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 보모 손에 맡겨진 백인 아이, 가볍게 생각하다 큰코다쳤다

김상목 2024. 1. 2.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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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클레오의 세계>

[김상목 기자]

'Nanny'라는 영어단어는 대개 '유모'로 번역된다. 지금처럼 우유나 분유를 갓난아이에게 먹일 수 있기 전까지는 만약 친엄마가 부재하거나 다른 사정으로 돌보기 힘들 경우 당장 생존이 위협을 받게 될 수밖에 없었다. '젖동냥'이라는 표현처럼 아이를 출산해 젖을 먹이던 다른 여성에게 부탁하는 것 외에 답을 찾기 힘들었다. 이를 상류층이나 부잣집에선 더 적극적으로 활용해 동서양을 막론하고 유모를 고용했다. 아이 양육 외에도 가정이나 사회적으로 활동할 게 많았기에 아이에 매달리는 건 돈을 주고 유모를 쓰는 걸로 해결하려 한 것이다. 그 결과 친엄마보다 유모와 더 일상적으로 친숙한 아이들이 적지 않았다. 군주나 귀족의 세습과정에서 실제 엄마 못지않게 유모의 영향력이 지대한 경우는 역사책에서 쉽게 확인 가능한 대목이다.

그런 풍습 때문에 미국 영화에선 'Nanny Movie'가 소 장르로 엄연히 존재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작품이라면 고(故) 로빈 윌리엄스의 열연이 돋보였던 '미세스 다웃파이어, 1993'이나, 스칼렛 요한슨 주연의 '내니 다이어리, 2007'가 있겠다. 자신을 보호할 수 없는 어린 아이를 보살펴야 하는 역할이기에 채용에 유독 신경을 써야할 분야인지라 은근히 가장 안전해야 할 상대가 불러오는 공포 코드를 활용하는 호러 장르로도 자주 선보이는 소재다. '베이비시터'라 불리는 역할은 상대적으로 젊은 여성이 아르바이트로 종사하기도 하지만 해당 장르의 대표작이라 할 '미세스 다웃파이어'처럼 나이 지긋한 여성을 채용하는 게 일반적이다. 특히 어린 아이가 대상일 수록 더욱 그렇다.

국내에서도 근래 외국인 여성을 가정부 혹은 가사도우미로 도입하자는 논의가 오가며 우려를 불러오곤 한다. 제도 도입 논란과는 별개로, 과거에 유모가 친모보다 더 밀접한 관계를 구축할 경우 당사자들 간 관계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문제가 궁금해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2015년 국내 개봉했던 드문 싱가포르 영화, '일로 일로'가 바로 그런 관계를 조명하는 내용으로 기억된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같은 문제작들을 선보였던 제작진이 완성해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화제가 된 <클레오의 세계>는 바로 '일로 일로'와 유사한 쟁점을 정면으로 다룬다.

여섯 살 '클레오'의 세계가 와장창 무너지다
 
▲ "클레오의 세계" 포스터 영화 포스터 이미지
ⓒ 그린나래미디어(주)
 
6살 '클레오'는 아빠와 아침인사를 나누고 등교한다. 그 나잇대 아이들이라면 별것 아닌 일에도 하루하루 접하는 모든 게 놀랍고 새롭다. 클레오는 교실에서 달걀을 깨고 뒤섞어 간단한 간식을 만들어 맛을 본 다음, 야외로 나가 철봉놀이를 한다. 이를 꽉 악물고 매달리지만 그만 아래로 떨어지고 만다. 손바닥에 생채기가 좀 났다. 실제로 체감하는 통증보다는 뜻밖의 상황에 놀라서 울먹거리지만 푸근한 여성이 다가와 클레오를 달래며 가라앉힌다. '호' 하고 불어주니 아이는 금방 진정된다. 이제 낯선 고통 대신 익숙한 안정감에 클레오는 파묻힌다. 하지만 그 순간 여인에게 한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뭔가 뜻밖의 일이 벌어지려는 듯하다. 그리고 여섯 살 클레오의 세계는 격렬한 파도를 만난 것처럼 흔들리기 시작한다.

