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세계 교회 역사] ‘시스터 맥퍼슨’이 말하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것

신상목 2023. 12. 31.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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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올해도 매주 세계 교회 역사 속 인물과 사건 등을 통해 우리 신앙이 견지해야 할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1월 첫 주에도 교회사 속엔 저명한 인물들의 출생과 별세가 등장하고 획기적 전환점을 마련했던 개인들의 일화가 있습니다. 특히 미국 오순절 교단의 대표적 여성 지도자인 에이미 셈플 맥퍼슨 목사의 열정이 돋보입니다. 맥퍼슨 목사는 1920년대부터 40년대까지 미국 사회 속에서 영적, 사회적으로 복음주의의 가치를 높였습니다. 그의 삶의 궤적엔 논쟁적인 부분도 없진 않았지만 하나님을 향한 열정을 어느 정도까지 고취할 수 있는지를 제대로 보여준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1·2차 세계대전, 대공황을 지나는 시절이었고 기독교 신앙을 이성적으로 설명하고 현실의 문제로 대중에게 다가가려는 것이 교회의 숙제였습니다. 소위 자유주의신학은 그런 흐름을 잘 반영했지만 복음에 입각한 교회와 기독교인의 삶을 추구하려는 사람들에겐 부족했습니다. 맥퍼슨과 그레샴 메이첸은 그런 점에서 이성에 치우친 기독교에서 복음을 구하려고 몸부림쳤던 인물들이었습니다.

대 바실리우스, 삼위일체 확립에 기여
379년 1월 1일 초기 교회의 지도자인 대 바실리우스(Basil the Great)가 별세했다. 그는 ‘위대한 카파도키아인들’이라 불리는 세 명의 교회 지도자 중 한 명이다. 바실리우스 이외에 그의 동생이자 신비적 명상으로 유명한 닛사의 그레고리우스, 이들의 친구이자 시인, 웅변가, 찬송가를 지은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등이다. 바실리우스는 병원 호스텔 학교가 복합된 안네시 수도원의 설립자이자 재정 후원자였다. 초기 교회역사가이자 신학자인 유세비우스의 뒤를 이어 카아사레아의 주교가 되었다. 그는 삼위일체 교리를 확립하는 신학 활동과 동방 교회의 안디옥 분열을 치유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수도원 규칙은 오늘날 동방정교회 수도자들이 따르는 규칙의 기초로 남아 있다.

바실리우스는 아버지의 열심으로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 당시 로마제국 소아시아 카파도키아 지방의 카이사레아와 안디옥, 콘스탄티노플에서 공부했다. 그리스 아테네 유학도 다녀왔다. 카이사레아로 돌아온 그는 장래가 보장돼 있었다. 그때 누나인 마크리나가 권면했다. 출세와 권력과 지식을 추구하는 동생을 지적했다. 그즈음 바실리우스의 형제 노크라티우스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바실리우스는 자신의 생애를 점검했다. 그는 교수직 등 모든 명예를 내려놓고 누나인 마크리나에게 신앙생활의 비밀을 묻는다.

마크리나는 집안의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가까운 안네시(Annesi)로 들어가 명상과 봉사의 생활을 하자고 제안했다. 진정한 행복은 세속적 영예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봉사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후 마크리나와 어머니, 몇몇 여인들은 안네시로 은둔했고 바실리우스는 누나의 충고를 좇아 이집트로 가서 수도 생활에 대해 더 배웠다. 그 후 바실리우스는 수도원 운동의 위대한 스승이 됐다.

바실리우스는 안네시 인근에 정착, 친구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와 함께 남성을 위한 수도 공동체를 세웠다. 이후 카이사레아의 감독으로 선출됐으나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는 아리우스파가 바실리우스와 대결했다. 아리우스파는 그를 위협했으나 바실리우스는 이렇게 답했다.

“당신이 압류할 수 있는 나의 전 재산은 몸에 걸친 이 누더기와 서적 몇 권에 지나지 않는다. 또 나를 유배시킬 수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가는 곳마다 하나님께서 영접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고문에 관해 말하자면 내 육체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죽음이야말로 나에게 큰 기쁨이다. 하나님과 그만큼 더 빨리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수도 생활의 조직과 확장, 니케아 정통 신학의 확장에 힘썼다. 그는 방대한 양의 서신과 신학 논문 등을 통해 삼위일체 교리가 확립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스위스 종교개혁자 츠빙글리, “성경은 기독교 신앙의 원천”
1484년 1월 1일 스위스 종교개혁자 울리히 츠빙글리가 작은 산촌에서 태어났다. 츠빙글리는 삼촌으로부터 처음 글을 배운 뒤 당시 인문주의가 활발했던 바젤과 베른에서 공부했다. 그는 바젤대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받은 후 1506년 글라루스교회 사제가 됐다.

