 변하지 않은 채 정신없이 살게 되기 십상인 것 같다. 이런 의미에서 2024년 한 해에는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는 나만의 자리를 별도로 마련해보면 어떨까? 오늘 새해 첫 근무를 시작하면서 마우스 커서를 ‘2023’의 맨 마지막 숫자에 놓고, ‘3’을 지우고 ‘4’를 입력했다. 2024년의 첫 번째 결정문이 완성되었다.

안지현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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