클레오는 전형적인 백인 소녀다. 아이돌 지망생처럼 찬란하게 빛나는 외모는 아니지만 늘 바쁜 아빠에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소중한 딸이다. 하지만 엄마는 보이지 않는다. 그 자리는 비어 있다.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학교 운동장에서 클레오에게 정겹게 '호' 불어주던 여인이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가 클레오의 엄마는 아니다. 그러나 여섯 살 소녀에겐 그 여인은 '엄마'에 가장 근접한 존재다. 대서양의 작은 섬나라 카보베르데에서 돈을 벌기 위해 프랑스로 건너와 보모로 일하는 '글로리아'가 바로 그 여인이다. 클레오의 아빠는 그를 입주도우미로 고용해 대부분의 시간을 맡기고 있었다.

글로리아에게 걸려온 전화는 고향 카보베르데에서 온 것이다. 그의 엄마가 세상을 떠났다는 부고 소식인 것이다. 이제 글로리아는 장례를 치르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 클레오의 작은 세계가 무너지려 한다. 아이는 어찌해야 할 지 감도 잡힐 리 없다. 작별의 순간, 클레오와 정이 든 글로리아는 자신이 있는 카보베르데로 여름방학 때 클레오를 보내줄 수 있는지 클레오의 아빠에게 문의한다. 아빠는 고려해 보겠다고 말하지만 표정은 '아니오'에 가깝다. 하지만 클레오는 분명히 그 대화를 목격했다.

글로리아는 비행기를 타고 카보베르데로 떠났고 클레오는 홀로 남겨진다. 아빠가 보모의 빈 자리를 메우려 노력하지만 성이 찰 리 없다. 클레오는 점점 불안해지고 충동적으로 행동한다. 이유를 묻는 아빠에게 클레오는 글로리아가 보고 싶다며, 약속한 것 아니냐며 아빠를 채근한다. 마침내 두 손 두 발 다 들게 된 아빠는 딸을 비행기에 태워 카보베르데로 보낸다. 공항에는 글로리아가 클레오와의 재회를 기다리고 있다.

대서양의 섬나라에서 주인공이 겪게 되는 '유년기의 끝'
 
▲ "클레오의 세계" 포스터 영화 포스터 이미지
ⓒ 그린나래미디어(주)
 
클레오이 만면에 웃음꽃이 피어난다. 이제 자신의 작은 세계가 복원되는 것 같다. 아이는 낯선 섬나라의 모든 게 흥미롭다. 자신의 곁에 든든한 글로리아가 함께 있으니 여행이 전혀 두렵지 않다. 그동안 사진으로만 접했던 글로리아의 가족들도 만난다. 클레오는 준비해온 선물을 각자에게 전달한다. 모두가 기뻐하지만 글로리아의 아들 '세자르'의 표정은 어둡다. 클레오는 통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글로리아와의 재회와 이국의 풍경에 정신없이 즐거운 나날이 시작된다.

글로리아는 그동안 모은 돈으로 관광객을 대상으로 작은 호텔을 짓는 중이지만 자금이 부족해 곤욕을 치르는 중이다. 게다가 딸 '난다'는 임신 중이다. 하지만 아빠의 존재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돈 들어갈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닐 테다. 클레오는 아빠가 준비해준 돌봄 경비가 든 봉투를 글로리아에게 전달한다. 현금이 필요한 글로리아로선 반가운 일이다. 딸 난다 역시 클레오가 전해준 장신구에 웃음꽃이 피어난다. 하지만 세자르는 선물공세에도 불구하고 클레오를 반기지 않는다는 무언의 표시가 명백하다. 그 이유가 도대체 뭘까 클레오는 도무지 알 수 없다.

그런 가운데 난다는 진통 끝에 무사히 출산한다. 이제 할머니가 된 글로리아는 갓난아기를 돌봐줘야만 한다. 아직 어린 난다는 엄마 역할을 온전히 소화하길 힘겨워하기 때문이다. 클레오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 도래한다. 자신이 글로리아를 온전히 독점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호기심 가득하던 클레오는 난다의 아기를 무표정한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글로리아만 다시 만나면 모든 게 해결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재회한 후에도 온전히 이전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게 클레오로서는 불만이다. 화가 점점 쌓여간다.

여섯 살 아이 앞에 펼쳐진 현대 유럽의 복잡한 지형도
 
▲ "클레오의 세계"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그린나래미디어(주)
 
<클레오의 세계>는 관객의 선입견을 사뿐하게 짓밟아버리는 영화다. 여섯 살 주인공의 시선으로 보는 주변 어른들의 세계 혹은 곡절 있는 성장담 정도로 관람 예상치를 설정하고 선택했을 관객에게 이 영화는 고정관념에 국한되기를 거부하며 복합적인 테마와 간과했던 이면을 추출해 보여주려 한다. 그 과정을 거쳐 관객의 뇌리에 다양한 의문부호들을 속속 끄집어내는 명민함으로 가득 차 있다.

