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아묻따' 병원…'진료비 0원' 외국인 환자 6만명 찾은 사연

김민주 2023. 12. 31. 15:55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지난 24일 부산 온종합병원에 차려진 그린닥터스 국제진료소에서 정근 그린닥터스 이사장(사진 왼쪽)이 환자를 진료하고 있다. 사진 그린닥터스

“눈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꼭 낫게 해주세요.”

지난 24일 부산시 부산진구 온종합병원 6층 진료센터를 찾은 중국인 여성 A(75)는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의료진에 이같이 통사정했다. 그는 어느 날부터 눈이 침침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넉넉지 않은 경제 사정에 병원 가기를 망설였다고 한다. 시야는 점점 나빠졌다. 다행히 딸이 A와 같은 처지의 외국인을 무료로 진료해주는 병원을 알게 됐고, A는 병원 ‘문턱’을 넘을 수 있었다.

안과 전문의인 정근 그린닥터스 이사장이 A의 상태를 살펴봤다. 이미 백내장이 심해져 2m 안 사물도 제대로 식별하지 못할 정도로 나빠져 있었다. 수술이 시급했다. 정 원장은 자신의 병원에서 A가 백내장 수술을 받을 수 있도록 필요한 조처에 나섰다. 물론 비용은 받지 않는다. A 모녀는 정 이사장에게 연신 감사함을 표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지난 24일 부산 온종합병원에 차려진 그린닥터스 국제진료소에서 전창원 온종합병원 응급과장이 외국인 환자를 진료하고 있다. 사진 그린닥터스

매 주말 ‘아묻따’ 무료 진료센터 풍경


매주 일요일(5번째 일요일 미운영) 온종합병원엔 A처럼 국내에서 일하는 외국인 근로자나 그 가족 등이 수십명씩 몰린다. 재단법인 그린닥터스가 오후 2시부터 2시간 동안 운영하는 ‘외국인 국제진료소’를 찾기 위해서다. 온종합병원은 흔쾌히 장소를 제공했다.

국제진료소는 2003년 문을 열었다. 일자리를 찾기 위해 중국이나 베트남 등지에서 3년 기한의 취업비자를 받아 우리나라에 오는 외국인이 점차 늘던 때다. 부산의 경우 이들 외국인은 사상ㆍ강서구 등지의 제품 생산 공장에 주로 취업했다. 하지만 열악한 근무 환경 속에 일하다 다치고, 병치레 탓에 오히려 빚이 늘자 돈을 벌려 한국을 떠나지 못한 채 불법체류자 길을 선택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초창기에는 주로 이들이 그린닥터스 의료진을 만났다. 이에 국제진료소 운영의 중요 원칙은 진료에 꼭 필요한 정보 이외 신상명세에 대해선 ‘아무 조건도 묻거나 따지지 않는 것’이 됐다.

지난 24일 부산 온종합병원에 차려진 그린닥터스 국제진료소에서 윤성훈 온종합병원 정형외과 진료원장이 환자를 진료하고 있다. 사진 그린닥터스

코로나19 땐 문 닫아...그간 6만여명 치료


국제진료소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기승을 부린 2020년 6월부터 지난해 5월까지를 제외하고 현장을 지켰다. 현재는 일반 외국인 근로자는 물론 탈북민, 다문화가정 구성원 등도 찾을 만큼 커졌다. 그간 6만여명이 이곳에서 치료를 받았다.

간단한 검사부터 대학병원 연계까지


진료과목은 안과 외 정형외과ㆍ내과ㆍ소아청소년과ㆍ치과 등이 있다. 주로 근골격계 환자나 눈ㆍ치아 관련 질환이나 원인 모를 알레르기ㆍ두통 등을 앓는 환자가 내원한다고 한다. 그린닥터스 소속 전문의들이 일요일마다 2~3명씩 번갈아가며 이들을 진료한다. 약사 1명과 간호사 1명, 자원봉사자 20명도 함께 이들 환자를 돌본다. 자원봉사자는 대부분 지역대학 간호학과 학생이다.

환자 국적은 중국과 베트남, 우즈베키스탄, 네팔, 몽골, 파키스탄, 캄보디아 등 다양하다. 이에 한국국제교류재단에서는 매주 러시아ㆍ베트남ㆍ중국어 통역 인력 3명을 진료소로 보낸다.

국제진료소에서는 피ㆍ소변검사부터 엑스레이 촬영, 약 처방까지 이뤄진다. 이외 장기ㆍ집중치료가 필요한 환자는 대학병원 의료 지원 등과 연계하거나 외래진료로 돌린다. 그린닥터스 관계자는 “진료비는 부산시 보조금 2100만원과 재단 자체 재원을 더해 연간 3300만원”이라며 “보험 혜택이 없는 외국인의 외래진료 비용도 이 재원에서 충당한다”고 밝혔다.

지난해 5월 그린닥터스 의료지원단이 폴란드의 우크라이나 전쟁 난민캠프에서 난민을 진료하고 있다. 사진 그린닥터스

“국내ㆍ외 봉사 이어갈 것”


1997년 백양의료봉사단으로 시작한 그린닥터스는 2004년 재단법인으로 등록하고 국내 취약계층과 재난으로 인한 해외 난민 등을 대상으로 의료 봉사를 이어왔다. 지난 2월 규모 7.0 강진이 덮친 튀르키예에, 지난해 5월엔 폴란드의 우크라이나 전쟁 난민 캠프에 그린닥터스 의료지원단이 파견됐다. 스리랑카 지진해일(2004), 파키스탄 대지진(2005), 인도네시아 대지진(2006), 미얀마 사이클론ㆍ중국 쓰촨성 대지진(2008), 네팔 대지진(2015) 때도 같은 활동을 했다.

정근 그린닥터스 이사장은 “인종과 국경, 종교를 가리지 않고 의술을 행하는 게 재단의 설립 취지”라며 “내년에도 국제진료소 운영을 포함해 해외 지원 활동을 계속 이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김민주 기자 kim.minju6@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