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과 여행하다가 이런 행운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벌어진 일
2022년 9월 30일부터 2023년 4월 14일까지 9살 아들과 한국 자동차로 러시아 동쪽에 있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부터 유라시아 대륙의 가장 서쪽인 포르투갈 호카곶을 지나 그리스 아테네까지 약 4만 km를 자동차로 여행한(3대륙, 40개국, 100개 도시) 이야기를 씁니다. <기자말>
[오영식 기자]
- 지난 기사 '30여 년 전 소원, 드디어 산타를 만났습니다'(https://omn.kr/26stc)에서 이어집니다.
우리 부자가 앞서 러시아에서 막 나와 리투아니아에 있을 때였다.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 근교의 트라카이성(Trakai) 주변 호숫가를 걷고 있는데 한 남자가 주차된 우리 차를 보더니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이거 한국 차인가요?"
"안녕하세요. 네. 한국에서 운전해서 왔습니다."
"어디에서 오는 길인가요?"
"러시아를 횡단해서 이제 막 리투아니아에 왔습니다. 어디에서 오셨나요?"
"저는 우크라이나 사람입니다. 지금은 전쟁 때문에 독일에서 살고 있어요."
"아, 그렇군요. 저희는 한국 사람인데 한 달쯤 뒤에는 독일에도 갈 거예요. 지금 자동차 여행 중이에요."
"와~ 정말 대단해요. 나중에 독일로 오시면 연락해주세요. 저는 코블렌츠에 있는데 아주 아름다워요."
우리 부자를 신기해하며 독일에 오면 꼭 연락하라던 이 남자. 그는 우크라이나 사람인데 전쟁을 피해 독일에 정착해 살고 있었다. 마침 우리도 북유럽을 여행한 후 독일로 갈 계획이라 전화번호를 주고받으며 헤어졌었다.
▲ 리투아니아 트라카이성 노면 주차장 한국차를 보고 우크라이나 난민이 말을 걸었다 |
ⓒ 오영식 |
추운 북유럽을 지나 오늘은 독일 브레멘으로 가는 길이다. 한국인에게 '브레멘'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브레멘 음악대'가 아닐까? 싱글대디인 아빠와 단둘이 살고 있는 아들이 외롭지 않게 해주려 나는 집에서 근엄한 '아버지'가 아닌 아들의 '친구'로 살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TV 동물 프로그램에서 돼지 위에 올라탄 원숭이가 나오는 걸 본 아들이 말했다.
"아빠! 저거 아빠랑 나 같아."
"어디? 뭔데?"
나는 아들이 귀여워 항상 집에서는 원숭이라고 부르는 아빠였는데, 아들의 눈에는 원숭이를 업고 있는 TV 속 돼지의 모습이 마치 나처럼 보였던 것 같다. 나도 그게 싫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부자는 그날 이후로 '돼지 아빠'와 '원숭이 아들'이 되었다.
독일 그림 형제의 동화 '브레멘 음악대'는 쓸모가 없어져 주인에게서 버려진 당나귀, 개, 고양이 그리고 닭 4마리의 동물이 브레멘 음악대에 합류하러 가는 내용으로 결국엔 자기들끼리 어려움을 극복해 행복을 찾는다.
평소 돼지와 원숭이로 친구처럼 즐겁게 지내는 나는 아들에게 행복한 동물들의 얘기를 보여주러 브레멘 시청사 앞에 있는 동상으로 갔다.
"태풍아, 이게 브레멘 음악대 동상이야."
"진짜네. 아빠 이게 진짜 있었던 얘기야?"
아직 동심을 잃지 않은 아들은 신기한 듯 물었다.
"옛날 얘기인데 그건 잘 모르겠네. 그런데 이 동물들은 서로 힘을 모아 악당도 물리치고 행복하게 살았대. 돼지랑 원숭이도 힘을 합쳐 행복하게 살자."
▲ 독일 브레멘 음악대 동상 브레멘 시청사 앞에 동상이 있다 |
ⓒ 오영식 |
우크라이나에 평화를... "친구들이 참전하고 있어요"
"레오, 저 코블렌츠에 도착했어요."
"아, 제가 바로 갈게요. 조금만 기다려요."
우크라이나 난민 신분인 레오와 딸 콜리나가 곧바로 우리를 만나러 왔고, 레오는 우리에게 코블렌츠를 안내해 주었다. 라인강이 가로지르는 코블렌츠는 2천 년의 역사를 가진 도시로 우리나라의 경주처럼 오래된 건물들이 많았고, 라인강과 어우러져 너무나 아름다웠다. 라인강 변을 걷다 레오가 근사한 식당으로 안내해 함께 저녁을 먹었다.
"레오, 그런데 지금 우크라이나에 가족은 없어요?"
