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이 사라진지 하루만에 새 애인을 만든 남자?

김성호 2024. 1. 1.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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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의 씨네만세 622] <히든 페이스>

[김성호 기자]

설정이 다 한 영화가 있다. 참신하고 기발하여 설정을 유지하는 것만으로 관객은 숨죽여 지켜볼 밖에 없는 경우다. 설정만으로 끝없이 이어진 <큐브> 시리즈가 그랬고, 또 직쏘라는 희대의 캐릭터를 만든 <쏘우> 시리즈도 그랬다. 때로는 난 데 없이 땅 속 관 안에 갇혀 있기도 하고(<배리드>), 때로는 무더운 여름 날 에어컨 없는 골방에서 만장일치의 표결을 내려야 하기도 한다(<12인의 성난 사람들>).

짧게는 90분에서 길게는 2시간을 훌쩍 넘는 장편 영화를 이끌어가는 이들 작품은, 물론 드라마와 연기, 연출 따위가 중요한 역할을 해내기도 하지만 그저 설정만으로도 상당한 매력을 발휘하는 데 성공한다. 관객은 이 같은 어려움이 주는 극적 재미를 한껏 느끼며 스크린을 뚫고 제가 저 안에 있을 때의 어려움을 상상해보게 되는 것이다.

할리우드가 아닌 외화가 멀리 바다 건너 한국에 소개되는 경우는 그리 많지가 않다. 한국 영화 수입사도 흥행이 되는 작품을 중심으로 들여오게 마련이니 유명한 배우가 아니거나 큰 제작사가 만들지 않은 영화가 국내에 유통되긴 어려운 탓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만나는 할리우드나 유럽, 일본과 중국이 아닌 영화는 눈 높은 관객 앞에 저를 설득해낼 매력을 지닌 경우가 많다. 기발한 설정도 그중 빼놓을 수 없는 하나다.
 
 영화 <히든 페이스> 포스터
ⓒ 더블앤조이 픽쳐스
 
설정만으로 러닝타임을 장악하는

<히든 페이스>가 꼭 그 같은 영화다. 웬만한 영화 애호가도 작품 하나를 대지 못할 남미 국가 콜롬비아의 영화다. 한국엔 거의 안 알려져 있는 콜롬비아에서 찍은 스릴러 영화가 한국에서 개봉하고 OTT 서비스를 통해 꾸준히 소비되는 데는 영화가 가진 특장점이 큰 영향을 발휘했다 해도 좋을 것이다. 다름 아닌 설정의 힘이다.

영화는 한 남자(킴 구티에레즈 분)의 실연으로부터 시작한다. 그가 눈물을 흘리며 들여다보는 것은 휴대폰으로, 그 안엔 한 여자(클라라 라고 분)가 그를 떠나며 남긴 영상편지가 재생되고 있다. 고통에 몸부림치던 그는 여느 남정네들이 그러하듯 술집으로 달려가 독주를 주문한다. 술집에서까지 눈물을 흘리는 그를 보며 여급 하나가 저는 눈물을 흘리는 남자는 딱 질색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를 들은 다른 여급(마르티나 가르시아 분)이 말하길, 저는 꼭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단다. 남자가 마음에 든 것이다.

그로부터 영화는 이 여자와 사내 사이에 이뤄지는 새로운 관계, 곧 사랑에 주목한다. 누군가는 이별하면 지나간 연애에 애도의 기간이 필요하다 여기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사람은 새로운 사람으로 잊는다며 헤어짐을 만남으로 덮기도 하는 것이다. 그중 무엇이 더 옳은 방향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나 적어도 영화 속 사내에겐 명확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제 여자가 떠난 지 채 하루가 지나지 않아 다른 여자와 관계를 시작하고, 급기야 함께 밤을 보내기에 이른다. 그렇게 새 여자가 애인이 되고, 사내는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을 시작한다.
 
 영화 <히든 페이스> 스틸컷
ⓒ 더블앤조이 픽쳐스
 
실연 하루만에 애인을 잊었다

사내는 콜롬비아 수도 보고타 근교의 저택에 살고 있다. 여자가 도심에 살지 않는 이유를 묻자 그 편이 생각에 도움이 된다고 답한다. 그는 생각과 감상 따위가 필요한 직업을 가졌는데, 다름 아닌 보고타 시립교향악단의 지휘자다. 사내는 곧 새 여자에게 제 집에서 함께 지내자고 제안하고, 젊고 돈 많은 사내가 좋았던 여자는 기꺼이 그를 따른다.

