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보면]이순신이 노량서 '아웃복싱' 구사하지 않은 이유(中)

이종길 2024. 1. 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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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 진영까지 쫓아가서 장군기 찢어버린 진린
"원수 갚는다면 죽어도 여한 없겠나이다…"
등자룡 판옥선, 급박한 상황서 함포 오발 사고
인간성 상실, 삶·죽음 무감각 유발한 노량해전

'알고 보면' 좋을 정보를 두서없이 전달한다. 영화를 흥미롭게 관람하는 팁이다.

*에 이어

*고니시 유키나가는 순천왜성 천수각 운치를 즐겼다. "무식한 칼잡이 놈이 지은 성보다 백번 낫다. 그렇지 않은가." 그는 울산왜성을 짓고 주둔 중이던 가토 기요마사를 '무식한 칼잡이'라고 불렀고, 가토는 그런 고니시를 '미천한 장사꾼 아들'이라고 비아냥거렸다. 둘의 갈등은 전쟁 양상을 바꿔놓을 정도로 심했다.

*고니시가 타고 온 군선에는 'X' 모양의 군기가 펄럭였다. 원래는 붉은 바탕에 흰색 십자가 모양의 깃발을 사용했다. 도요토미가 크리스트교 금교령을 내리자 십자가를 'X'자 모양으로 변형시켜 눈가림했다.

*순천왜성은 예교성이라고도 불렀다. 북쪽과 동쪽, 남쪽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육지로 공격할 수 있는 경로가 서쪽밖에 없어서다. 3만5000여 병력의 조명연합군은 서쪽을 계속 두들겼으나 1만5000여 병력의 일본군을 뚫어내지 못했다. 가뜩이나 남의 나라 전쟁에 시큰둥하던 유정은 공격 의지를 상실했다. 공격을 은근히 권율에게 맡기다시피 했다. 권율은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거부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 무렵 이순신은 순천왜성 앞 장도라는 섬을 공격하고 있었다.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육지가 됐으나 당시에는 대규모 일본군 함대가 정박해 있었고, 순천왜성의 식량창고 역할을 할 정도로 많은 군량미가 비축돼 있었다. 이순신은 장도를 공격해 군량미 창고를 다 불태워버리고 일본 함대 서른 척을 격침했다. 동시에 일본군 1000명 이상을 사살하고 왜선 열한 척을 나포했다.

*장도를 점령한 이순신은 진린과 함께 순천왜성을 공격했다. 바다를 통해 육지 성을 공격하기란 쉽지 않았다. 높은 지역서 화포를 놓고 쏘아대니 사정거리와 위력이 판옥선에 못지않았다. 게다가 순천왜성에 숨어든 왜군이 본국으로 돌아갈 때를 대비해서 정박시켜둔 함대가 300척에 가까웠다. 이 함대가 방파제의 보호를 받는 위치에서 대기 중이었기에 다급하면 조선 수군을 에워싸며 달려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이 해안 일대는 썰물 때면 갯벌이 보일 만큼 조석 간만 차가 컸다. 해상에서 공격할 시간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진린의 함대 서른아홉 척은 썰물에 갇혀버렸고, 조선의 판옥선 세 척도 고립됐다. 일본군은 기다렸다는 듯 순천왜성에서 쏟아져 나와 역공을 펼쳤다. 이순신은 진린을 구원해야 했다. 기함 바닥이 갯벌에 닿을 정도로 접근해 포와 활을 쐈다. 갖은 노력에도 명나라 수군 약 800명이 전사했다. 갯벌에 갇힌 판옥선 세 척은 일본군의 등선 육박 전술을 잘 막아내고 있었다. 뱃전에서 쉴 새 없이 활을 쏘고 판옥선 위로 기어오르는 왜군들을 베어내며 끝끝내 버텨줬다. 판옥선은 규모가 크고 높아 왜군들이 올라타기 쉽지 않았다. 진린과 그의 병사들은 이순신이 선물해준 판옥선이 아니었다면 괴멸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밀물이 차올랐고, 조선 함대들은 갯벌 가까이 들어가 판옥선 세 척과 진린을 구출해 돌아올 수 있었다.