학교에서 클레오는 급우들과 함께 달걀을 깨 넣고 뒤섞어 간단한 간식을 만들어 시식한다. 클레오는 전형적인 프랑스 백인 여자아이의 외모를 지녔지만 주변에는 다양한 유색인종 혈통의 급우들이 가득하다. 달걀을 깨 넣고 혼합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현재 프랑스, 그리고 유럽대륙의 현주소로 치환되며 무수한 상상력을 불러온다. 클레오는 아직 그런 심각한 사회적 쟁점을 알 리 없지만 그의 아빠라면 현재 전 유럽의 화두가 된 해당 사안에 대해 어떤 식으로건 정치적 의견을 갖고 있을 테다. 이는 과거 식민제국의 유산인 동시에, 현재의 정치경제적 요인으로 인해 폭증한 이민자 문제에 대한 고도의 은유로 봐도 무방하다. 실로 의미심장한 출발이다.

그런 연상효과를 불러오는 장면은 초반부에서 거듭 이어진다. 철봉 틀에 매달려 전진하는 클레오의 앞에는 영차! 하며 코스를 잘 넘어가는 흑인 급우가 있다. 클레오는 동일하게 전진하기엔 도무지 역부족인데도 불구하고 손을 놓지 않다가 추락하고 만다. 그 또래 아이들의 경쟁심이 엿보이는 장면이지만 아무리 안간힘을 다 해도 힘이 달리는 신체능력에 대한 열등감의 표현으로도 읽힐 수 있는 순간이다. 하지만 백인 여자아이를 자애롭게 안아주는 구원자는 푸근한 몸매와 미소를 지닌 유색인종 여성이다.

식민 지배를 경험했지만 상대적으로 기간은 짧았고 해당 경험을 지닌 세대가 거의 사라진 상황인 현재 한국인에겐 유럽 관객에 비해 체감도가 덜하긴 할 테다. 그렇지만 식민제국의 역사를 지닌 북반구/서구세계 사람들에겐 이 영화가 도입부부터 쉴 틈 없이 선보이는 순간들은 의미심장한 장면의 연속이 아닐 수 없다. 이 초반 순간들은 클레오가 익숙한 파리에서 낯선 카보베르데로 이동해 두 세계의 간극을 체감하는 전개로 자연스럽게 이동한다. 참 많은 것을 고려한 스토리텔링이다.

과거 식민주의 역사와 현재를 연결하는 땅, 카보베르데

감독은 대본을 쓰던 당시 프랑스의 화가 장-바티스트 드브레의 작업 이미지를 참고했다고 한다. 장-바티스트 드브레(1768-1848)는 프랑스 태생이지만 당시 포르투갈 식민제국의 핵심이던 브라질의 풍경을 담은 귀중한 석판화 기록으로 후대에 알려진 작가다. 그의 작업을 열심히 인터넷으로 검색해 봤다. 식민지배의 실상들, 활자로만 접해서는 실감할 수 없는 생생한 풍경들, 미묘한 지점들로 가득했다. 그러고 보니 관련 역사책 표지로 자주 쓰이는 화가였다. 클레오와 함께 이 영화의 주역인 글로리아의 고향 카보베르데 제도 역시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다는 점이 새삼 의미심장하다(프랑스와 인연이 깊은 나라들로 구성된 '프랑코포니' 가입국가이기도 하다).

초반을 제외하면 이야기의 대부분은 카보베르데에서 이어진다. 북반구 프랑스와 달리 적도에 가까운 위도인 데다 대서양에 자리 잡은 외딴 섬들로 구성된 카보베르데는 사시사철 봄 날씨가 이어지는 인구 50여 만의 섬나라다(인구의 7할은 포르투갈 백인과 원주민 흑인의 혼혈인 '물라토'이다). 밤에는 쌀쌀하지만 낮에는 언제든지 바다에 뛰어들어도 이상할 것 없는 기후와 환경이다. 섬사람들은 빈한하지만 여유로운 삶을 누린다. 바다에서 갓 낚은 생선을 구워 즉석에서 피크닉이 가능하고, 아이들은 굳이 아이패드가 없어도 천연 다이빙 코스를 즐기며 놀 수 있는 땅이다.

