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작업 스타일 아니지만 신입은 말을 아낀다 [일본정원사 입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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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준 기자]
요즘 내가 집에서 빈둥거리는 걸 집주인 할배가 눈치챘다. 늘 꼭두새벽이면 사라지던 놈이 하루종일 꼼짝도 안 하니 걱정이 됐나 보다. 자기가 맡아서 손질하고 있는 정원 작업이 바쁘다며 함께 일하러 가자고 꼬드겼다. 마음씀이 고마웠다.
6개월 속성 정원사 과정을 우여곡절 끝에 졸업한 셈이니 좀 더 다양한 현장 경험이 필요하다 싶은 참이었다. 다른 정원사들은 어떻게 일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못 이기는 척 따라 나섰다. 배움에 왕도가 없다. 쿠마사부가 깊이였다면 할배사부는 넓이의 용도가 되리라.
▲ 새로운 가로수가 보일 때마다 할배가 나무에 얽힌 사연들을 소개해줬다 |
ⓒ 유신준 |
오고리는 후쿠오카 남부 인접 도시다. 쿠사노에서 30분 넘게 걸린다. 그곳에 가는 동안 각 지역마다 다양한 종류의 가로수를 만났다. 새로운 가로수가 보일 때마다 할배가 나무에 얽힌 사연들을 소개해 준다. 늙은 정원 관리 영업사원의 달변이다.
이곳은 봄에 근사한 벛꽃터널이 되는 관광명소지. 이곳은 외국에서 들여온 옻나무 가로수인데 늦가을에 빨개져서 볼 만한 풍경이 돼. 이곳은 느티나무인데 머잖아 뿌리가 인도를 넘어가서 아마 무슨 대책이 필요할 거야. 가로수마다 얽힌 사연들을 죄다 꿰고 있다. 항상 정원 손질을 하러 다니던 길이라서 잘 안 단다.
작업할 곳에 도착했다. 시내 도로변의 2층 양옥집이다. 집안에 별도 정원 공간이 없고 집 주변 부지를 이용해 생울타리 겸 틈새 정원으로 꾸민 곳이다. 정원은 큰 도로와 작은 도로에 ㄱ자로 접해 있다. 동백나무와 금목서를 중간 중간 심었고 아래쪽으로 철쭉을 네지메(곁들임)로 깔았다. 일본정원에서 흔하게 보이는 기법이다.
동백은 일본원산이다. 옛날부터 일본 정원의 대표적인 수종으로 꼽힌다. 오랜 세월동안 동백 애호가들에 의해 개량종이 수없이 많이 만들어졌다. 요즘은 해외에서 개량된 신품종까지 역수입되고 있을 정도다. 꽃 필 무렵 동백 전시장에 가본 적이 있는데 울긋불긋한 개량종보다 빨간색 원종의 단순 소박함이 더 맘에 들었다. 아무리 바꾸고 또 바꿔봐야 카피는 카피다. 원종의 매력을 넘어설 수 없는 거다.
동백과 더불어 금목서는 이 지역에서 가장 흔한 나무에 속한다. 흔하다는 건 기후와 토양이 잘 맞아 탈없이 잘 자란다는 뜻이다. 얼마나 잘 자라는지 집채 만한 덩치의 금목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고장이다. 한 집 한 그루 정도는 기본이라서 개화기인 9월 중순경이 되면 온 동네가 서양 여자의 향수 냄새로 몸살을 앓을 정도다.
▲ 챠보히바와 엘레강테시마는 일본정원의 대표적인 상록 침엽수다 |
ⓒ 유신준 |
큰 도로변 쪽으로는 작은 엘레강테시마(측백나무 원예종) 3그루와 키 큰 챠보히바(노송나무 원예종)를 가꿔 포인트를 삼았다. 엘레강테시마는 상록 침엽수의 단순하고 매끈한 수형으로 일본 정원에서 인기가 높다. 일본에서는 침엽수 전체를 통틀어 코니파(conifer)라 부르데 그 중 엘레강테시마는 측백나무를 원예종으로 개량한 정원수다.