"네, 얼마 전에 부모님도 모시고 나와서 지금은 다 함께 살고 있어요."
"그럼, 친구들이나 지인 중에 다친 사람은 없어요?"
"많죠~. 지금 전쟁에 참전하고 있는 친구도 있고, 슬퍼요."
"그렇군요. 대한민국은 주변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미국의 영향을 다 받아서 공식적으로 한쪽편을 들기 힘들어요. 하지만, 많은 국민은 우크라이나를 지지하고 응원하고 있습니다. 힘내세요."
"고마워요. 그런데 대단해요, 아들과 둘이 이 먼 거리를 운전해서 여행하다니. 저도 그런 꿈이 있어요."
"그래요? 혹시 나중에 한국으로 온다면 꼭 연락하세요. 제가 가이드 해드릴게요."
▲ 우크라이나 난민 가족 레오와 폴리나 독일에서는 우크라이나 난민에게 직업과 숙소를 제공한다고 했다 |
ⓒ 오영식 |
그리고 독일과 체코, 리히텐슈타인을 돌아 우리 부자는 스위스로 향했다. 퇴직 신청을 했지만, 아직 공무원 신분이던 나는 사실 퇴직 전 꿈이 몇 개가 있었다. 그중 하나는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국제기구인 세계기상기구(WMO)에 근무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퇴직을 앞둔 나에게는 멀어져만 간 꿈. 그 곳에 옛 직장동료가 근무하고 있어 SNS로 연락을 취했다.
"김휘린 박사님, 안녕하세요? 오영식입니다. 잘 지내시죠?"
"안녕하세요~ 어쩐 일이 세요?"
"저 아들이랑 차 타고 한국에서 유럽까지 왔어요. 며칠 뒤 제네바에 들를 예정인데 혹시 아들에게 WMO 견학을 시켜줄 수 있을까 해서요."
"그래요? 대단하네요. 죄송한데, 여기 견학 프로그램은 없어요. 그런데 그때쯤 국제회의가 있는데 혹시 회의에 참석하실래요? 한국에서 관련 업무도 하셨으니 충분히 참석 자격은 될 거 같은데요."
"그래요? 저야 감사하지만, 혹시 방해되는 게 아닐지…."
"그럼, 참석자 명단에 아드님이랑 두 분 올려놓을게요. 그렇게 하시죠."
"감사합니다."
몇 년 전 서울에서 근무할 당시 같은 기관에 근무했던 김휘린 박사님은 세계기상기구에 국장으로 채용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이다. 현재 가족과 함께 스위스 제네바에 근무하고 계셨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연락을 드렸는데 우리 부자를 흔쾌히 초대해주셨다. 그렇게 갑작스러운 회의 참석 요청을 받고 제네바에 있는 세계기상기구 건물에 도착했다.
▲ 세계기상기구(WMO), 스위스 제네바 WMO 주차장에 주차된 최초의 한국번호판 차량 |
ⓒ 오영식 |
주차 문제로 조금 늦게 도착한 우리 부자는 조용히 회의장으로 들어갔고, 2시간여 동안 국제회의를 지켜봤다. 영어로만 진행된 회의에 아들은 졸음을 참아가며 간신히 버티다 드디어 회의가 끝났다.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김휘린 국장님은 전 세계에서 온 회의 참석자에게 우리 부자를 소개해주었고, 나에게도 직접 말할 기회를 주셨다.
▲ WMO 국제회의장 졸음을 참고 있는 아들 |
ⓒ 오영식 |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저는 기상예보 업무를 하는 대한민국 공무원이고 과거 김휘린 국장님과 함께 근무도 했었습니다. 지금은 아들과 한국에서 자동차를 운전해 러시아를 지나 여기까지 왔습니다. 앞으로 포르투갈과 아프리카까지 여행하고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입니다. 사실 저는 과거 기상청에서 근무해 이곳 WMO에서 근무하는 게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회의에 참석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들에게도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 같습니다."
정식 근무는 하지 못했지만,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꿈꾸던 곳에 아들과 함께 국제회의에 참석하고 나니 만감이 교차했다. 사실 퇴직을 앞두고 못내 마음 한쪽에 아쉬움이 남아있었는데, 이제는 정말 미련이 하나도 남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제네바를 떠나며 어리둥절한 표정의 아들에게 말했다.
▲ 김휘린 국장님과 함께 한국인 최초 WMO 국장이 된 김휘린 박사 |
ⓒ 오영식 |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여행 기간 내 있었던 사건을 바탕으로 새로 작성하였으나, 사건 등 일부 내용은 기자의 저서<돼지 아빠와 원숭이 아들의 흰둥이랑 지구 한 바퀴>에 수록되어 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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