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조 교체기 청고한 삶을 산 길재
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김삼웅 기자]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 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청소년들이 즐겨 외우던 고려 말의 충신 길재(吉再, 1353~1419)의 시조다. 길재는 나라가 망하자 세상과 절연하고 초야에 묻혀 청고한 야인의 삶을 살았다. 그런데 젊은 시절 한 마을에서 청운의 꿈을 키우며 교분을 두텁게 하였던 이방원(후일 조선왕조 제3대왕 태종)이 새 왕조의 태자가 되고 조정에 건의하여 그를 개경으로 초청하였다. 그는 상경을 마뜩치 않게 여겼으나 태자가 예를 갖추어 부르므로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인물이 허다한 세태에서 태자의 절친이고 그가 길재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는 터이어서 지조나 절조를 팽개치면 부귀광영은 따놓은 당상이었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앞에 소개한 시조를 읊으며 두 왕조를 섬기지 않는, 불사이군의 청절을 지켰다. 이방원 역시 대단한 인물이어서 절친의 뜻을 받아삭이고 정치보복을 하지 않았다. <야은집(冶隱集)>에 실린 길재의 간략한 생애이다.
성은 길(吉)이요, 이름은 재(再), 자는 재부(再父), 호는 야은(冶隱) 또는 금오산인이다. 고려 공민왕 2년(1353)에 지금의 경북 선산군 봉계리에서 중정대부 원진의 아들로 태어났다. 생래로 천품이 영민하여 8살에 이미 가재를 두고 시를 써서 세인을 놀라게 하였다.
11살에 도리사에서 공부하고 18살에는 삼산의 박분을 찾아가 논어·맹자 등을 배우고, 이어 서울로 올라가 목은·포은·양촌 등을 찾아 그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하였다. 22살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31살 때에 사마감시에 합격하고, 이해 중광장 신면의 딸과 결혼하였다. 32살에 부친상을 당하고 34살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청주목에 보직이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35살에 성균관 학정이 되고 36살에 성균박사로 승진하였다. 이때 태학의 많은 유생들과 귀인들의 자제들이 몰려와 배우고자 하였다. 37살에 문하주서를 제수받았으나 이듬해 관직을 모두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39살에 계림의 교수직이 내렸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40살 때에 고려가 망하였다. 48살에 세종의 부름이 거듭되어 상경했으나 태상박사를 거절하고 귀향하였다.
길재는 우수한 천품을 타고 났으나 왕조교체기에 선비의 절의를 지키며 학문연구와 후학 양성에 여생을 바쳤다.
고봉(高峯) 기대승의 길재에 대한 평이다.
우리나라 학문이 기자 때는 서적이 없으니 상고하기 어렵고 삼국시대는 천성이 비록 순수하고 아름다운 이가 있었다 하더라도 학문의 공을 이룩할 수가 없었으며 고려 때는 비록 학문을 한다치더라도 사화(詞華)를 주로 했다. 여말에 우탁 정몽주의 뒤로 비로소 성리학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조선조 세종조에 이르러 예악문물이 찬란하게 일신했다.
동방에서 학문을 서로 전한 차례로 말한다면 정몽주로 동방이학의 조(祖)로 삼는데 길재는 정몽주에게 배우고 김숙자는 길재에게서 배우고 김굉필은 김종직에게서 배웠으며 조광조는 김굉필에게서 배웠으니 스스로 원류가 있는 것이다.(최근덕, <야은 길재>, <야은 길재의 학문과 사상>)
그가 남긴 시문에서 맑은 기상과 견결한 학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차거운 맑은 샘에 손을 씻고야
높다란 나무 아래 다달아 보네
어른 아이 찾아와 글을 묻거늘
애오라지 데리고 거닐만 하네.
7언율시의 한 수를 보자.
지난날에 옛 글 읽고 고금을 웃었다만
세속 따라 부침하니 부끄럽기 그지없네
마침내 바른도로 원기를 붙들려 터니
구태어 허명탐해 마음만 괴롭혔네
조용히 앉았으니 메새들은 낮에 울고
문닫은 뜨락엔 능수버들 그늘졌네
인간에게 할 일이 끝났거든 물러가자
귀밑머리 하얗게 기다릴게 없을지고.
길재는 고려 공민왕 때 태어나 조선 세종 때인 1419년 4월 66살을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왕조교체기의 무척 힘든 시대였다. 세종은 평소 길재 선생을 존경하여 부음 소식을 듣고 신하를 보내어 여문을 세우게 하고 그의 자손을 특별히 중용하게 하였다.
태종 집권시기인 1403년 감사인 구암 남재(南在)가 필재에 대해 지은 시다.
오백년 고려에 선생 한 분뿐
일대의 공명쯤은 영화랄 것 있으랴
늠름한 맑은 바람 온누리에 더욱 부니
억만년 우리 조선에 길이 빛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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