*이렇게 조명연합수군이 맹렬히 순천왜성을 공격할 때 육군을 이끌던 유정은 공격하는 척만 하며 함성만 지르고 있었다. 그걸 들은 진린과 이순신은 육군이 선전한다고 착각했고, 바다 위에서 힘차게 공격하다가 갯벌에 빠지는 수모를 당했다. 진린은 분노했다. 유정의 진영까지 쫓아가서 장군기 깃발을 찢어버렸다. 계급은 유정이 조금 더 높았지만 찔리는 게 있었던지라 부하 장수들의 무능력만을 탓했다.

*결과적으로 순천왜성 공격은 실패했다. 하지만 이순신 수군은 장도를 점령했고 일본 함대 약 서른 척을 수장시켰다. 명나라 병사들도 구했다. 병력 손실이 거의 없었기에 이순신의 패배로 보기는 어렵다. 순천왜선에 정박해 있던 함대 300여 척이 이순신을 만나기 두려워 바다로 출격하지 못하는 상황이었기에 참전만으로도 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고니시는 유정의 육군을 경험해보고 전황이 오히려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협상하는 한편 기회를 보아 인근 왜군과 연대해 조명연합군을 초토화할 생각이 있었다. "철수에는 화평이 성립되어야 하며, 화평 없이 철수한다면 적에게 반격당해 고전이 예상된다. 지금은 일본 측의 전황이 유리하므로 적군이 새롭게 군사 행동을 취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럴 때야말로 화평을 성사해야 한다. 지금까지 화평 교섭에서 조선의 왕자를 인질로 보낸다는 조건이 있었지만, 공물이라도 상관없다고 한다면 화평은 쉽게 성립될 것이다. 또한 일본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여러 성은 남겨두어야 한다(고니시의 1598년 10월 10일자 서장).

*가토 기요마사가 지키는 울산왜성의 일본군은 조선 수군의 방해를 받지 않고 대마도를 거쳐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시마즈 요시히로가 지키는 사천왜성의 일본군도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충분히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부산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순천왜성의 고니시 유키나가는 이순신과 진린의 함대에 의해 바다가 막혀 있었다. 고니시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주군이었던 도요토미는 이미 죽었고, 새롭게 주군이 될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고작 열 살이었다. 야욕을 드러낸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어떻게든 새 주군을 지켜야 했다. 후계자 문제로 일본 정국이 복잡해서 빨리 돌아가 입장을 취해야 했다. 그러나 이순신과 진린에 의해 바닷길은 막혔고, 도처에 깔린 조명연합군 때문에 육지를 통해 부산까지 탈출하기도 사실상 불가능했다. 고니시는 고심 끝에 명나라 사령관 유정에게 연락을 취했다. 싸울 의지가 별로 없어 보였던 그를 설득하기로 했다. 그는 퇴로를 막거나 뒤에서 공격하지 않으면 순천왜성은 물론 군량미와 일본의 무기들을 고이 내어주겠다고 제안했다. 유정은 제안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담보로 명나라 군인 마흔 명을 인질로 보냈다. 신이 난 고니시는 잔치를 벌이고 부하들에게 술자리를 베풀었다. 이튿날 남해도 바로 옆에 있는 창신도라는 섬으로 이동하려고 했다. 이곳에는 사위인 대마도 성주 소 요시토시가 주둔하고 있었다. 창신도에서 그를 만난 뒤 사천왜성에서 마중 나올 시마즈와 합류해 부산까지 건너갈 계획이었다.