유일한 문제라면 경찰이 저택을 찾아 떠난 전 애인의 행방을 묻는다는 사실이다. 경찰에 따르면 그녀는 나라 밖으로 떠난 것도, 가족에게 돌아간 것도 아니란다. 갑자기 증발한 전 애인과 그를 찾는 경찰의 존재는 하루 만에 새 애인을 맞이한 남자에 대한 의심이 되어도 이상할 게 없지만 갑자기 나타난 멋진 남자에게 홀딱 반해버린 여자는 이상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자, 여기까지가 이 영화가 제 설정을 내보이기 위해 필요한 서막이다. 영화는 이로부터 영화 속 인물들이 알지 못한 진실을 까발린다. 새롭게 시작한 남녀가 제 사랑을 한창 불태울 때쯤, 등장하는 새로운 인물이 있다. 다름 아닌 경찰이 찾고 있는 떠나간 여자다. 여자의 이름은 벨라,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제 애인이 사는 저택에 있었다. 그것도 죽지 않고 산 채로 말이다.
 
 영화 <히든 페이스> 스틸컷
ⓒ 더블앤조이 픽쳐스
 
누구도 알지 못하는 비밀의 공간

벨라가 있던 곳은 저택 안 비밀의 공간, 저택을 판 여주인과 친해져 대화를 나누던 중 그녀가 귀띔해준 곳이다. 벨라와 애인은 본래 스페인 사람으로, 스페인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던 남자가 멀리 콜롬비아 보고타 시향에 원서를 넣어 합격하며 함께 이주한 터였다. 같은 스페인어를 쓰기는 해도 유럽 이베리아 반도에서 남미 고원 도시까지 옮겨오는 건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테다.

오로지 남자만 믿고 멀리 터전을 옮긴 그녀지만, 막상 펼쳐진 삶은 생각과는 달랐다. 남자는 시향 지휘자로 승승장구하는데 저는 일할 것이 없어 집에만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우연히 찾은 남자의 작업실에서 그가 여자 단원과 따로 술을 마시는 것을 목격하곤 잔뜩 성이 나 있던 터였다. 보고타엔 친구도 없는지라 말을 튼 집주인과 아쉬운 이야기를 하니 그녀가 말하기를 남자친구에게 사랑이 영원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게 어떻냐는 이야기다. 다름아닌 비밀의 방으로 사라져서 말이다.

그로부터 알게 된 비밀의 방은 집에서 나는 소리를 스피커를 통해 들을 수도 있고, 커다란 거울을 통해 방 안에서만 집을 바라볼 수도 있다. 그러면서도 소리도 무엇도 새나가지 않으니 애인에게 들킬 염려 없이 사라지는 긴장을 맛보게 할 수 있지 않느냐는 제안이다. 호기심 많고 잔뜩 심심해 있던 그녀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다. 그렇게 그녀는 남자를 떠난다는 영상을 녹화한 뒤 메모를 써 남기고 방으로 사라진다.

죽느냐 탈출하느냐, 갇힌 여자의 발버둥

모든 게 마음처럼 흘러가면 얼마나 좋을까. 잔뜩 들떠 옷가지부터 가져온 제 물건을 싹 챙기느라 정신이 없어서일까. 비밀의 방 열쇠를 챙기지 못한 채 방에 들어온 것이다. 이 방으로 말하자면 나치 잔당인 전 집주인 사내가 설계한 것으로, 이스라엘 요원들에게 불법 체포돼 이스라엘로 송환된 뒤 교수형을 당한 아돌프 아이히만과 같은 꼴을 면하기 위해 철통같이 만든 대피소다. 오로지 열쇠 하나만으로 문을 열고 닫을 수 있고, 이 열쇠가 없다면 누구도 드나들 수 없도록 설계됐다. 그런데 그 열쇠가 없다니, 나갈 수가 없는 것이다.

앞의 절반이 사라진 애인을 잊으려 새 사랑을 시작한 이의 이야기였다면, 뒤의 절반은 꼼짝없이 방 안에 갇혀 눈 뜨고 제 애인이 새 여자와 뜨거운 사랑을 나누는 모습이며 소리를 접할 수밖에 없는 이의 이야기가 된다. 물론 그보다도 고통스러운 건 당장 먹을 음식이 없이 방에 갇혀 죽을 수도 있다는 고통일 테다.

그렇게 영화는 여자가 이 방에서 탈출하기 위해 벌이는 모든 노력들과 그 노력이 닿는 결과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방 안에 갇혀 제 애인이 다른 여자와 노는 꼴을 보면서도 어떻게든 생존해야 하는 여자의 사정이라니 대체 누가 눈을 뗄 수 있을까. 설정 좋은 영화가 끝도 좋은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지만 이 영화가 바다 건너 한국에까지 소개되었다는 건 꽤나 괜찮은 작품이 되었다는 뜻이겠다.

그렇다면 여자는 과연 탈출에 성공했을까? 성공했다면 어떻게 나올 수 있었을까. 나온 뒤에 저를 잊고 새 사랑을 시작한 사내와 어떻게 재회했을까. 그 모든 걸 풀 열쇠가 이 영화 안에 담겨 있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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