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 너무 잘해 더 열받아”…황정민씨, 사과하세요

나원정 2024. 1. 3. 0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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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서울의 봄’의 1200만 흥행 비결에는 배우들의 열연이 첫손에 꼽힌다. 쿠데타 주동자 ‘전두광’을 연기한 주연 황정민(사진)은 인생 악역을 경신했다는 평가와 함께 ‘베테랑’ ‘국제시장’에 이어 세번째 천만 흥행작을 갖게 됐다. [사진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배우 황정민(53)이 삼천만 배우가 됐다. 그가 주연한 영화 ‘서울의 봄’(감독 김성수)이 새해 첫날 누적 관객 수 1200만을 넘어섰다. 2일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22일 개봉한 ‘서울의 봄’은 이날 1211만 관객을 기록했다. ‘태극기 휘날리며’(2004)를 밀어내고 역대 흥행 19위가 됐고, 18위 ‘택시운전사’(2017)의 1218만에도 바짝 다가섰다. ‘국제시장’(2014, 1426만), ‘베테랑’(2015, 1341만 관객)에 이어 그의 세 번째 천만 영화다.

1979년 12·12 군사반란을 그린 ‘서울의 봄’에서 그가 연기한 보안사령관전두광은 불법 쿠데타를 위해 최전방 병력까지 동원하는 인물이다. ‘장군의 아들’(1990) 단역으로 스크린에 데뷔한 그의 33년 연기 내공이 ‘서울의 봄’에 농축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인간이란 동물은 강력한 누군가가 리드해주기를 바란다니까” “기왕이면 혁명이란 멋진 단어를 쓰십시오” 등 전두광의 자기합리화 장면마다 상영관에선 실소가 터졌다.

영화 ‘달콤한 인생’(2005) 의 악랄한 백사장, ‘아수라’(2016)의 부패 정치인 박성배, 넷플릭스 드라마 ‘수리남’(2022)의 마약 대부 전요환 등 악역이 처음은 아닌데도 그의 전두광 연기에는 “너무 잘해서 더 열 받는다”는 찬사가 쏟아졌다. 그런 탓에 무대인사마다 사과부터 한다.

베테랑

그는 비정한 동성애자(‘로드 무비’), 순정파 시골총각(‘너는 내 운명’), 맹인 검객(‘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능구렁이 같은 무당(‘곡성’) 등 장르를 넘나들며 독보적인 캐릭터를 창조했다. 김성수 감독과 처음 만난 ‘아수라’에선 “절대 믿으면 안 되는 눈”(극 중 검사 김차인 대사)을 가진 박성배를 열연했는데, 연기가 “거짓말에도 진심을 담는”(황정민) 경지에 이르렀다. “캐스팅만 성사되면 (박성배 캐릭터는) ‘꽁’으로 먹지 않을까 했다”는 김 감독 노림수가 적중했다.

김 감독은 ‘서울의 봄’도 그를 캐스팅하면서 “영화를 만들 수 있겠다고 확신했다”고 했다. 전두광 역으로 그를 떠올린 건 “‘아수라’의 장례식 장면 리허설에서 보인, 진짜 사람을 해칠 것 같은 생각이 들 만큼 생생한” 캐릭터 ‘빙의’ 능력 때문이다. 황정민도 “무조건 대본을 많이 보며 그 인물에 나를 갖다 붙이려 노력한다”며 “나 편하자고 대본 속 인물을 내 쪽으로 데려오면 관객이 늘 똑같은 황정민을 보게 되고, 그럼 재미없을 것”이라고 여러 인터뷰에서 설명했다. 그런 그의 연기관은 “연기는 원래 괴로운 것이다. 남의 인생을 사는데 그렇게 쉽게 살 수 있겠나”라는 말에도 녹아 있다.

국제시장

연기 소신은 ‘서울의 봄’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김 감독은 “실존 인물을 따라 할 필요가 없었지만, 황정민은 외국 배우들처럼 자기 모습을 지우고 역사 속 그 인물로 보이고자 했다”고 전했다. 촬영마다 대머리 가발·코 특수분장에만 3~4시간 걸렸다. 황정민은 클라이맥스의 화장실 장면을 최고 난관으로 꼽았다. 전두광이 홀로 승리에 취해 폭소하는 장면이다. 탐욕의 끝으로 치닫는 내면 묘사가 관건이었다. 시나리오에 ‘웃는다’ ‘운다’ 같은 모호한 지문만 있었다. 오랜 고민과 여러 시도 끝에 “교활함과 수많은 감정이 응축된 탐욕”(황정민)을 웃음에 실은 명장면이 나왔다.

2005년 ‘너는 내 운명’으로 남우주연상을 받은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 “스태프들이 차려놓은 밥상에서 그저 맛있게 먹었을 뿐”이라고 했던 그지만, 사실은 본인이야말로 밥상을 차려온 배우다. 소처럼 열심히 영화를 찍는다고 해서 ‘소정민’이란 애칭도 얻었다. 코로나19 시기에도 묵묵히 작품을 찍었다. 액션영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2020), 본명으로 출연한 저예산 영화 ‘인질’(2021), 요르단 로케이션 촬영한 ‘교섭’(2023), 특급 카메오로 나온 ‘헌트’(2022)와 ‘길복순’(2023), ‘서울의 봄’까지 영화 6편과 드라마 ‘수리남’, 연극 ‘리처드 3세’까지 장르 넘나들며 여덟 작품을 선보였다.

“극장 문을 나서는 관객한테 ‘재밌다’는 말도 듣고 싶지만, ‘돈이 안 아깝다’는 말을 더 듣고 싶다”는 그의 활약은 새해에도 계속된다. ‘곡성’의 나홍진 감독과 재회한 차기작 ‘호프’를 촬영 중이며, 액션 영화 ‘크로스’, 형사물 ‘베테랑 2’도 올해 개봉 예정이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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