*다음 날 출병하려던 고니시는 분노했다. 순천왜성 앞바다에 조명연합군 함대가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니시는 인질로 잡혀있던 명나라 군인들의 손을 잘라서 유정에게 보냈다. 유정은 진린에게 지시를 내릴 수 없는 상황임을 알렸다. 고니시는 태세를 바꿔 유정을 포기하고 진린의 탐욕을 노렸다. 상당한 수준의 뇌물을 받은 진린은 순천왜성 포위망을 풀어버렸다. 진린을 믿은 고니시는 함대 300여 척에 모든 병력을 태우고 순천왜성을 빠져나왔다. 약속대로 명나라 수군들은 보이지 않았다. 일본군들은 신이 나서 노를 저으며 함선 속도를 높였다. 그러나 조선의 함대는 포위망을 풀지 않았고, 혹여나 모를 고니시 부대의 도망을 대비하고 있었다. 고니시의 선발대 열 척은 속도를 높이다 만난 조선 함대에 발각돼 몰살당했다. 결국 고니시는 다시 순천왜성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는 진린에게 따졌다. 진린은 "이순신이 내 말을 들을 사람도 아니고, 그 사람 하는 일을 내가 말릴 수도 없지 않은가"라고 답했다.

*고니시는 마지막 싸움을 결심했다. 창신도에서 만나기로 한 사위 소 요시토시와 사천왜성의 시마즈에게 구원을 청했다. 그들과 합세해 조선 수군을 뚫고 일본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명나라 함대는 구원을 청하러 가는 첩보선을 보고도 못 본 척 길을 터줬다. 조선 수군은 늦게나마 이를 발견하고 사력을 다해 쫓았다. 그러나 첩보선은 조선의 함선보다 더 빨리 한산도에 다다랐고, 일본군은 배를 버린 채 육지로 상륙했다. 조선 수군은 더 이상 추격을 멈췄다. 당시 한산도에 본국으로 귀환 대기 중인 일본군이 주둔해 어쩔 수 없었다.

*서신에는 이 같은 내용이 있었다. '시마즈 그대가 노량 해협을 뚫고 이쪽으로 공격해 오면 나도 동시에 공격하면서 이순신의 함대를 둘러싸고 협공할 수 있다.' 고니시를 탈출시키기 위해 시마즈와 소 요시토시, 거제도 책임자였던 다치바나 무네시게, 부산의 다카하시 무네마스까지 무려 다섯 사단의 500여 척이 창신도에 집결했다. 순천왜성에서 빠져나올 고니시 함대 300여 척도 대기하고 있었다. 잘못하면 이순신과 진린의 함대가 일본 함대 800여 척에 에워싸일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소식을 접한 이순신은 고니시를 구하러 오는 시마즈 함대를 먼저 격파해야만 했다. 진린에게 함께 전투에 나서기를 청했다. 진린은 머뭇거렸다. 고니시한테 받은 뇌물도 있거니와, 남의 나라의 다 끝난 전쟁에 나서고 싶지 않았다. 화가 난 이순신은 설득을 포기하고 단독 출정을 결심했다.

*진린은 홀로 전투를 준비하는 이순신을 보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전쟁을 끝내고 본국으로 돌아가려는 적을 막아서는 일이 쉽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살아서 돌아가려는 자들의 발악이 충분히 예상됐다. 그러나 적이 돌아가도록 내버려 두면 끝날 전쟁을 기어이 막아선다는 건 군인으로서 너무 훌륭한 신념이었다. 나라와 강토를 짓밟은 외적이 살아서 돌아가는 길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나라의 자존심을 건 큰 생각이었다. 진린은 외면할 수 없었다. 이순신이 단독으로 공을 세운다면 명나라로 돌아가서 입장도 난처해질 터였다. 그는 울면서 겨자 먹듯이 이순신과 함께 참전하기로 결심했다.

*이순신은 노량해전을 앞두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오늘 진실로 죽음을 각오하니, 하늘에 바라옵건대 반드시 이 적을 섬멸하게 하여 주소서. (…) 이 원수를 갚을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나이다."

