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에 대한 해묵은 오해, 이 책으로 벗어보자

김성호 2024. 1. 1.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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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의 독서만세 212] 백종현 지음 '인간이란 무엇인가'

[김성호 기자]

한때 철학은 세상 모든 것을 논했다. 이것이 철학을 학문 중 으뜸으로 불리게끔 하였으나, 또 이것이 철학을 불완전한 학문으로 여겨지게 하였다. 그 시절, 철학은 기적을 이야기했다. 철학은 영혼을 이야기했다. 철학은 신을 이야기했다. 철학은 천사를 이야기했다. 철학은 지옥을 이야기했다. 그 온갖 것을 이야기하면서도 실체를 제시하지 못하니 철학은 학문으로서 제 가치를 의심받았다.

그때 한 학자가 나타났다. 그는 말했다. 세상엔 공간과 시간이 있다고,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은 공간과 시간의 지평 위에 존재한다는 뜻이라고, 그 어디에도 없다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이다. 공간상의 어디에, 시간상의 어디에 있는 것만이 철학이 논할 수 있는 존재자가 된다. 그의 이 같은 주장으로부터 과학은 철학 안에 받아들여졌고, 종래의 종교적 믿음들은 철학의 울타리 바깥으로 밀려나게 된다.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 칸트다.

때로 오해를 받는 학자들이 있다. 실제 한 말과 추구한 학문, 쌓아온 결실들과는 달리 말 몇 마디와 평가 조금으로 존재가 규정되는 이들이 있는 것이다. 원전은 읽지 못한 채로 전해지는 단면만을 받아서 외우는 한국 교육의 현실에서, 적잖은 학자들이 실제와는 다른 이미지를 남기고야 만다.
 
▲ 인간이란 무엇인가 책 표지
ⓒ 아카넷
 
지루한 꼰대 철학자? "무슨 소리!"

염세주의의 대표주자이자 세상 부정적인 인물로 알려진 아르투르 쇼펜하우어도 그중 하나다. 통상 세상을 부정적으로만 바라보았다고 여겨지는 그는 기실 행복을 삶의 가장 큰 목적으로 바라본 인물이었다. 그의 철학이 세상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건 어디까지나 세상을 바꾸려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무가치한 것들로 가득한 세상을 부단한 자기극복과 내면의 명랑함을 통해 바꾸어나가는 것, 그것이 쇼펜하우어 철학의 중심을 이루는 자세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그저 염세주의자이며 비관론자라고 기억한다.

쇼펜하우어 이전, 또 다른 누명을 쓴 학자가 있다. 그가 바로 칸트로, 한국 교육과정에선 '정언명령'의 주창자 쯤으로 알려져 있다. 행위가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와 관련 없이 행위 그 자체를 위해 행동하도록 하는 이 개념을 칸트는 보편타당한 원칙으로 세웠다. 그의 철학은 '그것이 옳으니 무조건 해야만 한다'는 단편적 지식으로 소비돼 매우 보수적이고 꼰대적인 이미지를 굳히게 되었다.

불행히도 한국의 교육과정은 칸트의 이름만 널리 알렸을 뿐, 그의 철학이며 업적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다. 실제로 칸트가 어떤 위상을 가졌는지, 그의 학문이 어째서 그에게 불후의 명성을 안겼는지를 전혀 소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기존의 종교적 믿음을 철학의 영역에서 배제한 사실만으로도 그는 비판적 정신을 가진 학자인 것인데 그와 같은 부분은 전혀 주목을 받지 못한다.

칸트를 보면 투덜댈 수 없다

다행히 한국엔 칸트를 깊이 연구한 학자들이 몇 있어 그들이 내놓는 철학서를 통해서 그 왜곡된 이미지를 바로잡을 여지가 있다고 하겠다. 한국 철학계를 대표하는 한국칸트학회의 회장을 역임한 백종현 선생도 그와 같은 인물 가운데 하나다. 그가 2018년 출간한 <인간이란 무엇인가>는 그 유명한 칸트의 3대 비판서를 깊이 있게 분석한 책으로, 일평생 칸트를 연구한 학자의 칸트 해설서라 보아도 무방하다.

책은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에 이르는 칸트의 명저를 차근히 소개한다. 현대 독일어로 번역해도 난해한 이 엄청난 고전들을 저자가 심혈을 기울여 설명하려 노력한다. 한국어 칸트전집 출간을 기념해 이뤄진 세 번의 특강을 정리해 보완한 것으로, 대중적으로 친근하게 칸트를 소개하려는 의지가 선명하게 느껴진다.

칸트의 철학은 심오해 오늘의 평범한 지능으론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장담하기 어렵다. 그러나 평생에 걸쳐 칸트철학의 정수에 기꺼이 도전해온 이 노학자의 안내를 받는다면 셰르파와 함께 고봉에 오르는 산악인들이 그러하듯 한참 수월하게 그 경지를 맛볼 수 있으리라 믿는다.
 
칸트를 보면 나는 왜 시골에서 태어나 이런 부모 밑에서 자라나서 이 꼴인가 하고 투덜댈 수가 없다. 칸트야말로 정말 별 볼 일 없는 집에 태어나서, 부모가 해준 거라고는 일곱 살 때까지 밥 먹여준 것밖에 없었다. 그다음부터는 성실성으로 그만의 삶의 가치를 만들어냈다. 칸트에게 뛰어난 재능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학생 시절의 칸트가 탁월했다는 증언은 없다. 호기심이 좀 많고 성실했다는 증언이 좀 있을 뿐이다.- 오로지 성실성만이 그의 기반이었다. 돌봐주는 사람도 없었으니 교수 자리조차 마흔다섯 살이 넘어서야 겨우 이를 수 있었다. 그때는 평균 수명이 40대 수준이었을 것이고, 보통 건강한 사람이 60세 정도 살았을 것이니, 만약 그가 여느 사람처럼 살았다면 교수도 못해보고 죽었을 것이다. 스스로 섭생을 잘해서 오래 살아남았기 때문에 늦게라도 교수가 될 기회를 얻은 것이다. 이 또한 칸트가 주는 교훈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칸트는 자신의 삶을 통해 보통 사람들도 주어진 환경을 탓하지 않고 성실히 살면 길이 열린다는 것을 보여준다. -203, 204p

덧붙이는 글 | 김성호 서평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독서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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