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금 아끼려 아들과도 의절…'52년 최장 여왕'의 빛나는 퇴장

전수진 2024. 1. 2.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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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14일 퇴위하겠다고 발표한 덴마크 마르그레테 2세 여왕. 사진은 지난해 8월 왕실행사에서 찍힌 것이다. AP=연합뉴스


1940년 4월 16일, 덴마크 왕실에 딸이 태어났다. 여성의 왕위 계승을 인정하지 않는 일명 '살리카 법' 때문에 왕관을 쓸 일이 없었던 공주다. 그는 10대 초반까지 미술에 재능을 보이며 일러스트레이터를 꿈꾼다. 하지만 53년, 살리카 법이 폐지되면서 갑자기 계승 서열 1위가 되고, 72년엔 왕관의 무게를 감당해야 하는 여왕으로 즉위한다. 덴마크 마르그레테 2세의 이야기다. 그런 그가 지난 2023년의 마지막 날, 퇴위 의사를 공식화했다. "고령(83세)이기도 하고 허리 수술 이후 건강이 악화해 더는 중책을 수행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뉴욕타임스(NYT)ㆍBBC 등 외신은 "덴마크 왕실의 상징적 존재의 퇴장" 등이란 제목으로 이 소식을 전했다. 2022년 사망한 고(故) 영국 엘리자베스 2세와는 8촌 지간이다. 둘은 닮은꼴이다. 왕위를 뜻밖에 물려받았으나 본인의 운명을 받아들였고, 후계자 수업을 착실히 받은 뒤 반 세기 이상을 훌륭하게 군림한 여성 군주라는 점에서다. 엘리자베스 2세가 타계한 뒤엔 마르그레테 2세가 최장수 여성 군주였다.

마르그레테 2세는 한국과의 인연도 있다. 2007년 노무현 당시 대통령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했고, 창덕궁을 방문해 "아름답다"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한국 도자기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남편인 헨리크 공을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 개막식에 축하사절로 보내기로 했으나 남편이 급작스레 사망했다.

덴마크 마르그레테 2세가 지난 11월 왕실 행사에 참석하고 있다. 이렇게 성장을 한 모습도 자주 보이지만, 청바지 차림으로 서점에 경호원 없이 찾아가기도 했다. 로이터=연합뉴스


영국처럼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고 있는 덴마크에서 왕실은 전 국민적 관심의 대상이다. 덴마크의 왕조는 1000년 이상의 역사를 갖고 있는데,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긴 역사다. 마르그레테 2세는 왕실에 대한 국민적 지지를 결집시킨 인물로도 기억된다. 그의 즉위 당시 45% 정도였던 덴마크 국민의 왕실 지지도는 그의 재위 중 80~90% 이상으로 올랐다.

비결은 그 특유의 엄격함이다. 마르그레테 2세는 예산 절감을 위해 즉위 50주년 행사를 대폭 축소하기도 했고, 왕실의 규모를 줄이는 데도 앞장섰다. 손주들에게서 왕자ㆍ공주 칭호를 박탈하기로 지난해 3월 결정한 게 대표적이다. 차남인 요아킴 왕자의 네 자녀인 니콜라이ㆍ펠릭스ㆍ헨리크ㆍ아테나의 왕실 칭호 박탈은 이들이 품위를 손상시켜서가 아니라 왕실 규모 축소를 위해서였다. 요아킴 왕자의 가족은 당시 "언론 발표 나흘 전에야 알았다"며 분노를 공개적으로 표출했다. 차남 일가족은 마르그레테 2세에 반감을 숨기지 않으며 급기야 미국으로 이주하겠다고 발표했다. 덴마크 국민에겐 여왕이 혈육과 의절하면서도 국민의 혈세를 절감하려고 노력한 군주로 인식되는 계기가 됐다.

마르그레테 2세의 두 아들. 왼쪽이 왕세자인 프레데리크, 오른쪽이 차남인 요아킴이다. 요아킴 왕자는 자신의 자녀들이 왕실 칭호를 박탈당하자 어머니와 의절한 상태다. AFP=연합뉴스


여왕이 가족과 불화가 있었던 건 처음이 아니다. 그의 남편인 헨리크 공은 자신에 대한 대우가 아들인 프레데리크 왕세자보다 낮다며 자주 불만을 표출했다. 급기야 2017년엔 여왕과 한 무덤을 쓰지 않겠다는 선언까지 한다. 마르그레테 2세는 별다른 발언 없이 수용했다고 한다. 헨리크 공은 이듬해 사망했다.

덴마크 마르그레테 2세 여왕과 부군 헨리크 공. 헨리크 공은 2018년 사망했다. 중앙포토


여왕 본인의 성격은 소탈하다는 평을 받는다. 일상에선 청바지를 즐겨 입었고, 어린 시절 꿈이었던 일러스트레이터로서의 활동도 계속했다. 88년엔 청바지 차림으로 시내 서점에 책을 사러 가는 사진이 찍히기도 했다. 경호원 없이 다닌 적도 여러 번이다. 그런 그가 끊지 못했던 게 있으니, 담배다. 그는 골초로 유명하다. 사망할 때까지 왕위를 계승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마르그레테 2세가 이번에 퇴위 결정을 내린 것은 건강이 한층 악화했기 때문이다.

그는 오는 14일 왕좌에서 내려와 왕세자 프레데리크에게 왕관을 물려준다. 그는 31일 연설에서 우크라이나 전쟁 등 세계 이슈에 대해 언급하다 퇴위 결정을 깜짝 발표했다. "이젠 왕위의 책임을 다음 세대에 넘겨줘야 할 때가 온 게 아닌가 생각하게 됐다"며 "오랜 기간 나를 지지해준 국민에게 감사하다"고 하면서다. 여성인 메테 프레데릭센 총리는 이날 “국민을 대표해 평생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지칠 줄 모르는 노력을 기울여 준 여왕께 진심으로 감사를 전한다”라는 입장을 냈다.

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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