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회윤 단장이 말하는 T1 스토브리그 비하인드

윤민섭 2024. 1. 3.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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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1은 지난해 11월 서울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LoL 월드 챔피언십(롤드컵)’을 우승해 7년 만에 e스포츠 세계 정상의 자리를 되찾았다. 하지만 이들에겐 우승의 여운을 느낄 새도 없었다. 우승트로피를 들어 올린 지 불과 이틀 만에 주전 선수 5인 중 3인이 자유계약(FA)으로 전환됐던 까닭이다.

T1은 우승의 기쁨을 누리는 대신 바로 시작된 스토브리그에 집중, 선수들과 재계약에 총력을 기울인 끝에 ‘제우스’ 최우제, ‘구마유시’ 이민형, ‘케리아’ 류민석을 모두 붙잡는 데 성공했다. T1의 정회윤 단장이 지난달 28일 서울 강남구 소재 팀 사옥에서 국민일보와 만나 이적시장의 후일담을 전했다.

-최우제·이민형·류민석 등 3인의 FA 선수를 모두 잡는 데 성공한 비결은.
“FA 시장에 나갔던 3인의 선수 모두 본인이 성장하고, 배울 수 있는 환경을 중시했다. 단순히 뛰어난 성적을 내고 좋은 조건으로 대우받는 것을 떠나서 프로게이머로서, 인간으로서 성숙해질 환경의 조성을 원했다.
선수가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들로 팀을 구성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좋은 리더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김정균 감독 영입을 이번 T1 스토브리그 작전의 첫 단추로 삼았다.
김 감독 영입을 포함한 선수단 성장 환경의 마련이 재계약의 첫 번째 비결이었다면 두 번째는 선수들의 T1에 대한 로열티(loyalty)였다. 선수들이 T1을 사랑한다는 게 협상 과정에서도 느껴졌다. 나와 팀으로선 감사한 일이다.”


-김 감독의 영입은 언제부터 계획했나.
“롤드컵 시작 전에 입단을 제안했고 대회가 마무리되기 전에 계약을 마무리 지었다. 대회 결과를 지켜본 뒤에 충동적으로 접근했다는 인상을 김 감독에게 드리고 싶지 않았다. 그는 오래전부터 우리의 플랜A였다. 그래서 ‘롤드컵 성적과 관계없이 모셔오고 싶다’는 뜻을 대회 시작 전에 말씀드렸다.
팀은 처음에 2년 계약을 제시했다. 팀의 미래가 불확실한 2년 뒤의 한 해는 그에게 메리트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김 감독이 3년 계약을 역으로 제안했다. 본인이 팀에 남아 있으면 내년과 내후년에도 건강한 팀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앞서 7년 머물렀던 T1인 만큼 한 팀에서 10년을 보내고 싶다고도 했다.”

-왜 다른 지도자가 아닌 김 감독을 모셔오고 싶었나.
“사실 커리어만으로도 선수들의 존경을 받는 감독이지만, 워낙 직관적인 결과물인 만큼 따로 언급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김 감독의 네 가지 장점을 높게 샀다. 첫째는 게임을 읽는 능력이다. 그는 선수의 공과 과를 객관적이고 납득가능한 선에서 잘 짚어준다. T1처럼 높은 수준의 게임 이해도와 나름의 철학이 있는 선수들에게 자신의 뜻을 관철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높은 수준의 게임 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
두 번째는 섬세함이다. 실제 경기도 중요하지만 그에 앞서 경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섬세하게 팀을 보듬을 인물이 필요했다. 선수 본인들이 섬세하게 케어받는다고 느낄 정도로 자주 얘기를 나누고 지도할 수 있는 감독을 원했다.
세 번째는 정통성이다. 오랫동안 T1을 응원해오신 팬분들에게 이번 김 감독 선임은 유달리 뜻깊게 다가올 것이다. 그는 이 팀을 세 차례 세계 정상에 올려놓은, T1이란 프랜차이즈를 만든 개국공신이다.
네 번째는 열정이다. e스포츠 감독으로서 얻을 수 있는 모든 명예를 얻었지만 김 감독은 여전히 게임을 사랑한다. 선수들과 게임을 주제로 대화하는 걸 변함없이 즐거워한다. 이런 감독과 함께 하면 어떤 선수가 게임에 몰두하지 않을 수 있을까.”