*시마즈의 부대는 일본 내에서 가장 용맹하기로 유명한 규슈 사쓰마번의 군대였다. 병력도 1만 명에 달했다. 이 군대에 원균이 칠천량에서 통한의 패배를 당했다. 소 요시토시 부대는 대마도 출신들로, 바다와 해전에 능한 특공대들이었다. 진린의 명나라 수군 역시 요동 기병보다 전투 수행 능력이 뛰어났던 절강성의 남병 1만 명 규모였다. 하지만 당시 해전 능력만큼은 세계 최강이라고 자부해도 손색없는 이순신의 조선 수군이야말로 분명 최고 에이스였다.

*1598년 11월 19일 새벽 2시. 창신도에 모여 있던 시마즈, 소, 다치바나, 다카하시의 함대 500여 척이 노량 해협으로 들어왔다. 탑승한 일본군은 2만 명에 육박했다. 조선 수군의 함대는 판옥선 여든 척에 협선까지 더하면 200여 척이었고, 병력은 1만 명 정도였다. 진린이 이끈 명나라 수군은 함대 300여 척에 병력은 1만 명이었다.

*시마즈를 앞세운 일본군이 숨죽여 노량해협을 건너려 할 때 조선 수군도 소리 죽여 그 바다를 지키고 있었다. 조선 수군은 남해도 왼쪽에 자리를 잡았고, 명나라 수군은 적들이 노량 해협에서 빠져나왔을 때 만나는 위치의 북쪽에 매복 중이었다. 시마즈로선 비좁은 노량 해협을 어서 빠져나가야 했고, 이순신은 노량에서 빠져나오는 일본 함대를 명나라 함대와 함께 에워싸서 공격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일본군이 노량 해협을 빠져나와도 정면에는 섬들이 병풍처럼 가로막고 있기에 일본군을 둘러싸기에 좋은 위치였다. 이순신은 마냥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일본 함대에 기죽지 않았음을 보이기 위해 몇 척의 판옥선을 노량 해협으로 보내 시미즈 함대의 선두 전함을 타격했다. 이렇게 양쪽 도합 1000여 척의 함대가 사투를 벌인 세계 해전사에 기록될 노량해전이 시작됐다.

*좁은 노량 해협에서 판옥선과 마주친 시마즈는 놀랐다. 판옥선 함포가 불을 뿜고 시마즈 함대 몇 척이 격침됐다. 칠천량에서 단 한 적의 전함 피해 없이 원균의 조선 수군을 압살했던 시마즈 역시 이순신은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시마즈는 그대로 물러서지 않았다. 조선 판옥선들의 함포 사격 사정거리 안으로 달라붙으라는 진격 명령을 내렸다. 세키부네들은 빠르게 판옥선에 달라붙었다. 수적으로 밀린 판옥선들이 뱃머리를 돌려 도망쳤다. 판옥선을 쫓아오면서 일본군 500여 척의 대규모 함대가 노량을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그걸 먼저 공격한 건 명나라 함대였다. 부총병 등자룡도 판옥선을 이끌고 일본 함대를 향해 돌진했다. 시마즈는 물러서지 않고 세키부네들이 속도를 내서 등자룡의 판옥선을 에워싸도록 했다. 급박한 상황에서 등자룡의 판옥선은 함포 오발 사고로 주춤했다. 세키부네들은 당황한 등자룡의 판옥선에 바짝 달라붙었고, 일본군들은 갈고리와 사다리를 내걸고 올라탔다. 일본군의 등선 육박 전술에 등자룡은 버텨내지 못했고 끝내 판옥선은 점령당했다. 승선해 있던 예순일곱 살의 등자룡과 명나라 수군들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기세가 오른 세키부네들은 진린의 판옥선으로 달려들어 금세 포위했다. 이순신은 진린을 구하기 위해 직접 자신의 기함을 이끌고 나섰다. 진린의 판옥선에 들러붙은 세키부네들을 향해 함포 사격을 가했다. 진린을 공격하던 세키부네들이 한 척씩 바다로 가라앉았다. 위기를 벗어난 진린과 명나라 병사들은 판옥선에 올라탄 일본군을 모조리 죽였다. 이 과정에서 진린의 아들은 크게 다쳤다. 1000여 척에 육박하는 세 나라의 함대가 좁디좁은 노량에서 뒤엉킨 채 백병전을 벌이고 있었다.

