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부터 열매까지, 함양 토종맛 지키는 사람들
[주간함양 최학수]
2280명의 이재민 피해를 낸 2022년 중부권 폭우 사태를 시작으로 해수면 상승과 연평균 기온 상승 등 벌써 기후관련 문제가 우리 주변에 들이닥치고 있다. 올해 함양을 비롯한 전국의 벚꽃축제 중 일부는 예년과 다른 상황 때문에 벚꽃없는 벚꽃축제를 치루기도 했다.
올해만 하더라도 이상기후로 봄서리와 가을태풍, 폭우와 폭염으로 작물 재배에 적신호가 켜졌다. 농민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더 심해질 거라는 걱정을 했다. 농업이 주 산업인 함양군에게는 큰 위기가 아닐 수 없다. 기후위기는 매년 심화되고 있어 가깝게는 농가소득 하락과 농업기반 붕괴, 멀게는 국제적 식량난이 예고되어있다.
유전자변형 농수산물(GMO)과 종자주권 등 이미 필요성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됐던 토종종자가 다시 한 번 주목을 받은 이유는 바로 기후위기다. 이상기후 앞에서는 오랜 기간 축적된 농업지식 역시 무력할 수 밖에 없는 상황 속에 토종종자의 다양성이 하나의 해법으로 제기되기 시작한 것이다.
석과불식(碩果不食). 큰 과실은 먹지 않고 내년을 위해 남겨둔다는 뜻이다. 형질이 좋은 수확물의 일부를 내년을 위해 먹지 않는 전통은 이미 많이 사라졌다. 내년을 위한 씨앗을 남기는 게 농부의 당연한 일이었으나 매년 종묘상을 통해 번식하지 못하는 종자를 구매하는 게 농부의 일이 되었다.
그렇다면 토종종자는 어디서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2018년 결성되어 지금까지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함양토종씨앗모임에서 만날 수 있다.
▲ 함양토종씨앗모임 활동을 하는 심영지·이미향·권세현 씨(왼쪽부터) |
ⓒ 주간함양 |
궁금증에서 시작한 모임
- 함양토종씨앗모임 활동을 하게 된 이유
심영지 "나는 채화석 대표와 장은숙씨와 함께 창립 멤버 중 한 명이다. 서울에서 활동가로 직장생활을 하던 중 유전자변형 농수산물(GMO)에 대한 강의를 듣게 됐다. 그때부터 내 식탁에 올라오는 먹거리가 어디서 오는지 생각해보게 됐고 그 생각이 씨앗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이후 2018년 봄에 서울에서 토종씨드림 행사에 참여하게 됐다. 그 행사에서 우연하게 함양사람 둘을 만났고, 서울에서 받은 씨앗을 함양에서 나누자는 가벼운 모임이 정기모임으로, 정기모임이 다양한 활동으로 번지며 함양토종씨앗모임이 생겼다."
권세현 "2019년에 가입을 해서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토종종자를 돌보는 일은 나에게는 삶의 태도와 같은 일이다. 토종종자의 가장 큰 특징은 다양성이다. 감자도 호박도 색깔도 종류도 정말 다양하다.
다양한 토종종자를 돌보면서 내 삶이 꼭 정해진 방향으로 가지 않아도 괜찮다는 위로를 받게 됐다. 건강한 흙에서 가능성을 틔우는 씨앗을 보며 내 삶 역시 건강한 흙처럼 돌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나에게는 정말 소중한 가치고 그런 가치를 나누고 싶은 마음에 활동하게 됐다."
이미향 "사회 교사로 근무하던 시절 가르치던 교과서에도 부분적으로 씨앗의 문제들이 실려있다. 가르칠 당시에도 '번식을 할 수 없는 종자를 심는 문제가 결국 인간에게도 나타나지 않을까?'하는 막연한 생각을 했는데 기후위기와 종자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통해 농사의 모든 문제가 연결되어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대기업 중심의 종자회사들이 어떻게 농사짓는 사람들의 이익을 가져가는지도 고민하다보니 토종종자에 더욱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귀촌하고서 지인의 소개로 알게된 함양토종씨앗모임에서 종자 조금 얻어 텃밭에 심는 활동을 해왔는데 2020년부터 운영진으로 활발하게 활동을 시작했다."
- 토종종자의 가치는?
이미향 "우선 토종종자는 향과 맛이 있다. 마트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농산물을 보면 옛날에 우리가 먹던 채소와 다르게 대부분 맛과 향이 약하다. 부추와 깻잎, 당근과 오이 등 대부분 맛과 향의 밀도가 다르다. 유행하는 레시피에 설탕이 포함되는 이유기도 하다. 과거에는 식재료에 고유의 맛과 향이 있고 채소의 단맛도 있는데 점점 재료 자체가 싱거워지고 있다."
심영지 "거창에서는 여성농업인(여농) 중심으로 토종씨앗활동이 이어지고 있다. 작년 거창 여농의 신은정씨는 채종을 위해 보유하고 있던 감자를 모두 심었다. 그런데 작년 초반에 심한 가뭄이 들어 감자 수확을 많이 하지 못했으나 한 감자가 가뭄 속에서도 잘 됐다.
▲ 토종씨앗 |
ⓒ 주간함양 |
- 추천하고 싶은 토종종자는?
토종씨앗이 정말 많이 사라졌다.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토종쌀 종류만 1451종이었다. 일제강점기와 전쟁, 산업화 등 세대를 거듭하며 많은 씨앗이 사라졌다. 그럼에도 남아있는 토종씨앗에는 그 이유가 있다. 모두 개성 있고 맛과 향도 훌륭하다. 이날 함양토종씨앗모임의 세 분은 모든 토종종자를 추천했지만 특별하게 세 가지 씨앗을 엄선했다.
