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사니] 왜 나만 갖고 그래

나성원 2024. 1. 1. 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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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성원 사회부 기자

"딴 사람도 잘못했는데…"
'불법의 평등' 인정 안되지만
수사기관도 잣대 돌아봐야

얼마 전 서초동 거리에서 건널목 신호를 기다리다 경찰과 한 남성의 입씨름을 듣게 됐다. 남성은 헬멧을 쓰지 않고 전동킥보드를 타다 경찰에 붙잡혔는데 항의의 요지는 “왜 나만 잡느냐”는 거였다. “다 헬멧 안 쓰는데, 다른 사람도 잡으면 제가 인정할게요.” 남자는 제법 단호했다. 경찰도 한두 번 들은 말이 아니라는 듯 못 박았다. “다른 사람이 안 쓰는 거랑 선생님이랑은 관계가 없습니다.”

자신의 잘못으로 제재를 받게 돼도 “왜 나한테만 그러느냐”는 말이 자동으로 나오는 게 인간 본성인 것 같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이런 말 한 번 해보지 않은 사람이 드물 듯하다. 교실에서 꾸중 듣는 아이는 “쟤도 떠들었는데 왜 저만”이라고 따지고, 성인도 차를 몰다 단속에 걸리면 “저 앞에 사람도 위반했는데…”라고 한다.

전직 대통령들도 다를 바 없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1995년 내란 혐의로 재판을 받으면서 “왜 나만 갖고 그래”라며 억울함을 토로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 측은 헌법재판소 탄핵심판 사건에서 “과거 정권에서 비선조직의 국정개입, 국가권력 사유화, 정경유착이 더 심했다”고 주장했다.

너도나도 이런 주장을 해서인지, 이에 대한 법적 개념도 있고 헌재 결정문에도 여러 차례 등장한다. 헌법 교과서에서는 ‘불법의 평등’이라고 한다. 평등 원칙은 기본권 중의 기본권이지만 ‘불법 영역에서의 평등’은 인정되지 않는다. 즉 불법 유턴을 하고 ‘왜 다른 사람은 안 잡느냐?’ ‘내 행동에는 문제가 없다’고 주장할 수 없다. 박 전 대통령 탄핵 사건에서 헌재는 “헌법은 성별, 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해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않는다고 선언하고 있다”면서도 “헌법상 평등은 불법의 평등까지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과거 통합진보당이 2012년 비례대표 후보 부정경선 의혹 수사 당시 ‘검찰의 당원소환 통지를 취소해 달라’며 낸 헌법심판 사건에서도 비슷한 쟁점이 있었다. 통합진보당은 검찰이 다른 정당 선거부정 의혹은 수사하지 않고 통합진보당 당내 경선만을 수사하는 것은 평등권 침해라고 주장했다. 헌재는 청구를 각하했는데 안창호 재판관 등 4명은 평등권 침해 여부 판단도 내렸다. 당시 재판관들은 “자신의 불법행위를 용인하도록 하는 평등권까지 인정될 수는 없다”며 “다른 정당의 경우 구체적 단서가 드러나지 않아 수사를 개시할 수 없었던 것이라면 다른 것을 다르게 취급한 것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요즘에도 이런 주장은 결을 달리하며 계속 반복된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은 2022년 딸의 의학전문대학원 입학이 취소되자 “같은 학번 입학생을 동일 잣대로 전수 조사하라” “동일 잣대를 윤석열정부 고위공직자 자녀에게도 적용하라”고 했다. 최근 구속된 송영길 전 민주당 대표는 검찰 조사에서 김건희 여사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 검찰 특수활동비, 원희룡 전 국토교통부 장관 관련 사건 등을 언급하며 “더 중대 사건인데 왜 수사하지 않느냐”고 항의했다.

이런 항변은 법적으로는 큰 의미가 없지만 계속 반복되는 것을 보면 정치적 효과는 적지 않은 모양이다. 범죄 혐의로 수사·재판받는 공인들이 손가락질하며 ‘물귀신 작전’으로 나오는 모습이 그리 떳떳해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런 주장의 기저에 깔린 표적 수사, 과잉 수사, 봐주기 수사에 대한 문제의식이 사회 일각에서 꾸준히 공감을 얻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수사 강도가 특정 진영이나 특정인에 따라 달라진다는 의심이 사그라지지 않는 데에는 수사기관의 책임도 결코 작다고 보기 어렵다. 법 집행이 모든 국민을 만족시킬 수는 없겠지만 수사기관 스스로 공정성과 균형감을 갖추기 위한 노력이 충분했는지, 사안에 따라 관대하거나 지나치게 가혹했던 것은 아닌지 겸허하게 돌아볼 필요도 있다. 적어도 새해에는 반복적인 ‘불법의 평등’ 주장이 무색해지길 바라본다.

나성원 사회부 기자 na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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