키 큰 챠보히바도 상록 침엽수로 히노키(노송나무)의 원예 품종이다. 옛날부터 일본정원의 배경에서 빼놓을 수 없는 수종이다. 둥글게 다듬어 놓은 조형미가 일품이어서 주로 선의 부드러움을 감상해 왔다. 최근에도 그늘에 강한 침엽수로서 클래식한 매력을 잃지 않고 있다. 둘 다 일본정원의 대표적인 상록 침엽수다.
할배사부가 안쪽에서 전지가위를 들고 나는 밖에서 바리캉을 잡았다. 할배는 키 큰 정원수의 수형을 다듬고 나는 바깥쪽에 제멋대로 자란 철쭉을 드르륵거리며 깎아 나간다. 철쭉 가리코미는 쿠마사부에게서 전수받은 내 전공인 셈이라 식은 죽 먹기다. 척 보면 어떻게 다듬어야 하는지 감이 잡혀서 작업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다.
할배사부가 일하다가 밖에 나와서 잠깐 보더니 니가 시쇼(사부)를 해야겠단다. 농담을 가장한 특급칭찬이다. 혹시 한국에서 전정 일을 하다가 온 거냐고 묻는다. 이웃 하루미씨네 정원 밤톨깎기 손질을 해놓은 걸 볼 때부터 솜씨가 범상치 않은 걸 알고 있었다며. 할배는 내가 쿠마우에 사부와 일했다는 걸 아직 모르고 있다.
알아도 모르는 척 묻는다
정원수 전정은 공간예술이다. 정원이라는 제한된 공간 안에서 어떻게 각각 식물들의 장점을 조화롭게 살려 내느냐가 관건이다. 개별 정원수의 경우도 마찬가지. 수형을 아름답게 만들고 꽃이나 열매가 풍성하게 달릴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오늘 내가 맡은 일, 생울타리나 가리코미처럼 모양을 만들 때는 자르는 위치를 고려하지 않아도 된다. 오로지 완성된 모양만을 상상하며 가지런히 잘라나가면 된다. 할배사부 일처럼 자연 수형을 살려 가지 정리를 하는 경우에는 자르는 방법과 위치를 잘 생각해야 한다. 좀 더 숙련된 경험이 필요한 분야라 할까.
▲ 사부가 시키는 대로 하면 나중에 뒤탈이 없다 |
ⓒ 유신준 |
할배사부의 일하는 스타일은 그의 평소 성격처럼 엄청 자유스럽다. 함께 일해보니 알겠다. 단언컨대 쿠마사부와는 절대로 함께 일할 수 없는 정반대 스타일이다. 작업하면서 그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많은 경우 서로 다름이 확연히 눈에 띈다.
작업지로 떠나기 전 먼저 필요한 연장을 체크하면서 차에 싣는 절차를 거친다. 연장을 제대로 확실히 챙기지 않으면 낭패다. 연장이 하나라도 빠지면 일을 제대로 못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 그날 일의 성패가 달려있는 기본적이고 중요한 절차다.
체크를 잘하려면 연장들이 한눈에 보여야 한다. 이 경우 큼직한 플라스틱 연장함이 필수다. 평소 개별 연장들을 손질해 연장함에 잘 챙겨놓으면 떠날 때 연장함만 잘 챙기면 된다. 쿠마사부는 연장 정리의 달인이다. 항상 연장을 칼같이 정리해 놓는다.
할배사부는 그냥 툭툭 싣는다. 쿠마사부가 항상 케이스를 씌워놓으며 애지중지했던 전동 바리캉조차도 맨 연장으로 트럭 적재함에 툭 올려놓는다. 연장 잘 챙겨야지요 했더니 괜찮단다. 사부가 괜찮다면 나도 괜찮아야 제자의 삶이 평화롭고 순조로운 법인데 나는 그게 전혀 괜찮지 않다. 큰일났다.
정원관리 작업에 또 하나의 필수품이 부직포 커버다. 나무를 손질하기 전에 넓은 부직포 커버를 바닥에 펴서 청소하기 쉽도록 해야하는데 커버 조차도 몇 장 없다. 커버가 부족하면 일의 효율성이 떨어진다. 정리할 때 작업 부산물들을 그냥 둘둘 말아 차에 실으면 끝나는데 청소하는 시간이 쓸데없이 길어지는 것이다.