-김 감독의 선임을 확정 짓고, 롤드컵 우승을 하자마자 스토브리그를 맞았다.
“애초 팀의 1차 목표는 스토브리그가 시작되는 21일 전에 3명의 선수 모두와 재계약을 체결하는 것이었는데 이루지 못했다. 올해는 항저우 아시안게임의 여파로 이적시장 준비 기간이 예년보다 짧았다. 선수들과 대화를 나눌 시간이 부족했다. 스토브리그 시작 후에는 숨 돌릴 틈도 없이 선수들과 협상 레이스를 이어나갔다.
꿈에 그리던 롤드컵 우승을 이루자마자 선수들과 이별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과 고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가장 받아들이기 어렵고 안타까웠다. 훌륭한 선수들인 만큼 본인들이 추구하는 비전에 부합하는 팀이라면 어디든 갈 수 있다고 생각했고, 다만 그게 우리 팀이었으면 했다.”

-결과적으로 3인의 선수를 모두 잡았다.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내년에도 다섯이 다 같이’가 결정된 이후로는 협상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화요일(21일) 오전 9시에 스토브리그가 시작됐고, 수요일 밤에 FA로 전환됐던 3인의 선수가 모두 잔류할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그때부턴 속전속결로 협상이 이뤄져서 목요일 새벽에 재계약 소식을 발표했다.”

-협상 과정에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우제가 평소에 개인방송이나 일상대화에서 말버릇처럼 ‘오케오케~’라는 말을 한다. 그런데 중요한 협상 상황에서도 ‘오케오케~’하고 말하니까 웃음이 나오더라. 백종원 더본코리아 대표 성대모사를 하면서 ‘아따~야~’하니까 무겁던 분위기가 풀어졌다. 첫날 협상이 난항을 겪었는데 그때는 전화로 ‘잠 좀 주무시면서 쉬엄쉬엄 하십쇼!’ 하더라(웃음).”

라이엇 게임즈 제공


-CL 팀에도 스웨덴 출신 ‘레클레스’ 마르틴 라르손을 영입해서 화제가 됐다.
“‘레클레스’ 얘기를 하기에 앞서 CL 팀에 대해 얘기를 해야 한다. T1의 1군은 이미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다. 하지만 1군뿐만 아니라 T1 전체를 훌륭한 조직으로 만드는 게 내 역할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수 발굴과 유망주 성장 시스템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여겼다. 좋은 시스템은 좋은 사람들과 좋은 리더로부터 나온다. 김 감독을 모셔온 것과 궤가 같은데, 나는 감독과 코치의 역량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창석 감독을 소집해제 전부터 CL 팀의 사령탑으로 낙점해뒀다. 이 감독은 나름의 게임 철학이 확고한데 그걸 타인에게 설파하는 능력도 뛰어나다. 이론에 빠삭한 사람은 많은데 그걸 남에게 쉽게 풀어서 설명해주는 사람은 많지 않다. CL 팀의 재목들이 이 감독을 만나면 더 많이 성장할 수 있다고 봤다.
CL 팀의 탑라이너·미드라이너·원거리 딜러와는 2024년에도 함께하기로 결정해놓고 정글러와 서포터를 새로 구하는 과정에서 이 감독과 대화를 많이 나눴다. LCK CL에서 활약할 만한 수준의 서포터가 없고, 유망주들에게 멘토가 되어줄 경력과 연륜이 있는 선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포비’ 윤성원에게는 현역 시절 같은 포지션으로 활약했던 이 감독이 멘토가 되어줄 수 있는데 ‘스매시’ 신금재에게는 그런 역할을 해줄 선배가 없었다. 신금재는 이미 LCK CL에서는 어떤 선수와 함께해도 본인이 주도적으로 게임을 풀어나가야 하는 수준의 선수가 됐다. 그런데 나는 아직 게임을 더 배우는 것이 선수에게 좋을 것으로 봤다.