이 낯선 여행지에서 클레오는 적어도 여행 초반에는 모든 게 더 물질적으로 풍요한 게 분명한 프랑스에서의 시간보다 더 활발하고 행복해 보인다. 이국의 섬 풍경이 여섯 살 아이에겐 흥미롭고 더 다이내믹하기 때문일 테다. 여기에선 자유롭게 뛰어놀 수 있고 절대적 기준에서 물질적으론 부족할지언정 자연스러운 활기와 함께 무엇보다 클레오가 갈망하던 글로리아의 무한한 사랑 깃든 돌봄이 있다. 동네 주민들도 클레오를 환대하며 귀여워해준다.

하지만 아직 클레오로서는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울, 남반구와 북반구의 경제적 격차는 명백하게 영화 속 배경에 작용하고 있다. 이는 글로리아가 클레오에게 보이는 태도와 함께 글로리아의 자녀들이 클레오를 대하는 관점이 차이로 확인되는 대목이다. 글로리아는 클레오를 자신이 낳은 아이처럼 아끼고 사랑한다. 이 점에는 추호의 의심도 들어갈 필요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와 함께 클레오의 아빠가 봉급으로, 그리고 여행자금으로 보내준 '유로' 화폐는 글로리아와 그가 부양해야 할 가족들에겐 가난한 고향에서 만질 수 없는 기회 그 자체일 것이다. 딸 난다 역시 그런 유럽대륙의 선물처럼 클레오를 대하는 것으로 보인다.

세계가 물려받은 난제를 다루는 영화의 사려 깊은 태도
 
▲ "클레오의 세계"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그린나래미디어(주)
 
하지만 여기에서 모성애 넘치는 글로리아가 놓친 결정적 구멍이 점차 드러난다. 바로 아들 세자르를 통해서다. 난다에 비해 어리지만 클레오에겐 오빠뻘이 되는 세자르는 겉으로는 과묵하고 퉁명스러울 뿐이지만 영화를 보던 관객들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 대사를 친구와 나누고, 클레오가 해석할 수 없는 행동을 일삼는다. 글로리아는 돈을 벌기 위해 생면부지의 백인 아이를 사랑으로 돌보는 대신에 자신이 낳은 아이는 방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난다는 그 이유를 납득하고 엄마가 벌어오는 돈 덕분에 누리는 안정된 삶을 향유하는 것에 만족할 수 있었지만 엄마의 사랑이 목마른 세자르에겐 상처가 되었음이 확인된다. 클레오와 세자르는 상호이해에 도달하거나 적개심을 교환하는 존재가 되거나 양자택일에 서는 입장인 것이다.

제작진은 어린 아이들의 갈등과 반목을 섬세하게 묘사함으로서 유럽과 아프리카, 식민제국과 식민지의 역사를 소환하는 것은 물론, 현재 다른 형태로 재현되는 북반구와 남반구의 경제적 격차와 그로 인한 불평등한 교환방식에 대한 거대한 은유에 성공적으로 도달한다. 클레오 vs 세자르, 세자르 vs 난다, 클레오 vs 난다, 클레오 vs 글로리아로 확장되는 간극과 긴장이 유려하게 펼쳐지며 다채로운 쟁점을 소환한다. 실로 놀라운 기획이 아닐 수 없다. 대체 어떻게 이런 통찰이 가능한 걸까? 살짝 식은땀이 흐를 지경이다.

놀라움과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몇 가지 단서를 찾아보자. 영화에는 자막으로 '로린다 코레이아'라는 이름에 대한 헌사가 올라온다. 배경 설명을 듣기 전에는 이 인물이 누구인지 관객으로선 도무지 알 도리가 없다. 이것저것 인터뷰 자료를 조사해보자. 그 이름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로린다 코레이아는 감독이 어릴 적 살던 아파트 관리인이었다. 단지 입주자 자녀들을 살갑게 대해준 포르투갈 이민자라고 한다. 가족처럼 교류하던 그가 감독이 (클레오와 동일한) 여섯 살 때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 감독이 체감했던 충격과 상처, 그리고 지금껏 교류하고 있다는 이야길 접하면 이 영화의 출발점은 자전적 체험담임을 알 수 있다.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갈고 닦아서 선보이는 건 접근성 측면에서 뭐가 달라도 다를 수밖에 없는 일이다. 게다가 감독 본인이 프랑스 출신이 아니라 유럽의 끄트머리, 아시아와 잇닿은 조지아(그루지아) 출신 이민자라는 배경지식 또한 이 영화가 선보이는 주목할 만한 시선의 일부로 작용하는 게 분명하다. 그런 유년기의 기억을 세심하게 풀어내기 위해 감독은 과감히 애니메이션을 대폭 삽입해 표현의 확장을 꾀한다.