쿠마사부라면 큰일 날 상황들이다. 신입 제자가 처음부터 시끄러울 수 없어 일단 조용히 내 할 일만 해 나갔다. 전 사부에게 쓰라린 경험이 있었던 신입은 일단 입을 다물었다. 할배사부가 내 말을 잘 들어주기는 하지만 그래도 조심해야 한다.
엘레강테시마를 손질할 때 어떻게 작업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자세히 보면 전에 다듬었던 흔적이 남아있다는 건 알고 있다. 그래도 일단 물어보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 사부가 시키는 대로 하면 나중에 뒤탈이 없다. 원추형 가리코미(토피어리)로 하란다. 쿠마사부가 비웃었던 방식이다. 일머리 모르는 것들은 이것도 가리코미를 하지. 이건 안에서 솎아줘야 나무가 건강하게 자라는 법인데 그것들이 알 턱 있나.
이건 일하는 스타일이 다른 게 아니다. 자기 일에 대한 관심 부족이다. 공부하지 않고 오랫동안 해오던 방식대로만 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다. 취향상 가리코미를 하더라도 일단 가지를 솎아내고 나서 해야 한다. 쿠마사부와 일할 때는 숨막힐 것 같은 치밀함이 싫었는데 이번에는 할배사부의 자유로운 영혼이 마음에 걸린다.
엘레강테시마는 물 관리나 병충해 걱정도 필요없을 정도로 생명력이 강한 나무다.
생장도 빨라서 전정 후 금방 밀생할 정도로 기특한 놈이다. 다만 고온 다습한 환경을 극도로 싫어한다. 한여름에 통풍이 나쁘면 안에서 썩는 일까지 생긴다. 예방하려면 장마 전 밀생한 가지를 정리해줘야 한다. 쿠마사부는 그걸 알고 있었던 거다.
실패한 관계의 상처는 진행형
난감하다. 그런 사실들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지금은 모르는 척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할배사부 눈치를 봐가며 점진적으로 설득해서 개선해 나가야 할 문제다. 전정기법 이전의 사제간 기본적인 의사소통의 문제다. 일단 할배사부가 시키는 대로 원추형 가리코미로 다듬었다. 안을 헤집어봤다. 아니나 다를까. 가지가 밀집돼서 나무상태가 엉망이다. 제대로 관리하려면 손질 방식의 전환이 반드시 필요하다.
키 큰 챠보히바 작업은 괜찮았다. 쿠마사부도 둥근 가리코미로 다듬었으니까. 이견없다. 지붕보다 높이자란 챠보히바 작업은 트럭에 부착된 크레인을 이용했다. 할배는 아래서 크레인을 움직이고 내가 박스에 들어가서 작업했다. 큰 덩어리의 챠보히바 가리코미는 눈어림이 좋아야 한다. 부분 작업을 하면서도 전체를 염두에 두어야 원하는 모양이 제대로 나온다.
▲ 할배가 김치맛을 잘 모르듯 내가 아무리 먹어도 평생 우동맛을 모를 수도 있다 |
ⓒ 유신준 |
정확하게 11시 50분에 일이 끝났다. 네 솜씨가 좋아 오늘 일찍 끝났다는 할배 칭찬이 기분 좋게 들렸다. 연장을 트럭에 챙겨 싣고 돌아 오다가 할배 단골 우동집에 들러 점심을 먹었다. 이 양반들 우동을 되게 좋아한다. 가격이 저렴한 데다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점심이어서 일 것이다.
할배는 면발이 어떻고 국물이 어떻고 굉장히 세심한데 내 입에는 그게 그거다. 적어도 우동을 수십 그릇 먹었을텐데 아직 잘 모르겠다. 할배가 김치맛을 잘 모르듯 내가 아무리 먹어도 평생 모를 수도 있다.
덧붙이는 글 | 내 블로그 일본정원이야기(https://blog.naver.com/lazybee1)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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