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이 마지막 전투 '노량해전'을 준비한 곳
[이돈삼 기자]
▲ 고하도 용머리에서 본 목포대교. 목포대교는 북항과 신외항을 연결하며 고하도를 뭍과 이어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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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 흐르는/ 유달산 일등바위에 올라/ 거북이 등처럼 떠가는 섬들을 보라// 고하도 용머리를 휘돌아/ 삼색 깃발 나부끼며 귀항하는/ 고깃배가 끌고 오는 갈매기 떼를 보리….'
김충경 시 '목포에 가면'의 앞부분이다.
유달산에서 내려다보이는 섬들 가운데 맨 앞자리에 선 섬이 고하도다. 고하도는 '용섬'으로 불린다. 섬의 생김새가 용을 닮았다는 이유다. 실제 섬의 지형이 용처럼 길게 생겼다. 목포로 향하는 큰 파도를 온몸으로 막아준다.
▲ 용오름길에서 내려다 본 고하도 해안데크. 바닷가를 따라 나무데크가 길게 깔려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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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객들로부터 포토존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 이순신 장군 조형물. 고하도 해안데크에서 만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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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하도는 충무공 이순신도 사랑했던 섬이다. 해남과 진도 사이 울돌목에서 펼쳐진 명량대첩에서 대승을 거둔 이순신이 수군을 이끌고 머물렀다. 1597년 10월 29일부터 106일 동안이다.
'목포로 향하는데, 비와 우박이 섞여 내리고 동풍이 약간 불었다. 보화도(寶花島)로 옮겨 정박하니, 서북풍을 막을 수 있고 배를 감추기에도 아주 적합했다. 육지에 올라서 섬을 돌아보니, 지형이 매우 좋다.' - 1597년 10월 29일(음력), 난중일기
이순신에게 고하도는 최적의 군사기지였다. 고하도는 제주도와 울돌목으로 가는 길목이고, 서남해와 내륙을 연결하는 영산강의 관문이었다. 일본군이 차지하려고 혈안이 된 호남의 곡창지대를 지킬 파수꾼으로 맞춤이었다.
▲ 목포해상케이블카에서 내려다 본 고하도. 고하도는 '용섬'으로 불린다. 섬의 생김새가 용처럼 길게 늘어서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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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은 고하도에 수군진을 설치했다. 군사들을 모아 전열을 가다듬고 훈련을 시켰다. 전선을 만들고, 군량미도 확보하며 일본군과의 전투를 준비했다. 이순신은 1598년 2월 16일, 수군진을 완도 고금도로 옮겼다. 고금도에 통제영을 설치하고, 일본군과의 마지막 일전을 벌였다.
마침 영화 <노량-죽음의 바다>가 상영되고 있다. 노량해전은 임진왜란 7년 전쟁의 종지부를 찍는 마지막 전투였다. 이순신이 수군을 재건하며 마지막 전투를 준비한 곳이 고하도인 셈이다.
▲ 고하도 솔숲 풍경. 아름드리 소나무가 모충각을 중심으로 자라고 있다. 함박눈이 내린 지난 12월 22일 풍경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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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순신 장군을 모신 사당 모충각. 여기서 해마다 4월 28일에 이순신 탄신제를 지낸다. 지난 12월 22일 모습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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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하도에 이순신을 모신 사당 모충각(慕忠閣)이 있다. 해마다 4월 28일에 이충무공 탄신제를 지낸다. 높이 227㎝, 폭 112㎝의 기념비도 세워져 있다. 일본군과의 마지막 싸움을 준비하던 당시의 상황이 비문으로 소상히 적혀 있다.
기념비는 수난을 겪었다. 일제강점 때 들어온 일본군이 넘어뜨렸다. 당시 일본군이 비석에 쏜 총탄 자국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비문이 훼손된 이유다. 지금의 기념비는 광복 이후 주민들이 다시 세운 것이다.