농부의 아들이었던 츠빙글리는 서민적인 모습으로 교인들과 허물없이 지냈다. 동시에 그의 학구열은 높았다. 고전을 탐독하고 교부들의 사상을 공부했다. 또 헬라어를 배워 1516년 출간된 에라스무스의 헬라어 신약성경을 읽었는데 거기서 성경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했다. 당시 스위스 지방 사제들은 무식해서 전체 신약성경을 한 번도 읽지 않은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츠빙글리는 진정한 성경 이해로 나아가는 길을 찾았다. 츠빙글리는 성경에 대한 바른 인식을 하게 되었고, 중세교회의 단절된 성경 이해를 개혁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다. 글라루스에서 10년을 지내고 한 수도원에 재직했는데 츠빙글리는 이곳에서 순례 등 각종 언행이 구원과 관계가 있다는 당시 가톨릭의 믿음에 대항한 설교를 했고 이는 신약성경에서 관련 말씀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선포했다.

1519년 취리히의 신부가 됐을 때는 루터와 비슷한 결론에 도달해 있었다. 이는 그가 인문주의자들의 방법론에 의한 부지런한 성경연구, 당대에 마치 기독교인 양 성행했던 미신에 대한 분노, 교회 성직자들의 부정과 부패, 용병제도에 대한 비판 정신의 결과였다.

그는 뛰어난 설교와 경건, 학식을 통해 곧 취리히 신자들의 존경을 받게 됐다. 면죄부 판매인이 취리히에 도착했을 때 그는 시의회 정부를 움직여 그들이 짐을 풀기도 전에 축출시키기도 했다.

츠빙글리는 1516년과 1519년 새롭게 해석한 자신의 성경주석을 제시하며 종교개혁으로의 전환을 분명히 했다. 주도홍 전 백석대 교수는 “루터가 종교개혁의 행위를 통해 시대의 흐름을 전환했다면 츠빙글리는 인식을 통해 전환을 시도했다”고 말했다.

츠빙글리는 자기가 루터의 가르침에 관해 알기도 전에 이미 성경 연구로 비슷한 결론에 도달했다고 선언했다. 취리히 의회도 그를 지원했다. 츠빙글리의 최대 목표는 성경적 신앙과 생활을 복원하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는 루터와 달랐다. 루터는 성경에 상치되지 않는 한 모든 전통적 모습을 계속 고수하고자 했다. 반면 츠빙글리는 성경의 구체적인 보장 없는 일체의 관습을 거부했다. 예를 들어 교회 내 오르간 사용도 금했다.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가 음악을 혐오하지는 않았다. 그는 예술을 매우 즐겼고 자기 자신은 뛰어난 바이올린 연주자였다.

그는 “우리는 루터적이 아니라 복음적이어야 한다”는 말로 그의 독자성을 강조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의 정수를 바로 인식한 후에는 중세교회의 교황권과 연옥설, 성인들의 조작된 중보기도를 완전히 거부했다. 그는 2종 성찬, 빵과 포도주를 받는 것을 평신도에게 모두 허락했고 수많은 사제와 수도사, 수녀들이 결혼했다. 계급 격차 없는 일반 공공교육이 시행됐고, 그의 사상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스위스의 다른 자치주로 이를 확산시켰다.

츠빙글리는 1522년 출판한 ‘하나님 말씀의 명료성과 확신성’에서 설교의 기본에 대해 언급했다. 츠빙글리는 기독교는 그 뿌리와 근원을 더 면밀히 숙고해야 할 것을 강조했다. 그는 뿌리와 근원이야말로 성경과 고대 교부들의 글이라고 확신했다. 중세교회가 말하던 전통적 성경해석과 철학적 해석의 도움 없이도 하나님 말씀은 그 자체로 읽는 사람들을 명료하고 능력 있게, 확신으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성경 읽기이다.

교회사가인 후스토 L 곤잘레스는 루터와 츠빙글리의 차이점을 이렇게 설명했다. “루터가 온갖 고민과 번민, 공포를 거쳐 마침내 오직 믿음에 의한 칭의라는 성경적 메시지에서 위로를 발견한 격렬한 영혼이었다면 츠빙글리는 성경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원천이기 때문에 이를 공부하고 연구했던 인문주의자였다. 당시 인문주의자들은 이러한 원천에의 귀환(아드 폰테스)을 주장하고 있었다. 이는 츠빙글리가 루터보다 이성의 힘에 관해 더욱 긍정적 입장을 취했음을 의미한다.”

츠빙글리는 1531년 10월 11일 종교전쟁인 카펠 전투에 종군 목사로 나갔다가 로마 가톨릭 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당시 나이는 47세였다.

