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알코올 맥주에서 술기운 대신 얻은 것 [마흔이 서글퍼지지 않도록]
[남희한 기자]
술자리가 좋다. 삶의 팽팽한 긴장감이 느슨해지는 느낌과 그와는 반대로 서로가 조금은 단단해지는 느낌이 묘하게 기분을 하늘거리게 한다. 안주는 그리 중요치 않다. 맛있는 안주가 곁들여지면 더욱 좋겠지만 술이 있는 자리라면 우선은 즐겁고 본다.
▲ 술자리는 언제나 즐겁다. |
ⓒ Pixabay |
소주의 감성이 탐나긴 한다. 꽤나 작은 잔에 꽤나 큰 인생의 고단함을 담아 가볍게 들어 올려 삼키고 싶다. 입안을 휘감고 지나가는 쌉싸름한 느낌에 가벼운 입맛을 다시며 캬~ 하고 터져 나오는 작은 소리에 위안을 얻고도 싶다. 이게 다 드라마 탓이다.
시도를 해본다. 그런데 소주라는 것이 입에 들어 온 순간 몸이 이상해진다. 온몸이 찌릿하고 닭살이 돋으면서 목구멍으로 잘 넘어가지 않는다. 애써 참고 넘기면 속에서 받아주지 않는지 역한 느낌이 들며 인상이 한껏 구겨진다. 꾸역꾸역 우겨넣었던 감성이 구겨진 얼굴 주름 사이로 기화한다. 감성이고 뭐고 물부터 찾는다. 거부반응이 확실하다.
거부감을 이겨내며 애써 소주와 콜라보를 해보지만, 돌아오는 것은 "왜? 토할 것 같아?" 하는 걱정 섞인 반응뿐이다. 애당초 술 한 모금에도 몸 전체가 빨개지는 탓에 어설프게 감정을 잡아 봤자, 분위기를 조성하는 게 아니라 위기감만 조장한다. 그래서 드라마에서 보던 감성연기는 무기한 연기중이다.
대안으로 맥주를 마신다. 뭔가 들뜨는 느낌이라 소주 특유의 감성을 흉내 낼 순 없지만 거부반응은 확실히 덜하다. 빨개지는 몸까진 어쩔 수 없지만 탄산이 들어간 아주 진한 보리차를 마신다는 느낌으로 들이켠다.
혼술이란 것은 남의 이야기다. 혹자는 혼자서도 거창하게 차려서 술을 즐기거나 그냥 조촐하게 반주로 즐긴다고 하는데, 몇 번의 경험상 술은 혼자 먹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혼자 먹는 술은 이상하게 맛이 없다. 그렇다보니 집에서 술 마시는 일도 자주 없다. 가끔 당길 때 아내를 꼬셔보지만, 아내는 술이 별로란다. 그리고 네 아이는... 어... 이건 아니지. 암. 아니지.
네 아이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술맛을 모르는 게 다행이기도 하다. 책장 모서리에 찍혀 머리가 찢어지고 고열에 경련을 일으키고... 지금은 제법 컸다지만 또 언제 응급실로 달려가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거나하게 취하는 건 좀 부담스럽다.
무알코올의 매력에 빠지다
▲ 도수가 0.05% 미만의 맥주 술이 아니라 하지만 내겐 충분하다. (왼쪽 두 개는 무알콜, 나머지는 논알콜) |
ⓒ 각 제조사 사이트 캡처 |
무알코올 맥주는 생각 이상으로 괜찮다. 술맛은 나는데 취하질 않는다. 술은 한 잔 하고 싶은데 운전을 해야 한다거나 아이를 돌봐야하는 상황이라면 이만한 게 없다. 사실, 유일한 대안이다.
