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강감찬 아닌 '고려거란전쟁'…대하사극 틀 깬 제목의 비밀
기병을 앞세워 몰려오는 수만 명의 거란군과 맞서는 고려군 검차의 행렬. 날카로운 칼이 달린 검차를 뛰어넘어 공격하는 거란군들과 뒤엉켜 백병전을 벌이는 고려군사들. 또 성을 향해 마치 별이 쏟아지듯 날아오는 투석기가 쏘아 올린 불덩이들.
KBS 대하사극 ‘고려거란전쟁’은 그 시작부터가 어딘가 다르다. 스케일이 커졌고, 특수효과로 구현해낸 전쟁장면은 마치 외국의 판타지 영화를 보는 듯한 실감이 더해졌다. KBS 대하사극의 전쟁신에서 늘 봐왔던 ‘소박한’ 장면들과는 너무나 비교된다.
총 제작비 270억원. ‘고려거란전쟁’은 KBS 대하사극으로서는 사상 최대의 제작비를 쏟아 넣었는데, 그중 상당 부분이 전쟁 장면 CG(컴퓨터그래픽)에 들어갔다. OTT(온라인동영상서비스) 등이 일상화되면서 완성도 높은 국내외 콘텐트들을 접하게 된 시청자들의 눈높이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고려거란전쟁’은 바로 이 눈높이를 만족시키는 시작으로 우려를 기대로 바꿨다. 기존 대하사극과는 확연히 차별되는 ‘뉴노멀’을 보여줄 거라는 걸 분명히 한 것이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최고 시청률 10%(닐슨코리아)에 웰메이드라는 호평이 쏟아졌고 OTT에서도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이러한 성공은 단지 만듦새 때문만은 아니다. 먼저 고려와 거란 사이에 벌어졌던 26년간의 전쟁이라는 실제 역사적 사실 자체가 드라마틱한 서사를 갖고 있다.
우리에게는 강감찬(최수종)의 귀주대첩으로 주로 알려졌지만, 그 이외에도 드라마틱한 전투들이 소개된다. 서북면 도순검사 양규(지승현)가 고작 2000여 명의 병력으로 40만 거란군을 상대해 물리친 흥화진 전투가 대표적이다. 투석기를 사용하고, 맹화유(맹렬하게 타오르는 기름), 함마갱(인마살상용 함정)이 등장한 흥화진 전투는 마치 전략게임을 보는 듯한 디테일한 전쟁 신의 묘미를 살렸다.
양규는 강감찬이 본격적으로 전쟁을 진두지휘하게 되는 중후반부로 가는 과정에서 상당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인물로 등장한다. 흥화진을 지켜낸 데 이어 거란군 수만 명이 점령한 곽주를 700명의 결사대로 탈환하는 전투를 이끄는 인물이다.
이처럼 한두 명의 영웅 서사가 아니라 전쟁 곳곳에서 활약한 여러 영웅의 서사를 담고 있는 것도 ‘고려거란전쟁’의 특징이다. 이건 기존 대하사극들이 늘 특정 인물의 이름을 제목으로 삼았던 것과 달리, 이 작품이 ‘전쟁’을 제목으로 쓴 이유이기도 하다.
여기에 KBS 대하사극이 주로 해왔던 정치극적 요소들도 빠지지 않는다. 강조(이원종)가 목종(백성현)을 폐위하고 세운 현종(김동준)이 전쟁을 통해 사분오열하는 신하들을 이끌며 정치적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이 그것이다. 왕을 시해한 반역자지만 전장에 나서는 강조에게 현종이 승전을 기원해주는 모습이나, 현실을 이야기하며 항복을 권유하던 유진(조희봉)을 파직했지만 다시금 불러 재상 역할을 하게 하는 이야기, 또 백성과의 약속을 저버릴 수 없다며 몽진 가기를 죽기로 거부하다 강감찬의 설득으로 훗날을 기약하는 이야기 등은 정치극 속에서 현종이라는 인물의 성장담을 흥미진진하게 만든다.
우리네 전쟁의 역사가 대부분 그러하지만, ‘고려거란전쟁’ 역시 외세의 침략을 버텨내고 결국은 물리친 전쟁이다. 도저히 이겨낼 수 없을 것 같았던 전쟁을 버텨내는 이야기는 그래서 이른바 ‘존버의 시대’로 불리는 현재의 정서와 맞닿는 면이 있다.
혹독한 현실 앞에서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현재의 삶이, 1000년 전 고려가 맞닥뜨리게 됐던 외세의 침략에 맞서는 이들의 삶과 선택들에 정서적인 공감대를 갖게 한 것이다. 게다가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과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처럼 현실화된 전쟁의 위기 앞에 ‘어떤 전쟁’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메시지도 이 작품은 담고 있다.
즉 약탈이라는 욕망을 앞세워 벌이는 거란의 전쟁과, 백성들의 생명과 평화를 위해 싸우는 고려의 전쟁은 그 자체로 분명하게 대비되어 그려지고 있다. 전쟁은 모두에게 비극이지만, 만일 벌어진다면 어떤 전쟁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1000년 전 역사를 통해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이제 ‘고려거란전쟁’은 강감찬이 본격 등판하며 그 존재감을 높여가고 있다. 거란군 본진에 홀로 들어가 거짓 항복을 함으로써 적들을 교란하기도 하고, 또 거란군에게 붙잡혀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내 입을 열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모두가 항복하자고 할 때도 이를 거부하고 흔들리는 조정의 중심을 잡아줬던 강감찬은 이제 고려군사들을 이끌며 귀주대첩의 대승을 그려내는 이 전쟁의 극점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태조 왕건’ 이후 대하사극의 대명사처럼 된 최수종의 안정감 넘치는 사극 연기와, 현종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자신도 성장하고 있는 김동준의 연기 앙상블이 더해져 이 전쟁의 절정이 어떻게 그려질지 못내 궁금하다. 최수종은 지난해 연말 이 작품으로 16년 만에 KBS 연기대상을 거머쥐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공영방송으로서 우리의 역사를 담는 정통사극의 필요성은 늘 존재했던 게 사실이다. 다만 지금의 시청자 눈높이에 맞춰진 수준 높은 완성도가 요구됐을 뿐이다. 과연 뉴노멀로 돌아온 ‘고려거란전쟁’이 거둔 성공은 그 전리품으로서 KBS 대하사극을 앞으로도 계속 이어가게 만들 수 있을까.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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