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세상 만들겠다고 이름까지 바꾼 사람

이영천 2024. 1. 1.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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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김개남 장군의 생가 터를 찾아

2024년이 동학혁명 130주년이다. 처음엔 '반역'에서 동학란으로, 또 그사이 동학농민전쟁이었다가 백 주년에서야 비로소 ‘동학농민혁명’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름 하나 바꾸는데 백 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동학혁명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 혁명에 참여했던 오지영 선생이 지은 <동학사> 한 권을 들고 전적지를 찾아다니며, 그 답의 실마리나마 찾아보려 한다. 우리를 되돌아보는 기행이 되었으면 한다. <기자말>

[이영천 기자]

새로운 세상을 열어젖히겠다는 열망으로 이름까지 바꾼 인물이 있다. 기범(箕範)이란 본명을 버리고 '남녘을 열겠다(開南)'는 열망을 이름에 담아낸다. 정읍 산외면 동곡리 지금실에서 김개남이란 인물을 되새기는 건 그래서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구척장신이었을까? 혁명 과정에서 보여 준 강경한 태도처럼, 그의 성격도 불처럼 뜨겁고 격정적이었을까? 하지만 그에 대한 기록은 물론 기억마저 희미해지고 있다. 한 장의 사진으로 남은 이미지로 그저 추정할 뿐이다.
 
▲ 김개남 장군 한 장의 사진으로 남은 김개남 장군의 모습.
ⓒ 정읍시청
 
산외면 소재지는 두 물이 합쳐지는 동진강 상류다. 강을 건너자 평야는 사라지고 긴 산허리의 좁은 골짝이다. 삼거리 수풀에 가려진 '김개남 장군 묘'라는 안내판이 이곳이 동곡리임을 말한다. 골짝 사이로 개울이 흐르고, 좁다란 도로가 마을로 드는 길이다.

지금실은 여기서 북쪽으로 3km를 더 들어가야 한다. 구불길 양옆으로 높다란 밭과 산이 품을 좁혔다 넓히기를 반복하며, 초행길을 위로한다. 명당이라는 말이 그럴싸하다. 활처럼 휘어지는 언덕길을 돌아서자, 저수지 우람한 둑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지금실이다.

둑 아래, 앙증맞을 정도로 작은 마을이다. 얼핏 심산유곡 화전 마을이 연상된다. 논보다는 밭이 다수다. 이곳에서 상두산 자락 고개 몇을 넘고 10여km 북쪽이 김제 금산면 원평이다. 동학혁명 과정에서 수없이 등장하는 곳이자 김덕명과 김인배의 고장이다. 칠보 무성리를 지나 서쪽으로 13km 가면 정읍 북면 마정리 월천마을이다. 이 마을은 최경선 장군 태생지다.
 
▲ 지금실 마을 지금실을 내려다 보는 저수지 둑에서 바라 본 모습. 멀리 순창 쪽 산세가 굵다.
ⓒ 이영천
 
개울가 언덕 위, 저수지 둑이 마주 보이는 양지바른 자리에 규모 있고 단정한 매무새의 김개남 장군 단소(壇所)가 있다. 주차 공간까지 갖춘 걸로 보아 상당히 신경 쓴 흔적이 역력하다. 불과 20∼30년 전까지 동곡리에 증손이 살았다 하니, 흔적이라도 남았을까.
 
▲ 김개남 장군 생가지 지금실 마을 윗쪽에 생가지로 향하는 알림판.
ⓒ 이영천
 
단소에서 200여m 거리에 김개남 장군 생가터 안내판이 보인다. 들 일하시는 허리 굽은 노인의 안내가 친절하다. 하지만 생가터는 키보다 높은 수풀이 차지해 몇 걸음 떼기도 버겁다. 김개남에 대한 인식과 평가의 현재를 보는 듯하여 몹시 씁쓸했다. 노인은 몇 번이고 풀을 베어보나 소용없다 답하신다.

주전론자였을까?