게다가 맛있다. 입맛마다 다르겠지만, 제법 다양한 맛으로 제조되기에 취향에 따라 골라먹는 재미도 쏠쏠하다. 일부 제품에는 비타민까지 첨가되어 있다. 술을 마시고 있는데 기력이 보충되는 느낌. 특별하다. 그리고 진짜 취하는 느낌도 든다. 맛에 취한 탓인지 분위기에 취한 탓인지 모르겠지만, 내게 있어서만큼은 술로써 부족함이 없다.
약간의 알코올이 필요할 때는 처음부터 알코올을 넣지 않고 제조하는 무알코올 맥주가 아닌, 마지막 단계에서 알코올을 0.05% 미만으로 만드는 논알코올 맥주를 선택한다.
1% 미만은 음료로 분류되는데 그게 무슨 술이라며 항변하는 지인도 있지만, 청소년에겐 판매하지 않는다는 걸 주장하며 함께 '짠' 해줄 것을 당당히 요구한다. 캬~ 역시 같이 먹어야 더 맛있다.
주변의 술꾼들에게 이런 무알코올 맥주의 매력을 이야기했다. 당연하게도 상종을 안 해준다. 허기야 맥주도 음료수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쓸데없는 이야기다. 그래도 다행히 술자리에는 껴준다. 무알코올을 마시고도 만취한 사람과 잘 어울리는 능력을 높이 산 것 같다.
단언컨대, 무알코올에서 술기운을 얻는다는 것은 감히 돌로 금을 만드는 연금술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경이로운 걸 내가 해내고 있다. 여러 사정이 겹쳐 얻어낸 독특한 능력이라고 할까.
한때는 고무줄도 아닌 술을 늘리고 싶어 나를 참 많이도 잡아당겼다. 무리해서 소주 나발을 불다가 낯선 화장실에서 깨어나기도 하고, 다니는 곳곳에 인간적인 방식으로 영역 표시를 하기도 했다. 중간에 내릴 수 없었던 지하철 막차에서 친구의 후드티를 펼쳤다가 간신히 속을 진정시킨 나 자신을 대견해하기도 하면서.
이제는 무리하지 않는다. 설렘을 위해 새로움을 찾던 나이를 지나 안정감을 추구하는 나이가 되어 거울을 보니, 여기 저기 토해가며 무리하게 술을 마시던 청년이 어느덧 무알코올 맥주를 즐기는 중년의 아저씨가 되어 있다.
술 한 잔 하지 않고도 술자리를 즐기는 아저씨. 취한 척 언성을 높이거나 춤사위도 벌일 줄 아는 중년. 눈가의 주름이 조금은 여유로워 보인다.
어차피 모든 것엔 때가 있는 법
어느덧 40년을 넘게 살았다. 불확실한 일이 줄어든 만큼 새로움의 즐거움도 줄어들었다. 주변에서 이제는 딱히 재미난 게 없다는 말에 공감하기도 한다. 삶이 밋밋해진 느낌. 그런데, 어쩐지 그 느낌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 조금은 밋밋한 무알코올 맥주를 즐기는 것처럼 밋밋한 삶을 즐긴다.
좋아하는 작가의 글에서 '나이 듦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마도 무리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라는 문구를 보고 크게 공감하고 있는 것을 보면, 나도 이제는 불안하기만 했던 젊음과의 자연스런 멀어짐에 준비가 된 것 같다.
무리하지 않는다. 잘 하지 못하는 것을 잘하기 위해 욕심내기 보다는 잘할 수 있는 다른 많은 것들을 경험한다. 무작정 노력하기 이전에 잘 할 수 있는 것을 먼저 찾는다. 나만의 페이스로 주어진 모든 것을 이용하고 거기서 만족을 얻는다. 어쩌면, 나이가 든다는 것은 나를 위해 영악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직은 국내에서 무알코올 소주를 쉽게 접할 수 없어 아쉽다. 일본 제품이 판매되고 있긴 하지만, 무알코올이 대세를 타고 국내에서도 다양한 제품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다. 애써 무리하지 않는다. 어차피 모든 것엔 때가 있는 법. 오랫동안 미뤄두었던 감성연기가 머지않았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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