*노량해전은 기존에 이순신이 싸워온 방식과 크게 달랐다. 명량해전 이전의 그는 철저한 아웃복싱을 선호했다. 지형을 이용한 장거리 함포 사격으로 대부분 우위를 가져왔다. 다만 명량해전에서는 겁을 먹고 물러서는 아군들에게 보란 듯이 한 척의 판옥선으로 수십 척의 일본 전함들에 맞서 오전 내내 버티는 모습을 보여줬다. 노량해전을 준비하는 자세는 판이했다. 승리가 목적이 아닌 우리 강토를 침략했다가 돌아가는 외적을 한 명이라도 더 죽이는 게 목적이었다. 애초 우리의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작전 따위가 성립되지 않았다. 조선군들 눈에 살기가 서려 있었다.

*일본군 역시 지금껏 이순신 함대를 보기만 하면 도망을 다니던 때와 달랐다. 함대 수가 많기도 했으나 자신들이 이곳에서 물러서면 고니시의 병사 1만5000여 명이 전멸당할 상황이었다. 자신들도 이겨야만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어 생사를 걸어야 했다.

*세 나라의 전투선들은 서로 간에 근접 사격을 하고 있었다. 판옥선에서는 일본 전함을 향해 신기전과 조란탄을 쏘아대었고 비격진천뢰를 집어던졌다. 일본군은 조총을 쏘면서 접근하며 함선끼리 서로 가까워지는 틈을 노려 칼을 꼬나쥐고 판옥선에 뛰어오르려 했다. 판옥선에 기어오르는 일본군을 향해 조선 사수들은 죽을힘을 다해 활을 쏘고 창과 낫으로 내려찍었다. 그러다 보니 판옥선에 올라타지도 못하고 바다에 빠지는 일본군들이 부지기수였다. 바다에 빠진 일본군은 살기 위해 헤엄쳤지만, 격군들의 노가 그들의 뒤통수를 후려 갈겼다.

*아비규환의 상황은 판옥선 밑바닥의 격군들에게도 처음이었다. 함선끼리 무차별적으로 충돌하면서 젓던 노가 부러지고 그 충격에 이리저리 부딪혀 온몸이 만신창이가 됐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최악의 공포와 격렬함에 몸부림치면서도 격군들은 자리를 지켰다.

*일본군은 판옥선보다 높이가 높았던 안택선에서 판옥선을 내려다보면서 볏짚에 불을 붙여 내던지며 화공을 전개했다. 이순신은 이런 상황을 계산해놓고 있었다. 당시 계절은 겨울이었고 북서풍이 불고 있었다. 조선 수군은 북서쪽에서 일본 수군을 남해도 쪽으로 밀어붙였다. 볏짚에 불을 붙여 화공으로 판옥선을 공격하려다 오히려 일본 함선들에 불이 붙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일본군 전함들은 한 척씩 바다 밑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일본군은 조총 사격으로 조선군을 전사시킬 수 있었지만, 조선의 판옥선을 바다에 수장시키는 데 애를 먹었다. 그들에게 이 전투의 목적은 승리도 아니었다. 고니시의 탈출 해로를 열어주면서 자신들 역시 후퇴하는 것이었다. 전황은 이를 악물고 싸워서 일본군을 한 명이라도 더 죽이려는 조선군에게 유리해지고 있었다. 서쪽에서 함께 협공해줄 것으로 기대했던 고니시의 함대도 보이지 않았다. 일본군이 할 수 있는 건 남해도를 돌아 도망치는 것뿐이었다. 새벽 2시에 시작된 전투가 새벽 5시가 넘도록 계속되고 있었다.