동학혁명의 두 주역은 단연코 전봉준과 김개남이다. 이는 전주화약 후 전라도를 좌도·우도로 나누어 관리했다는 사실에서 단적으로 유추할 수 있다. 둘의 정치적 지향과 혁명전략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 김개남 장군 생가터 생가터는 온통 수풀에 묻혀 있다. 사진 한가운데 하얀 알림판마저 위태로워 보인다.
ⓒ 이영천
 
그러나 혁명을 전개해 나가는 전술에서는 다소 차이를 보인다. 이는 전주성 점령 직후 드러난다. 홍계훈과 싸우기보다 서울 진격을 김개남은 주장한다. 또한 벼슬아치로 대표되는 지배집단을 철저히 적(賊 혹은 敵)으로 간주한다. 전주화약에서 전라감사로 부임한 김학진과의 협상 자체를 비판한 게 대표적이다.
전라도 거의 모든 지역에 집강소가 꾸려지고, 김개남은 임실을 거쳐 남원으로 간다. 하지만 전라 53주 중 나주, 남원, 운봉에는 집강소 설치가 어려웠다. 수령이나 유생들이 조직한 민보군(民保軍)의 세력이 강한 탓이다. 김개남이 남원을 점령하는 과정을 동학사 '동학군과 경병(京兵)의 강화'에서 살펴보자.
 
한편 김개남은 3천 군사를 인솔하고 남원을 향해 진격하면서 남주송(南周松)을 선봉, 김중화(金重華)를 중군으로 삼아 바로 남원성을 공격하자 남원 부사가 관졸을 동원하여 방어하였으나, 곧 성을 함락시키고 관아를 점령하여 부사 김용헌(金龍憲)을 잡아내 죄를 따지자 부사가 굽히지 않음으로 그 목을 베어 관문에 걸고 방문을 지어 시가에 붙였다. (동학사. 오지영. 문선각. 1973. p225에서 의역하여 인용)
  
▲ 남원성 4각의 평지성인 남원성은 정유재란과 동학농민혁명 때 피해를 입는다. 지금 복원 중이다.
ⓒ 이영천
 
항복하지 않는 적일망정 포로로 살려두는 게 통상적이다. 하지만 김개남은 그렇지 않았다. 동학군이 전주성으로 진격하면서 포로로 잡힌 선전관 이주호 외 수행원 2명과 초토영 종사관 이효응과 배은환을 원평에서 처형한다. 그 실행자가 김개남이라는 말도 있다.

남원을 점령한 김개남은 전라 좌도는 물론 경상 서남부까지를 아우른다. 김인배가 빛나는 활약을 펼친다. 아울러 향후 일본과의 전쟁을 염두에 두고 지리산에서 활약하는 포수들과 천민들을 모아 별동대 성격의 부대를 구성하기도 한다. 향촌 지식인으로 오히려 혁명전략을 가장 적확하게 이해하고 행동한 전략가로 읽히는 대목이다.

전술 차이

조선의 차병(借兵) 요청으로 청나라 군대가 들어오자, 일본군도 따라 들어온다. 톈진조약으로 자기들끼리 약속이다. 흉계를 품은 일본은 6월 21일(음) 경복궁을 점령하고 왕을 꼭두각시로 만들어 버린다.
 
▲ 생가지 알림판 수풀에 가려져 보기도 힘겨운 생가지 알림판.
ⓒ 이영천
 
이 상황을 대비하고자 전라감사 김학진은 '관민상화(官民相和)'라는 명분을 내세워 집강소를 꾸린 동학군과 전라도 방어에 관한 협력을 모색한다. 전봉준은 이에 응한다. 당시 개화파를 협력대상자로 본 까닭이다. 하지만 김개남은 이 협상마저 비판하고 나선다. 복고주의자 황현이 쓴 오하기문은 그 폄훼하는 문체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기엔 제격이다.
 
