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어르신들의 작가 데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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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환 기자]
평생 호미를 붙잡고 손에 물이 마를 새 없이 농사와 가사 밖에 모르던 시골 동네 어르신들이 미술작가로 나섰다. 그것도 20여 명에 달하는 어르신들이 한꺼번에. 충남 예산군 봉산면 옥전리 마을에서 벌어진 일이다.
지난해 1월, 9일 동안 열린 '옥전리 마을주민 그림 전시회'는 마을이 충남도 시범사업 '마을단위 여성농업인 프로그램 지원사업'에 '시니어 미술·원예치료 프로그램'이 선정된 것이 계기가 됐다. 당시 어르신들이 직접 면장에게 자신의 그림을 설명하고, 어르신들의 자녀가 그림을 구매하기도 했다.
정작 자녀들이 명절에 옥전리를 찾아와도 마땅한 음식점이 없어 성묘만 하고 돌아가기 일쑤였는데 지난해 추석은 달랐다. 자녀들의 고향 방문 기간에 맞춰 진행된 두 번째 전시회는 어르신들과 자녀들의 그림을 매개로 소통하는 장소와 시간이 됐다.
이어 12월 1~3일에 열린 세 번째 전시회엔 입소문을 타고 소식을 접한 예산군수, 국회의원, 도의원, 군의원 등이 대거 마을을 방문해 작품을 감상하고, 어르신들을 격려했다. 여기까지는 마을에서 이뤄진 전시회다.
어르신들의 작품이 드디어 마을을 벗어나 세상 나들이를 했다. 지난 12월 8~21일 예산군청 로비 전시관에서 '옥전시니어전'이 열린 것.
▲ 지난 12월 8~21일 예산군청 1층 로비 전시관에서 일반주민들에게 공개된 옥전리 어르신들의 작품. |
ⓒ <무한정보> 황동환 |
어엿한 전시장에 시골마을 어르신들의 작품들이 당당히 걸릴 수 있었던 건, 마을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옥전리 미술·원예치료 프로그램 사업을 시작할 때부터 지도자로 함께 했던 명정숙 작가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원래 이 기간에 유회선 한국미술협회 예산군지부장의 전시가 예약돼 있었지만, 명 작가가 마을 어르신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싶다고 양해를 구하자, 유 지부장이 양보해 성사됐다.
삽교 상하리 출신인 명 작가는 덕산에서 초중고를 졸업하고 출향했다가 지난 2021년, 33년만에 어머니가 살고 있는 삽교 고향집에 머물며 예산미술협회 회원으로 작품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그는 "이름 석자 정도는 쓸 줄 알아도 학교를 다니지 못한 분들, 평생 크레용 한번 잡아보지 않았던 어르신들도 계셨다"며 "순수하고 맑은 어르신들의 내면을 발견한 것은 덤"이라고 말한다.
마을은 지난해 초 사업이 선정된 뒤 가장 먼저 프로그램 참여를 원하는 어르신들을 모집했다. △80대 10명-이예태(88)·이을순(87)·김순안(86)·이용희(86)·이성자(85)·전영점(85)·김지흔(84)·남궁장예(84)·박숙자(82)·김재분(81) △70대 1명-김월례(76) △60대 4명-김정임(69)·이영옥(68)·김미영(63)·조명희(63) 외에 △50대 3명-길삼례(58)·최진희(57)·조수진(54) △40대 1명-송미선(46)과 고등학교 2학년 신효원 학생까지 모두 20명이 참여했다. 이렇게 해서 구성된 동아리가 '옥재미(옥전재미만들기)'다.
50여 가구에 60여 명의 주민들이 거주하는 옥전리는 봉산면에서도 마을버스 운영횟수가 하루 2번 정도인 오지로 꼽힌다. 예전 평산 신씨 집성촌이었던 곳으로 지금도 신씨가 많이 살고 있다.
신덕철 새마을지도자는 "그래서 더 끈끈한 면이 있다"며 "프로그램이 36회가 진행되는 동안 어르신들을 관찰해 보니 인지능력 향상에 도움을 주는 것 같았다. 굉장히 행복해 했다. 같이 음식도 해 드시면서 유대감도 깊어지고 사이가 돈독해진 것 같다"고 설명했다.
▲ 명정숙 작가 |
ⓒ <무한정보> 황동환 |
군청 로비 전시가 한창 진행 중일 때 옥전리 마을회관에서 작가로 데뷔한 어르신 다섯 분을 만나 소감을 청해 들었다.
귀가 살짝 어두우신 이예태 어르신께 '그리운 사람'이라는 제목의 작품 속 떠꺼머리 총각의 정체를 묻자 "아들을 생각하며 그렸다"고 말한다. 또 감나무를 그린 작품에 대해선 "감나무를 그리면서 감을 따 먹을 생각에 즐거웠다"며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남궁장예 어르신은 데칼코마니 작품을 선보였다. 자신의 어릴 적 모습을 상상해 그린 그림도 보인다. 어르신은 "이 나이 먹어서 이런 거라도 해보니 좋았다"고 말한다.
서산시 출신인 박숙자 어르신은 옥전리로 시집 온 지 60년이 넘었다. 어르신은 "처음 그림을 그려봤는데, 아무 생각도 없이 그렸다"며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부끄러워 하며 웃는다.
김정임 어르신은 옥전에 소나무가 많은 점을 착안해 작품 속에 소나무를 담았다. 어르신은 "그림을 그릴 때 잡념이 사라지는 경험을 했다. 삶의 고뇌 다 잊고, 그림에 몰두하는 게 좋았다"며 "내 집에 걸어놓고 싶은 생각이 있다"고 귀뜸한다.
옥전리에서 산 지 50년 됐다는 이영옥 어르신의 작품엔 집고양이가 되다시피한 들고양이 두 마리가 어깨동무한 채 등장한다. 또 자신의 손을 나무 형상으로 표현한 뒤 점묘화 기법으로 완성했다. 어르신은 "살면서 그림 그릴 일이 없었는데, 일을 하다가도 그림 공부하는 날이면 마음이 편해지는 느낌을 받았다"며 "프로그램이 끝나 아쉽다"고 말한다.
지난해 미술을 매개로 어르신들의 변화를 목격한 마을 이장, 부녀회장, 마을 총무 등은 주민들은 미술교육을 연계한 돌봄을 마을에서 운영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하지만 현재 마을에 마땅한 공간이 없어 주민들이 안타까워하고 있다.
신 새마을지도자는 "어르신들이 그동안 완성한 작품을 보관할 장소가 없다"며 마을회관 책상 위에 수북이 쌓아 놓은 A3 크기의 파일들을 보여줬다. 그동안 어르신들이 제작한 작품들을 개인별로 모아 온 작품파일들이다.
조수진 부녀회 총무는 "지금은 전시 공간이 없어 어르신들의 작품이 파일 속에 갇혀 있지만, 언젠가 마을에 갤러리 카페 같은 공간을 만들어 많은 분들이 감상할 일이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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