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 어린 전두광에 열받는다"…황정민 '욕받이' 자처한 까닭
배우 황정민 세 번째 천만
배우 황정민(53)이 삼(三)천만 배우에 등극했다. 지난해 11월 22일 개봉한 영화 ‘서울의 봄’(감독 김성수)이 새해 첫날 누적 1200만 관객을 넘어섰다.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서울의 봄’은 이날 1211만 관객을 기록하며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2004)를 밀어내고 역대 흥행 18위 ‘택시운전사’(2017)의 누적 관객수 1218만명에 바짝 다가섰다. ‘국제시장’(2014, 1426만 관객), ‘베테랑’(2015, 1341만 관객)을 잇는 황정민의 세 번째 천만 영화다.
1979년 12‧12 군사반란을 그린 ‘서울의 봄’에서 그가 맡은 보안사령관 전두광은 불법 쿠데타를 성공시키기 위해 최전방 병력까지 동원하는 인물이다. ‘장군의 아들’(1990) 단역으로 스크린 데뷔한 황정민의 33년 연기 내공이 ‘서울의 봄’에 농축됐다는 평가다.
"연기 잘해 열받는다"…욕받이 자처한 천만 배우
“인간이란 동물은 강력한 누군가가 리드해주기를 바란다니까” “기왕이면 혁명이란 멋진 단어를 쓰십시오”. '서울의 봄'에서 전두광이 자기합리화하는 장면마다 상영관에선 관객의 실소가 터져 나온다.
이런 사정 탓에 황정민은 무대 인사마다 관객들한테 사과부터 하며 ‘욕받이’를 자처하고 있다. 영화 ‘인질’(2022), 드라마 ‘수리남’ 등 황정민 캐릭터가 고초를 겪는 전작 장면들을 모아 전두광에 대한 분노를 대리 해소하는 ‘밈(meme, 패러디물)’이 유행할 정도다.
"감정 변화무쌍" '아수라' 감독의 N차 캐스팅
황정민은 비정한 동성애자(‘로드 무비’), 순정파 시골총각(‘너는 내 운명’), 신출귀몰한 맹인 검객(‘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능구렁이 같은 무당(‘곡성’) 등 장르와 경계를 넘나들며 독보적인 캐릭터를 만들어왔다. 김성수 감독과 처음 만난 ‘아수라’에선 “절대 믿으면 안 되는 눈”(극중 검사 김차인의 대사)을 가진 비리 시장 박성배를 맡아 “거짓말에도 진심을 담는”(황정민) 연기 경지에 이르렀다.
“한 장면 안에 감정의 파고를 황정민처럼 변화무쌍하게 넘나드는 연기자가 없다. 캐스팅만 성사되면 (박성배 캐릭터는) ‘꽁’으로 먹지 않을까 했다”는 김 감독의 노림수가 적중했다. ‘서울의 봄’도 황정민이 가장 먼저 캐스팅되면서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겠다는 확신이 생겼다고 김 감독은 밝혔다.
어려운 역사 소재 탓에 고심하던 그가 전두광 역으로 황정민을 떠올린 건 “‘아수라’ 때 장례식에서 폭주하는 장면 리허설에서 진짜 사람을 해칠 것 같은 생각이 들 만큼” 무섭도록 생생한 캐릭터 ‘빙의 능력’ 때문이다. 황정민 자신이 “무조건 대본을 많이 보며 그 인물에 나를 갖다 붙이려 노력한다”면서 “나 편하자고 대본 속 인물을 내 쪽으로 데려오면 관객이 늘 똑같은 황정민을 보게 되고, 그럼 재미없을 것”이라고 여러 인터뷰에서 설명해온 부분이다. "연기는 원래 괴로운 것이다. 남의 인생을 사는데 그렇게 쉽게 살 수 있겠나"라는 말에도 그의 연기관이 녹아 있다.
