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희의 시시각각] 청룡이 나르샤

양성희 2024. 1. 1. 0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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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갑진년, 용의 해가 밝았다. 청룡의 푸른 기상으로 훨훨 날아오르는 한 해를 소망해 본다.
용은 동서양을 불문하고 여러 전설과 신화에 등장하는 상상의 동물이다. 악어나 도마뱀, 공룡이 그 원조로 추측되는데, 중국 문헌 『광아(廣雅)』에 의하면 ‘낙타 머리, 사슴 뿔, 토끼 눈, 잉어 비늘, 매 발톱, 호랑이 주먹’ 등 아홉 가지 동물을 닮았다. 동양의 용은 재앙을 물리치고 갖은 조화를 부리는 신통한 존재다. 왕이나 절대권력을 용에 빗댔다. 왕이 앉는 평상은 ‘용상(龍床)’, 왕의 얼굴은 ‘용안(龍顔)’이다. 신라 문무왕은 죽어서 바닷속 대룡이 돼 나라를 지키겠다고 했고, 백제 무왕과 고려 태조 왕건은 스스로 용의 자손이라고 했다. 민간에선 용왕에게 만선과 무사 귀환을 기원하고, 용 그림을 가까이 두고 입신양명과 부귀영화를 바랐다. ‘용’자가 들어간 지명이 1000개가 넘는다. 우리 민속문화 속에 뿌리내린 용의 흔적들이다.

「 산적한 정치 경제 사회 난제 풀고
푸른 기운으로 비상하는 새해 되길
이무기 좌절까지 감싸는 넉넉함도

갑진년을 맞이해 부산 광안리 해수욕장에 설치된 푸른 용 조형물. 입에 여의주를 물었다. [사진 연합]

힘찬 용띠 해 아침, 경제 전문가들은 2024 한국 경제를 ‘용문점액(龍門點額)’이한 다소 유보적인 키워드로 예측했다(대한상공회의소 조사). ‘용문’ 아래 물고기가 뛰어올라 문을 넘으면 용이 되지만, 넘지 못하면 문턱에 이마를 찧고 떠내려간다는 뜻이다. 올해가 우리 경제의 미래를 가를 변곡점이라는 얘긴데, 한 발만 삐끗하면 용 아닌 이무기 신세일 수 있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용문’은 중국 황허의 급류 지대로, 어려운 관문을 통과해 높은 자리에 오른다는 ‘등용문(登龍門)’이라는 말도 여기서 나왔다.
올해는 지역의 ‘용’들을 뽑는 총선의 해이기도 하다. 아직도 마음 둘 곳을 못 찾은 중간지대 국민이 상당수고, ‘A가 좋아서’가 아니라 ‘B가 싫어서 A를 찍는’ 비호감 선거가 재현될 우려도 여전하다. ‘386 퇴진, 789 세대교체’를 내세운 국민의힘 한동훈 비대위에 이어 민주당이 어떤 변신 카드로 ‘대표 사당(私黨)’이라는 오명을 벗을지, 진영논리의 덫에 빠진 정치가 실제 우리의 삶을 바꾸는 희망이 될 수 있을지, 3지대는 진정한 대안일 수 있는지, 남은 넉 달에 달려 있을 것이다.
정치의 계절을 맞으면서 ‘항룡유회(亢龍有悔)’란 말도 떠오른다. 하늘 끝까지 올라가 내려올 줄 모르는 용은 반드시 후회할 때가 있으니, 높은 지위에 올라 겸손과 소통을 모르면 실패를 면치 못한다는 의미다. 용산(龍山)의 용이든, 지역의 용이든 국민 앞에 나서서 권력을 부리는 자들이 깊이 새겨야 할 말이다. ‘항룡’은 물속의 ‘잠룡(潛龍)’에서, 세상에 나오는 ‘현룡(見龍)’, 비상하는 ‘비룡(飛龍)’을 거쳐 더는 오를 곳 없이 올라간 단계다. 만족을 모르고 욕심을 부리면 일을 망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 우리 같은 범부들도 이 아침 함께 새기면 좋겠다.
사실 모두가 용이 물을 만나 힘차게 날아오르는 ‘교룡득수(蛟龍得水)’를 꿈꾸지만, 세상에는 용보다 용이 못 된 이무기 같은 존재가 더 많다. 이무기 전설은 동양에만 있고, 용이 못된 억하심정으로 심술을 부리는 부정적 이미지가 강하지만, 종종 착한 이무기들도 있다. 전설에 따르면 물속에서 1000년을 기다린 이무기가 승천하려 할 때 마주친 사람이 “용이다”고 하면 용이 되고, “뱀이다”고 하면 천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 용이라 불러줘야 용이 될 수 있다는 호명과 구원의 서사다. 자기 잘못이 아니라 남의 방해나 도움 부족 등 주변의 영향으로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 전설도 많다.
흥미롭게도 ‘민족의 젖줄’ 한강의 발원지인 태백산 ‘검룡소(儉龍沼)’에도 이무기 전설이 있다. ‘검룡’이란 검소한 용, 즉 부족해서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를 가리킨다. 검룡소 아래 암반의 긁힌 자국은 하늘로 오르려 발버둥치던 이무기의 발톱 자국이라고 전해진다. 이무기의 한과 아픔을 아는 민족이라는 얘기겠다. 새해에는 ‘실패의 아이콘’ 이무기들이 다시 힘을 얻고, 설혹 만년 이무기라도 서로 감싸 안는 넉넉한 세상을 꿈꿔 본다.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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