*노량 앞바다를 간신히 벗어난 일본 전함들은 남해도를 돌아 나간다고 생각하며 전속력으로 배를 몰았다. 그러나 일본군이 다다른 곳은 남해도 깊숙이 위치한 관음포였다. 지금 이곳은 간척된 상태지만 당시에는 만의 형태로 바닷길이 깊숙하게 패인 지형이었다. 어둠을 헤치며 정신없이 도망가는 일본군 눈에는 영락없이 바닷길로 보였다. 당황한 왜군들은 함선을 버리고 남해도 육지로 기어 올라갔다. 이들은 섬에 갇힌 채 훗날 조선과 명나라군에 의해 처참한 토벌을 당했다. 일부는 남해도에 내리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배를 돌려 조선 수군에게 돌격해오기도 했다. 이순신으로서는 하늘이 내린 기회였다. 전 함대가 힘차게 북을 치고 포를 쏘면서 일본군이 몰려들어 밀집해 있는 관음포 쪽으로 향했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일본 함대는 거칠게 저항했다. 일본군은 관음포에서 빠져나오며 자신들을 향해 선두에서 공격해 오는 조선 기함을 향해 조총 수십 발을 발사했다. 조준 사격이었다. 이순신의 기함을 향해 수십 발의 총탄이 날아들었다. 이순신 옆을 지키던 송희립이 먼저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이순신도 총에 맞았다. 아들 이회가 지휘대로 달려와 아버지를 끌어안았다. 조카 이완 역시 달려왔다. 이순신은 이들에게 마지막 말을 남겼다. "싸움이 급하니 부디 내 죽음을 말하지 말라."

*1598년 11월 19일 새벽 2시부터 시작된 노량에서의 전투는 날이 밝고도 계속됐다. 오후가 돼서야 바다가 고요해졌다. 도망갈 수 있는 일본군은 도망갔고, 그러지 못한 일본군은 모두 죽었다. 바다에는 조선과 명나라의 함선뿐이었다. 일본군 500여 척의 연합 함대는 바닷속으로 침몰했거나, 비어 있거나 부서진 채로 관음포에 정박 중이었다.

*노량에서 시마즈 요시히로를 집요하게 공격한 조선 수군은 적선 200여 척을 불태우고 100여 척을 나포했다. 일본군의 피해는 너무 컸다. 고니시를 구하기 위해 출전했던 일본의 연합 함대 500여 척 가운데 부산으로 살아 도망간 함선은 쉰 척에 불과했다. 조선군의 대승이었다. 그러나 노량해전은 노량대첩이라고 불리지 않는다. 이유는 이순신이 전사했기 때문이다. 나주 목사 남유, 낙안 군수 방덕룡, 가리포 첨사 이영남, 통제영 우후 이몽구, 흥양 현감 고득장, 초계 군수 이언량 등도 목숨을 잃었다. 송희립과 나대용 등은 크게 부상했다. 노량에서 고금도로 돌아오면서 조선군 누구도 승리의 함성을 지르지 못했다. 장수, 병졸 할 것 없이 모두 넋이 나갔다. 인간성의 상실과 삶과 죽음에 대한 무감각이 온몸을 지배한 상태였다. 안타까운 소식도 날아들었다.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전사.'

참고 자료 : 황현필 지음·발행처 역바연 '이순신의 바다(2021)', 류성룡 지음·이민수 번역·발행처 을유문화사 '징비록(2014)', 이순신 지음·노승석 번역·발행처 여해 '쉽게 보는 난중일기(2022)', 이순신역사연구회 지음·발행처 비봉출판사 '이순신과 임진왜란 4(2006)', 안영배 지음·박영철 사진·발행처 동아일보사 '잊혀진 전쟁 정유재란(2018)', 사토 데쓰타로·세키코세이·오가사와라 나가나리 지음·김해경 번역·발행처 가갸날 '이순신 홀로 조선을 구하다(2019)', 김시덕 지음·발행처 학고재 '그들이 본 임진왜란(2012)' 등.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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