연기에 대한 그런 소신이 ‘서울의 봄’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김 감독은 “‘서울의 봄’에선 실존 인물을 따라 할 필요는 없었지만, 황정민 자신이 외국 배우들처럼 완전히 자기 모습을 지우고 역사 속 그 인물로 보이고자 했다”고 전했다. 촬영 때마다 대머리 가발‧코 특수분장을 하는데 3~4시간 걸렸다고 한다. 50편 가까운 영화‧드라마에 출연한 그가 “단 1초 만에 배역에 몰입할 수 있는”(김성수 감독) 노련함을 내려놓고 초심으로 캐릭터에 다가간 것이다.
3시간만에 탄생한 "탐욕의 끝" 화장실 명장면
황정민은 클라이맥스의 화장실 장면을 최고의 난관으로 꼽았다. 어두운 화장실에서 전두광이 홀로 승리에 도취해 폭소를 터뜨리는 광기 어린 장면이다. 극이 흐를수록 '탐욕의 끝'으로 치닫는 전두광의 내면 묘사가 영화의 관건이었다.
“시나리오에는 ‘웃는다’ ‘운다’ 하는 애매모호한 지문만 있었다. 김성수 감독이 배우 연기를 보고 판단하겠다는 게 보였다”는 그는 김 감독과 화장실 바닥에 마주 앉아 세 시간을 고민했다고 밝혔다. 군복을 벗어 던지고, 바닥에 주저앉는 여러 시도 끝에 “교활함과 수많은 감정이 응축된 탐욕을 웃음에 실은” 지금의 명장면이 탄생했다.
말 그대로 이 작품에 자신의 연기 인생을 '갈아 넣었기' 때문일까. 지난해 11월초 ‘서울의 봄’ 언론 시사회에서 처음 영화를 본 그는 이어진 간담회 내내 “가슴 속 소용돌이 치는 감정”을 억누른 듯했다. 행사 말미에야 “이제야 머리가 정리된다. 좋은 배우들과 고생한 결과물이 이렇게 보여져 기분 좋다”고 만족감을 드러냈다. “‘서울의 봄’으로 인해 관객이 극장에 좀 더 많이 찾아주셨으면 한다” 했던 그의 바람도 이뤄졌다.
"극장 나설때 돈 안 아깝다 말 듣고파"
2005년 ‘너는 내 운명’으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 “스태프들이 차려놓은 밥상에서 그저 맛있게 먹었을 뿐”이라는 우직한 ‘밥상 수상소감’을 탄생시킨 황정민은 그 자신이 '소(牛)'처럼 꾸준히 ‘밥상’을 펼쳐온 배우이기도 하다. 소처럼 열심히 영화를 찍는 황정민이란 의미에서 '소정민'이란 애칭까지 생겨났다.
영화계가 침체에 빠진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도 그는 그저 묵묵히 작품을 찍었다. 액션영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2020), 본명으로 출연한 저예산 영화 ‘인질’, 요르단 로케이션 촬영한 ‘교섭’(2023), 특급 카메오로 출연한 ‘헌트’(2022)와 ‘길복순’(2023), ‘서울의 봄’ 등 영화 6편에 더해 넷플릭스 드라마 ‘수리남’, 연극 ‘리처드 3세’까지 4년간 장르 불문하고 총 여덟 작품을 선보였다.
“관객이 극장 문을 나설 때 ‘재밌다’는 말도 듣고 싶지만, ‘돈이 안 아깝다’는 말을 더 듣고 싶다”고 말해온 부지런한 배우의 활약은 새해에도 계속된다. ‘서울의 봄’ 홍보에 여념이 없는 지금도 ‘곡성’에 이어 나홍진 감독과 재회한 차기작 ‘호프’ 촬영을 하고 있다. 배우 염정아와 비밀요원 부부가 된 액션 영화 ‘크로스’, 형사물 ‘베테랑 2’도 올해 개봉할 예정이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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