김학진은 …(중략)… 서울에 난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군관 송(宋) 사마(司馬)에게 편지를 가지고 남원에 들어가 봉준 등에게 이러한 사정을 설명하고 나라의 어려움을 함께하자며 도인들을 이끌고 전주를 함께 지키자고 약속하였다. …(중략)… 봉준은 편지를 들고 …(중략)… 마침내 무리를 정돈하고 행동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개남은 아예 따르지 않고 자신의 부대를 거느리고… (번역 오하기문. 황현. 김종익 옮김. 역사비평사. 1995. p197)
 
이렇듯 김개남은 전봉준과는 혁명 전술은 물론 정치적 지향도 달랐다. 아울러 한창이던 농사일이 잠시 뜸해진 7월 보름(음), 추수가 끝나는 추석 이후 재봉기할 것을 최초로 언급한다. 이에 전봉준 등이 신중히 결정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방법상 차이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때 두령들을 따라 남원으로 모여든 군사가 7만 명이었다. 밖에서는 저 유명한 '남원대회'가 열리는 와중이다.
 
▲ 교룡산성 전라 좌도를 관장하던 김개남 군이 근거지로 삼았던 교룡산성. 사진 왼편 '김개남동학농민군주둔지'라는 안내가 그의 선명성 만큼 또렷하다.
ⓒ 이영천
 
하지만 김개남은 포수부대와 천민 부대를 보강하며 세력을 지속 확산해 나간다. 농민 위주 혁명군의 정신을 무장시키고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음으로써 정치의식을 높이고자 하는 방법이다. 8월 19일(음) 남원 교룡산성을 장악하고 병기고를 털어 무기를 보강하고, 부호들로부터 군자금을 징발한다.

남원 상회(相會)

이런 김개남의 움직임으로 인해 전봉준이 남원으로 발길을 향한다. 전봉준은 김개남에게 청일전쟁 승자의 칼끝이 동학혁명군을 향할 것이니, 군사를 나눠 각 지역에 은신하며 전쟁 추이를 지켜보자 주장한다. 집강소 체제의 유지 명분이다.

이에 김개남은 "민중은 한번 흩어지면 다시 모이기 어렵다"며 이를 반대한다. 다만 김개남도 남원성과 교룡산성을 보수하며 장기 농성태세를 갖춘다. 일본의 경복궁 점령으로 삼남 지방에서 일기 시작한 척왜(斥倭)의 힘을 모으고, 아울러 전봉준에게 결단을 촉구하는 행위였다. 이런 차이가 분명 '남원상회(相會)'를 열게 된 계기였다. 김개남의 기질이랄까, 성정을 즉자적으로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김개남의 일련의 움직임으로, 동학혁명 지도부는 숙고에 들어간다. 남원상회다. 8월 말 전봉준 김개남 두 사람은 주변을 다 물리치고, 비밀리 상의하며 혹은 언쟁을 혹은 합의해 가며 주야 8일간 격론을 벌였다고 '남원 동학사'는 기록하고 있다.

이 회합의 결론이 바로 재봉기였다. 그동안 정세를 관망하겠다던 전봉준 태도가 이 회합 후 급변하게 된 사실에서 남원상회 내용을 유추할 수 있다. 추석이 지난 9월 8일(음)부터 전봉준도 재봉기 준비를 서두르기 때문이다. 이처럼 다중의 지성은 늘 현명하다.
 
▲ 김개남 장군 태생지 정읍 산외면 정량리 원정마을의 김개남 장군 태생지 알림판.
ⓒ 이영천
 
김개남 태생지는 지금실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산외면 정량리 원정마을이다. 면 소재지에서 동북쪽으로 동진강 건너다. 개울 양편으로 난 굽은 길을 따라 돌고 돌아 마을 안길로 접어드니, 전봇대에 '김개남 장군 생가터'라는 작은 안내판이 보인다. 원정2길 20번지다. 집은 최근까지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역력하나, 비어있는 듯 보였다.

김개남의 태생지와 생가터를 돌아본 발걸음은 무거웠다. 붙잡혀 재판도 없이 전주에서 참형 당해 자세한 기록도 없다. 그런 이유로 그에 대한 평가는 일정부분 왜곡되어 있다. 이런 인식을 누가 주입하였건 이젠 제자리를 찾아 줄 때가 되었다. 상두산을 비롯해 주변 강인해 보이는 산세가 그와 닮아 보여 작은 위안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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