츠빙글리를 중심으로 한 스위스 종교개혁은 독일 종교개혁과는 다른 모습을 띤다. 스위스 종교개혁은 독일보다 2년 후인 1519년을 기점으로 1712년 일어난 제2차 빌메르겐(Vilmergen) 전쟁을 통한 신앙고백으로 종결됐다. 스위스 종교개혁은 국가 연합인 연방제의 특성에 따라 다양한 축을 중심으로 여러 종교개혁자가 이끌었다. 독일의 종교개혁으로 루터교회가 형성됐다면, 스위스는 개혁교회를 태동시켰다.

스위스 종교개혁은 네덜란드와 영국, 신대륙인 미국으로 퍼지며 국제적 영향력을 발휘했다. 무엇보다 츠빙글리와 칼뱅에 의해 주도된 스위스 종교개혁은 성경에 근거를 두지 않은 교회의 모든 전통을 거부했다. 그 결과 개혁교회는 꾸밈이 없는 예배당을 갖게 됐는데, 최고로 꾸민다는 게 교회당 벽에 성경 구절을 붙이는 장식 정도였다. 교회 조직은 총회와 노회, 공동의회로 구성됐다.

만유인력 법칙 발견한 뉴턴, 세례받다
1643년 1월 1일 영국의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인 아이작 뉴턴 경이 영국 콜스터워스에 있는 세인트존스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평생 종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뉴턴은 예수를 세상의 구세주로 인정했지만 성육신한 신으로는 인정하지 않았다.

뉴턴은 성공회 신부인 외삼촌의 도움으로 1661년 케임브리지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물리학과 수학을 공부했다. 대학 재학 시절에는 데카르트의 사상과 허미티시즘 전통에서 동시에 영향을 받았다. 재학 도중 영국 전역에 흑사병이 유행하자 학교가 휴교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1665년부터 깊은 사색을 통해 중요한 과학적 발견들을 이루어냈다. 중력에 대한 영감을 받았고 미적분의 계산법을 발견했다. 그가 과수원의 사과나무 아래에서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중력을 발견했다는 일화는 진위가 불분명하나 뉴턴은 말년에 이 일화가 사실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복학 이후 반사 망원경을 만들고 왕립학회 회원으로 선출돼 활동했다. 뉴턴은 1669년 스승 아이작 배로의 교수직을 승계했다. 그의 강의는 지루한 것으로 유명해, 빈 강의실에서 홀로 강의했다는 일화도 있다. 1666년 유분법을 발견했는데 이는 오늘날 미적분에 해당하는 것으로, 미적분 계산법을 누가 먼저 발견하였는지에 대해 독일의 라이프니츠와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빛의 파동설을 주장한 네덜란드의 호이겐스에 맞서서 빛의 입자론을 주장했으며, 빛과 색에 대한 연구로 광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1687년 뉴턴은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를 출간했다. ‘프린키피아’로 불리는 이 책에는 뉴턴의 세 가지 법칙인 관성의 법칙, 운동의 법칙, 작용-반작용의 법칙, 만유인력과 천문학에 대해서도 다루어져 있다. 뉴턴의 ‘프린키피아’는 근대 이론물리학의 초석을 놓은 혁명적 저서로 평가받는다. 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1727년, 85세로 사망했다.

정통신학 수호했던 메이첸 별세
1937년 1월 1일 미국의 장로교 신학자인 존 그레샴 메이첸이 별세했다. 1906년부터 1929년까지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의 신약학 교수로 재직한 그는 당시 프린스턴신학교가 고등비평을 비롯한 당대 신학 흐름을 수용하며 기존 전통에서 이탈하자 교수직을 사임하고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설립했다. 1936년에는 정통장로교회(OPC)를 설립했다.

메이첸은 존스홉킨스대학과 프린스턴신학교, 독일 마르부르크대학과 괴팅겐 대학에서 공부했다. 독일 유학 시절 유명한 자유주의 신학자인 빌헬름 헤르만에게 배우면서 신학적 정체성을 고민했으나 결국 정통신학으로 돌아오게 된다.

프린스턴신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기독교의 기원’과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에 대한 중요한 논문과 단행본을 발간해 학문적 탁월함을 인정받았다. 그가 저술한 ‘신약성서 헬라어 문법’은 한 세기 가깝게 헬라어 공부의 표준서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의 대표작은 크리스채너티투데이에서 ‘20세기 교회를 움직인 100권의 책’으로 선정한 ‘기독교와 자유주의’로 꼽힌다. 1923년 출간된 이 책은 정통 기독교 신앙을 대변한 고전적 변론서로서 그리스도인의 사고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책은 1920년대 초 미국장로교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신학 논쟁’ 속에서 탄생했다. 메이첸은 자유주의 신학을 비판하며 성경적인 신앙이란 사실과 교리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을 역설했다. 신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에 관한 두 입장을 명석하게 대조해 복음적 신앙을 변증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이를 통해 성경 66권이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는 ‘구속적 종교’로서의 기독교 본질을 세밀하게 정리했다.