자전적 경험과 세상에 대한 사려가 어우러진 공들인 만듦새

이제 갓 여섯 살인 주인공은 아직 온전히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타인에게 전달하기엔 역부족이다. 이 문제를 감독은 표현주의 애니메이션 효과를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것으로 돌파한다. 마치 막과 장을 나누듯 적재적소에 등장하는 단편 애니메이션은 클레오가 지금 겪는 상황과 감정을 구현하는 데 쏠쏠히 활용한다. 다큐멘터리 풍의 실사 화면으로도 온전히 관객에게 전달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이 안배를 통해 지금 클레오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이해될 수 있다. 마치 우리는 클레오라는 아이의 꿈을 함께 들여다보는 셈이다.

클레오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으로서의) '안경'을 끼게 되는 과정으로 시작하는 프롤로그부터 영화는 수많은 코드를 은유하는 것은 물론 전 연령관람에 어울리는 통속적인 전개를 기대했을 관객들의 심장을 쥐었다 놨다 하는 찰나를 몇 차례 선보인다. 그 찰나 또한 '어른'의 눈높이가 아니라 순진무구한 아이이기에 가능한 지점이라 더 경탄스럽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맹목적일 수밖에 없는 또래 아이들의 전형과 같이 극중에서 클레오가 펼치는 단순하지만 극단적인 대사와 행위가 보는 이들을 철렁하게 만드는 강도가 만만치 않다. 아마 그 강렬한 충격을 맞이하면 영화의 장르를 의심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클레오의 세계>는 유년기의 끝에서 이제 주인공이 걷게 될 미래, 독립적 개인으로 일어서기 위한 출발점의 이야기다. 어두운 터널을 경유해야 도달 가능한 통과의례 과정에 충실하게 흘러간다. 한국의 관객이 이 영화가 품은 적지 않은 비밀장치와 코드를 소화하려면 고도의 감각과 함께 약간의 예습 및 복습이 필요할 테다. 특히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클레오와 글로리아의 대화 사이 끼어드는 (카보베르데 일상어인) 포르투갈 계 '크레올 어'의 언어유희를 국내 관객이 온전히 소화할 수 없다는 게 아쉽다. 크레올 어는 언어학적으로 식민지 역사를 경험한 나라들에선 흔히 접할 수 있지만 우리에겐 생경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안일하게 생각하고 다가갔다간 큰코다치기 딱 좋은, 하지만 그렇다고 상상하고 기대했던 내용에 어긋나지도 않는 매우 비범한 영화가 새해 벽두에 도착했다.

<작품정보>

클레오의 세계 Àma Gloria
2023|프랑스|드라마
2024.01.03. 개봉|84분|전체관람가
감독/각본 마리 아마추켈리
주연 루이스 모루아-팡자니(클레오 역). 일사 모레노 제고(글로리아 역)
출연 아브나라 고메스 바렐라(페르난다 역), 프레디 고메스 타바레스(세자르 역),
아르노 레보티니(아르노 역)
애니메이션 마리 아마추켈리, 피에르-엠마뉘엘 리에
캐스팅 크리스텔 바라스
제작 릴리스 필름
수입/배급 그린나래미디어(주)
공동배급/공동제공 (주)하이스트레인저
공동제공 (주)버킷스튜디오

2023 76회 칸영화제 비평가주간 개막작 초청
2023 BFI 런던영화제 'Love' 부문 초청
2023 멜버른국제영화제 'Bright Horizons Award' 부문 초청
2023 함부르크영화제 'Voilà!' 부문 초청
2024 선댄스영화제 스포트라이트 부문 초청

2023 예루살렘영화제 국제장편영화상
2023 핑야오국제영화제 심사위원상
2023 테살로니키영화제 'Meet the Neighbors' 경쟁 부문 수상
2024 뤼미에르영화제 신인연기상 부문 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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