▲ 고하도에 세워져 있는 '조선육지면 발상지'비. 고하도는 일제강점기에 육지면을 처음 재배한 곳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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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섬 고하도에 '조선육지면 발상지 비'도 있다. 한동안 마을 야산에 눕혀진 채 방치된 것을 다시 세웠다. 비는 높이 187㎝, 너비 62㎝에 이른다. 이순신 유허비와 모충각이 자리한 언저리에 있다.
▲ 고하도 해안에 남아있는 진지 동굴. 일제가 조선인을 강제 동원해 판 굴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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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지 동굴에서 본 유달산과 목포대교 풍경. 진지동굴에서 유달산과 목포 해안가가 한눈에 들어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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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흔적은 해안 동굴로도 남아 있다.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일제는 조선인을 강제 동원해 동굴을 팠다. 바닷가의 암반을 정과 폭약으로 판 동굴이다. 동굴에는 군인이 숨거나 '자살특공정'을 숨겨두는 장소로 쓰였다.
고하도엔 진지(陣地) 동굴 20여 곳이 있었다. 목포대교를 만들 때 절반이 사라지고, 지금 10여 개가 남아 있다. 일제의 감시와 채찍을 받으며 동굴 파는 작업에 동원된 선조들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이순신이 머물다 간 300여 년 뒤, 그 자리에서 일제가 또 다른 전쟁을 준비한 것이다.
▲ 고하도의 능선을 따라 걷는 용오름길. 함박눈이 내린 지난 12월 22일 풍경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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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하도 전망대.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끈 13척의 판옥선을 형상화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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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하도는 임진왜란 때 호국의 섬이었다. 일제강점기엔 수탈의 섬이었다. 역사문화가 살아있는 고하도를 차분히 돌아볼 수 있는 트레킹 길이 단장돼 있다. 용의 모습을 한 섬의 능선을 따라가는 길이다. 모충각에서 용머리까지 3㎞에 이른다. 이름도 '용오름길'로 붙여져 있다.
숲길이 단아하고 호젓하다. 길도 평탄한 편이다. 칼바위, 말바우, 용머리 풍광도 빼어나다. 걷는 길에서 옛 이야기도 만난다. 발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유달산과 다도해 풍광도 매혹적이다. 바다에서 물살을 가르는 크고 작은 배, 하늘에서 떠다니는 해상케이블카도 멋스럽다. 새소리와 바람소리, 파도소리는 덤이다.
▲ 목포해상케이블카에서 내려다 본 고하도. 고하도는 '용섬'으로 불린다. 섬의 생김새가 용을 닮았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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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도해를 뻘겋게 물들이는 해넘이의 장관이 펼쳐진 다음, 해안데크에 경관조명도 들어온다. 목포대교의 조명도 불을 밝힌다. 휘황찬란한 목포대교와 유달산 경관이 한데 버무려져 황홀경을 선사한다.
고하도에는 주민 100여 명이 살고 있다. 원마을인 고하리를 중심으로 섭두르지, 뒷도랑, 큰목에 모여 산다. 주민들은 예부터 갯벌에서 낙지와 바지락, 굴을 잡아 생계를 꾸렸다. 농지와 염전을 만들어 쌀과 소금도 생산했다. 영산강 하굿둑이 들어서기 전까지 그랬다.
▲ 눈 내린 고하도 포구와 마을 전경. 함박눈이 내린 지난 12월 22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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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하도가 활기를 되찾은 건 해상케이블카가 개통되면서다. 3230m를 운항하는 해상케이블카에선 목포 시가지와 유달산, 앞바다와 다도해를 다 조망할 수 있다. 케이블카는 고하도와 목포북항을 20분 만에 데려다준다.
고하도엔 자동차를 타고 들어갈 수도 있다. 2012년에 개통된 목포대교 덕분이다. 목포대교는 서해안고속국도에서 이어지는 북항과 신외항을 연결하고 있다. 신외항으로 가는 길목에 고하도가 자리하고 있다.
▲ 용머리 조형물. 고하도의 끝자락, 목포대교 아래에 세워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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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전남일보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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