미국 오순절 교회 역사의 선구자, 에이미 맥퍼슨
1909년 1월 2일 에이미 셈플과 그녀의 남편 로버트가 미국 시카고 전도자이자 초기 오순절주의 설교자였던 윌리엄 H. 더럼에게 안수를 받았다. 로버트가 사망한 후 해럴드 맥퍼슨과 결혼한 에이미는 국제 포스퀘어복음교회(the Foursquare Churh)의 창립자이자 20세기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설교자 중 한 명이 됐다.

에이미 셈플 맥퍼슨(Aimee Semple McPherson, 1890~1944)은 ‘시스터 에이미’ 혹은 ‘시스터 맥퍼슨’으로 알려진 캐나다계 미국 오순절 복음전도자다. 구세군 집안에서 태어난 그녀는 1907년 오순절주의자가 됐고 1909년 전도자였던 남편 로버트 셈플과 함께 더럼 목사에게 안수를 받았다. 이후 더럼의 설교 여행에 참여하다가 1910년 홍콩 선교사로 떠난다. 하지만 두 달 만에 로버트가 말라리아로 사망했고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온 에이미는 해럴드 맥퍼슨과 재혼했다.

에이미 맥퍼슨은 에큐메니컬적이고 교단을 아우르는 설교 사역과 ‘사차원 복음’의 치유사역을 시작했다. 사차원 복음이란 중생, 세례, 성령의 치유, 재림 등을 가리킨다. 맥퍼슨은 당시엔 매우 담대하고 혁신적인 방법으로 대중집회를 열었다. 화려한 광고, 비행기로 전단 살포, ‘예수는 다시 오십니다. 준비하십시오'라는 문구로 도색한 ‘복음 자동차’ 등으로 눈에 띄었다. 라디오를 통해 설교한 첫 여성이었다. 그녀는 재능 있는 대중연설가, 작가, 음악가, 행정가, 미디어 스타로 대중에게 알려졌다.

당시 그를 취재한 한 기자는 “인간에게서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한순간도 쉬는 시간 없이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 동안 청중을 매료시키며 이야기했다”고 기록했다.

the Foursquare Church 유튜브 캡처


1923년 맥퍼슨은 5300석 규모의 초대형 교회인 앙겔루스템플을 LA에 열었다. 그녀는 인종차별에 반대했고 범죄와 빈곤에 맞섰다. 맥퍼슨은 부자나 가난한 자 모두에게 복음을 전했고 치유 사역을 펼쳤다. 여성들의 목회 활동을 장려했고 마약 퇴치를 위한 캠페인을 벌였다.

맥퍼슨은 이런 말을 남겼다.

“웅변가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기쁜 소식을 마음에 품고 기꺼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영혼을 얻고자 하는 사랑은 뼛속까지 불타오르게 합니다. 영혼을 얻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제가 가진 것은 주님을 위한 제단뿐이며, 제 생명과 힘이 있는 한 이 위대한 사명(대위임령)을 수행하는 데 온몸을 바칠 것입니다.”
“You don't need to be an orator. What God wants is plain with good news in their hears, who are willing to go and tell it to others. The love of winning souls for Jesus Christ sets a fire burning in one's bones. Soul-winning is the most important thing in the world. All I have is on the altar for the Lord and while I have my life and strength, I will put my whole being into the carrying out of this great commission.”

2만2000명 성도, 4000여 교회, 200여 해외선교센터, 3000명의 목회자를 훈련한 성경학교 등을 남겼다. 특히 그녀의 라이프바이블칼리지는 남성보다 여성이 훨씬 많이 참여했다. 그녀의 아들인 롤프 맥퍼슨은 교단 총회장을 승계, 1988년까지 유지했다. 아들인 맥퍼슨 목사는 사차원교회를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오순절 교단에 속하게 했다.

the Foursquare Church 유튜브 캡처


사차원교회는 1952년 미국복음주의협의회(NAE)에 가입했고 선교와 빈민구제, 재해 원조, 여성 사역 등 설립자의 기조를 유지했다. 전 세계적으로 사차원교회의 40%는 여성 목회자이다.

맥퍼슨의 설교 스타일, 광범위한 자선활동과 에큐메니컬 운동에 헌신한 것은 20세기 은사주의 기독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 ‘땅끝까지'의 저자 앨런 히튼 앤더슨은 “에이미 맥퍼슨은 새로운 미국 오순절 지도자의 원형이 됐으며 새로운 지도자들은 퍼지던 대중문화를 그들의 목적에 맞게 사용하고 적용했다”고 평가했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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