라이엇 게임즈 제공


그런 고민을 하던 10월 중 ‘레클레스’가 FA로 전환됐다는 포스팅을 봤다. 거꾸로 이 선수를 영입하면 안 될 이유를 이 감독과 함께 생각해봤다. 첫 번째 기량, 두 번째 조건, 세 번째 언어와 문화 차이. 우선 포지션을 바꿔서 과도기를 겪을 수는 있겠지만 LEC를 평정했던 선수가 LCK CL에서 기량 미달로 어려움을 겪을 것 같지는 않았다.
조건 역시 ‘레클레스’에게 ‘당신을 특혜로 데려오는 게 아닌 만큼 합숙 등 조건은 CL 팀의 스탠다드(standard)를 따라야 한다’고 했더니 알았다고 하더라. 예외 사례를 만들어선 안 된다는 팀의 사정을 그가 이해해준 셈이다. 그는 정말 도전을 하러 한국에 왔다.
LCK에는 그동안 다언어를 쓰는 팀이 없었지만 LPL, LEC, LCS에는 전례가 많다. 정 안 되면 손짓, 발짓을 해가면서라도 한국인 용병들과 합을 맞췄다. LPL 팀들은 한국인 선수와 함께했을 때 롤드컵을 우승했다. 언어장벽이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게 ‘레클레스’의 영입을 포기할 만큼 높은가 하면 아니라고 생각했다.
LCK든 LCK CL이든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탤런트 풀(talent pool)의 글로벌화를 고민해야 할 시기라고 생각한다. EPL, MLB는 물론 미국이 수십 년간 독식해온 NBA마저도 결국 세계화됐다. 니콜라 요키치(세르비아), 야니스 아데토쿤보(그리스), 조엘 엠비드(카메룬) 등 해외 선수들이 정상으로 군림하고 있다. 리그의 세계화는 뷰어십 상승뿐만 아니라 인재 유입에도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당장 T1이 외국인 선수를 꼭 LCK 팀에 기용하겠다는 뜻은 아니지만 LCK CL에서 ‘레클레스’의 여정은 선수, 팀, 리그에 모두 의미 있는 도전이 될 거로 생각한다.”

-올해 T1의 스토브리그 움직임에 점수를 매긴다면 몇 점을 주고 싶은지.
“답안지는 이미 제출했고 채점 결과는 팀의 성적으로만 알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지금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이번 스토브리그에서 우리가 플랜A라고 여겼던 모든 것을 이뤄냈다는 점이다. 후회 없다. 내가 생각하는 최선의 답을 써서 냈다.”

라이엇 게임즈 제공


-롤드컵 우승으로 7년 만에 왕좌를 되찾았다. 일각에선 탈환보다 수성이 어렵다고도 하는데.
“김 감독을 모셔온 이유 중에 그것도 있다. 롤드컵을 우승한 팀이 이듬해에도 결승 무대에 오른 케이스가 역사상 세 번 있었다. 2015~2016년의 T1, 2016~2017년의 T1, 2020~2021년의 담원 게이밍이다. 그 세 번의 현장 모두 김 감독이 디펜딩 챔피언의 사령탑으로 있었다. 왕좌 수성의 경험이 있는 분을 꼭 모셔오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1군 선수들을 믿는다. 올해 정말 많은 어려움과 고난, 좌절, 밑이 보이지 않는 것 같던 슬럼프를 겪었다. 챔피언 타이틀을 수성해낼 자격과 소양을 충분히 갖춘 선수들이다. 단장으로서 그들이 필요로 하는 걸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겠지만, 특별하게 뭘 하려고 애쓰기보다는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유지하려 한다. 그렇게만 하면 충분히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T1이 2024년을 맞아 추구하는 목표는 무엇인가.
“다시 T1의 왕조를 구축하는 것이다. 올해 많은 분이 몰입하고 공감했던 T1의 서사와 성장 과정을 2024년에도 이어나가겠다. 거시적인 목표는 건강한 팀, 지속 가능한 팀을 만드는 것이다. T1은 LCK의 리딩 클럽으로서 리그의 발전과 순환 생태계 조성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 노력들이 좋은 결과로 이어졌으면 한다.”


-끝으로 인터뷰를 통해 하고 싶었던 얘기가 있다면.
“선수들에게 고맙다고 전하고 싶다. 선수단이 롤드컵을 우승한 후에도 정말 바쁘게 지낸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이후 글로벌 아이콘으로 거듭났던 드림팀의 멤버들처럼, ‘페이커’ 이상혁을 포함한 5명의 T1 선수들도 2023년의 성과 덕분에 대중적 인지도가 전보다 훨씬 높아졌다. 평소 같으면 경기 외의 활동을 줄였을 텐데 이번에는 선수들이 프로게이머를 대표하는 얼굴이 됐다 보니 대외 활동을 줄이기가 어려웠다. T1에 다섯 선수가 있다는 게 다행스럽고 또 고맙다. 그들이 내년에도 건강하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또한 김정균 감독이 팀에 오셔서 개인적으로도 정말 뜻깊고 좋다고 꼭 전하고 싶다.”

윤민섭 기자 flam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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