수비초: 청양고추 역시 해외에 있는 회사가 로열티를 가져가고 있는 상황. 맵기만 한 다른 고추와는 달리 매우면서 시원하고 달달한 맛까지 있다. 고추다대기로 먹어도 맛있고, 그냥 된장에 찍어먹어도, 김치를 만드는데 사용해도 맛있다.
청호박: 보통 호박죽과 호박전은 늙은 호박으로 만들지만 청호박이라면 만들 수 있다. 겉으로 봤을 땐 안 익은 것 같은데 속은 진한 주황빛을 띈다. 적당히 익은 청호박으로 요리를 만들면 늙은 호박에 비해 상큼한 맛이 있다."
구억배추: 배추지만 갓 식감이 난다. 아삭거리는 맛이 일품이다."
함양토종씨앗모임의 활동
지난해 12월 16일 만세협동조합 건물 3층에서 함양토종씨앗모임의 '고고장'이 열렸다. 동지를 앞두고서 토종팥 종류인 '비단팥'으로 팥죽을 끓이고 토종쌀 '귀도'로 새알을 빚었다. 함양토종씨앗모임 회원들이 모여 일종의 토종미식회를 가졌다.
대화를 멈추고서 밥을 꼭꼭 씹어보기도 하고 새알과 함께 팥죽을 크게 떠서 입에 넣기도 한다. 이후에는 병곡초등학교와 위림초등학교에서 진행한 생태텃밭수업 결과발표회를 가졌다.
코로나 이전에는 백전면과 마천면 일대 마을을 돌며 토종종자를 수집하는 활동도 진행했다. 함양토종씨앗모임은 토종종자를 단순 보존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맛으로 문화로 가치를 공유하는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특히 올해 진행한 고고장은 의미가 깊다. 함양토종씨앗모임의 활동을 매년 지원사업을 통해 유지했는데, 올해 고고장은 지원사업 없이 우리가 스스로 자체행사를 기획했다. 운영진 7명이 각자 잘하는 것을 맡으며 고고장을 꾸몄다. 앞으로도 우리만의 방식으로 토종씨앗을 알려나갈 계획이다."(심영지)
- 함양토종씨앗모임 활동의 어려움이 있다면?
이미향 "올해 수비초 농사를 실패한 일이 있었다. 고추는 본래 열대작물이기 때문에 발아를 하려면 온도가 엄청 높아야한다. 하지만 온실이 없어서 보일러를 켜가며 발아를 시켰지만 빛이 모자라 결국 웃자라고 말았다. 날씨가 따뜻해진 후 심으면 괜찮아진다고 해서 모종 나눔 후 집에도 심었는데 산속이라 너무 추워서 결국 수비초 농사를 날려먹었다. 내년 수비초를 위해 온실을 짓고 있다."
심영지 "지금은 운영진 7명이 씨앗을 맡아서 책임증식을 하고 있다. 하지만 텃밭이 크지 않기 때문에 그 안에서 나오는 양이 많지는 않다. 함양토종씨앗모임에서 씨앗을 많은 사람에게 나누려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 해에 기후가 안 좋아서 씨앗이 소실될 수도 있다.
그런데 나눠가져간 사람 중 한 명만 씨앗을 살려내도 남아있게 된다. 이게 사실 과거에 농부들이 마을 단위에서 해오던 방식이다. 내 밭에서 씨앗을 소실시키면 옆 이웃에게 씨앗을 받고서 수확 후에 다시 보답하기도 하며 마을 안에서 씨앗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우리는 그런 문화를 우리 안에서라도 하려고 하는 중이다."
권세현 "어떤 관점에서 보면 토종씨앗은 비효율적이고 사서 고생하는 일처럼 보일 수 있다. 나는 항상 우리 활동이 그렇게 비춰지지 않게 전달하기 위해 고민한다. 꼭 지켜야 한다는 당위성을 보여주는 것보다 맛을 한 번 보여주는 게 더 빠를 때도 있다.
농사만 하더라도 도시와 시골의 시각차이가 엄청 크다. 고구마가 땅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모르는 도시민도 정말 많다. 내가 토종종자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과 함께 내려왔던 시골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중요도를 알리기 위해 도시와 시골의 연결고리를 찾아야한다는 생각도 갖고 있다.
새로운 식문화는 다양한 건강문제를 만들었다. 정희원 서울아산병원 노년내과 교수는 한국보건의료연구원이 개최한 '노인 건강 관리 정책 방향' 원탁회의에서 "지금의 젊은 세대가 부모 세대보다 더 빨리 노쇠해지는 첫 세대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뿐만 아니라 청소년기 성조숙증이 다수 발견되고 20~30대 청년 비만율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34세 이하 당뇨병 환자는 벌써 17만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미 국회에서는 '소아·청소년·청년 당뇨병 환자 등 지원에 관한 법률안'이 발의되어 법안 심사를 마쳤다.
기후위기를 통해 다시 조명을 받은 토종종자는 어쩌면 가까운 미래에 다시 바른 먹거리를 이유로 주목받을 것이다.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크고 작은 문제에 해법이 어쩌면 우리 자연이 만들어낸 다양성을 존중하는 방식에 있을 수도 있다. 농업 중심의 산업구조를 가진 함양군에서 함양토종씨앗모임의 활동이 더 중요한 이유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함양뉴스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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